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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30주년 맞은 이건희 회장 저서에서 꼽은 '결정적 장면' 넷

1997년 발간한 유일한 저서 ‘이건희 에세이’…결단을 마주한 그의 속내는?

2017.12.01(Fri) 17:55:48

[비즈한국] 2017년 12월 1일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지 30주년 되는 날이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 전 회장의 사망 뒤 삼성그룹은 긴급 사장단 회의를 열어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의 회장 승진을 결정했다. 

 

이 회장은 2014년 5월 10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공식 활동을 중단하고 치료와 재활에 매진하고 있다. 후계자인 이재용 부회장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올해 2월 18일 구속된 이후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이건희 회장 취임 후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했다. 영광스런 자리가 되어야 할 취임 30주년을 이 회장은 쓸쓸히 맞게 됐다. 

 

‘이건희 에세이-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는 이 회장이 쓴 유일한 저서로 1997년 취임 10년째에 나온 책이다. 그에게 직접 30주년사를 들을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삼성이 도약할 수 있었던 계기와 이 회장의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삼성이 있기까지의 결정정 장면 4개를 책에서 꼽아 보았다. 

 

1987년 11월 이건희 당시 삼성 부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의 유고로 새 회장에 추대됐다. 당시 언론에 소개된 이 회장의 사진. 45세 때다. 사진=연합뉴스


1. 반도체 사업 진출(1983년)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건희 회장 개인의 선택이었다. ‘TV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형편에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시기상조’라는 경영진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 회장은 사재를 털어 1974년 12월 한국반도체의 내국인 지분을 인수한다. 

 

내가 기업 경영에 몸담은 것은 1966년 동양방송에서부터였다. 처음 입사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고 결단의 순간을 거쳤지만, 지금 와서 보면 반도체 사업처럼 내 어깨를 무겁게 했던 일도 없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전자와 자동차 기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새로 나온 전자제품들을 사다 뜯어보는 것이 취미였다. 수많은 전자제품을 만져보면서 나는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선진국 틈에 끼여 경쟁하려면 머리를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1973년에 닥친 오일쇼크에 큰 충격을 받은 이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1974년 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중략) 그러나 한국반도체를 실제로 조사해 보곤 실망이 컸다. 이름만 반도체지 트랜지스터나 만드는 수준이었다. 언제 LSI(대규모 집적회로), VLSI(초대형 집적회로)를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더구나 한미합작이어서 인수한다 하더라도 여러 제약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다.

 

1997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그룹 전략회의 도중 사업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반도체 인수 후 이 회장은 직접 반도체 공장과 일본을 오가며 기술 확보에 매달렸다. 거의 매주 일본으로 가 반도체 기술자를 만났고, 그때 일본 기술자를 소속 회사 몰래 토요일에 데려와 삼성 기술자들에게 밤새 기술을 가르치게 하고 일요일에 보낸 적도 많았다. 

 

이런 노력 끝에 한국반도체는 1981년 초 컬러TV용 색신호 IC를 개발했다. 그러자 반도체 사업 진출을 주저하던 이병철 회장도 관심을 보여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1982년 27억 원을 들여 반도체연구소를 설립하고,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이 회장은 이를 “구멍가게 같은 공장에서 개인사업으로 시작한 반도체가 10년 만에 삼성 핵심사업의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삼성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영하 15℃의 혹한 속에 6개월 만에 기흥공장을 완성하고, 일본이 6년이나 걸려 개발한 64KD램을 6개월 만에 개발했다. 이후로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업체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마침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지 20년만인 1993년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올랐다.

 

2. 프랑크푸르트 선언(1993년)

 

이 회장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말이 나온 건 1993년 6월 7일 프랑크프루트 회의에서다. 회장 취임 직후 위기감에 휩싸인 이 회장은 그 해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3월 일본 도쿄에서 사장단 회의를 가진 후 6월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나부터 변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삼성 신경영을 출범시켰다. 이 회장이 이렇게 한 이유는 회장 취임 직후의 막대한 책임감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79년에 부회장이 된 이후 경영에 부분적으로 관여해왔지만, 그때는 ‘선친’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다. 이제는 내가 모든 걸 짊어져야 하는데, 세계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중략) 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때는 하루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 불고기를 3인분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식가인 내가 식욕이 떨어져서 하루 한 끼를 간신히 먹을 정도였다. 그 해에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1988년 3월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삼성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이건희 회장이 기념사를 통해 제2의 창업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전의 사장단 회의는 분위기가 엄중했다. 이 회장 스스로도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세계 일류 제품과 삼성 제품을 비교했다. 세계 시장에서 우리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삼성의 수준에 대해 변명하는 임원을 퇴장시켰다. 분위기가 몹시 긴장되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경각심을 줄 필요가 있었다. 자그마치 9시간 가까이 회의를 계속했다. 

 

이후에도 이 회장은 68일에 걸쳐 런던, 오사카, 후쿠오카, 도쿄를 오가며 사장단 회의를 주재했다. 

 

해외 간담회를 통해 1800명과 350시간 대화했고, 사장단과는 800시간에 걸쳐 토의했다. 저녁 8시에 시작한 간담회가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계속되기도 했다. 그때는 다들 피곤한 줄도 몰랐다.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하면 8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그리고 8월 4일 도쿄 회의를 마지막으로 간담회를 끝냈다. 6월 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이래 68일간의 대장정이었다.

 

68일간의 대장정 이후 삼성은 7·4제(7시 출근, 4시 퇴근)와 라인 스톱(불량이 발견되면 누구든 즉시 라인을 멈추는 것)을 실시했다. 이 회장은 임원들에게 월요일과 수요일 이틀만 사무실에 출근하고 나머지는 협력업체, 대리점, 애프터서비스센터에서 고객과 직접 상대하라는 시시를 내렸다. 

 

3. 북경발언: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1995년)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이 회장이 최초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당시 국내 정치권과 국민들에게 큰 파장을 남겼다. 이 회장은 이에 대한 소회도 남겼다. 이 회장은 1994년 11월 내한한 리펑 중국 총리를 만나 삼성반도체공장을 안내했고, 리 총리가 초청해 1995년 4월 베이징을 방문해 장쩌민 주석을 만났다. 

 

중국 지도자와 면담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답답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일본은 이미 경제대국으로 자리 잡았고, 중국은 지도부가 앞장서서 경제 발전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데, 우리 행정과 정치는 아직도 규제와 권위주의라는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략) 마침 장 주석과 만난 것이 기자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회담을 마치자마자 우리 언론사 특파원들의 요청으로 북경(베이징)에서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내가 그렇게 공식적으로 기자단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나는 말할 때 외교적 수사를 동원하거나 세련되게 하기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편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중국 지도자들이 보여준 국가 발전에 대한 비전과 자신감, 열정에 대해 느꼈던 부러움과 우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일단을 표출했다. 앞으로 정치, 행정, 기업, 국민이 제각기 일류가 되고 서로 유기적으로 힘을 합칠 때 모두 덕을 보는 선순환이 형성되리라는 평소 소신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이러한 내 심정을 나타낸 것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이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기업은 1류, 행정은 2류, 정치는 3류’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되었다. 그들 역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이런 극단적인 용어를 써가며 정치인과 관료, 기업인이 하나로 뭉쳐 오늘날 경제대국을 이루었다. 

 

(중략) 그런데도 내 발언의 진정한 취지와 의도는 덮어둔 채 마치 정부를 비판하고 정치권을 매도하는 내용으로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당시 나의 순수한 취지와 충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현실에 실망도 많이 했다. 

 

199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임된 이건희 삼성 회장이 미국 방문일정을 마치고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당시 한국은 오랜 군사정권을 끝내고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해 민주주의의 싹을 틔우고 있던 때였다. 이 회장의 이런 직설적인 화법은 2011년 3월 10일 다시 한 번 파란을 불렀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정운찬 총리가 제안한 대기업의 이익을 협력사와 나누는 ‘초과이익공유제’가 큰 이슈였다. 전국경제인연합 회장단회의를 참석하고 나오던 이 회장에게 기자들이 ‘이익공유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 회장은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 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말인지를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어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점수를 매긴다면 어느 정도?’라는 기자의 질문에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래도 계속 성장을 해왔으니, 낙제점수는 아니겠지요. 우리나라 경제가 과거 10년에 비해서는 상당한 성장을 했잖습니까”라고 답했다. 

 

이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당혹스럽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고 비판했고 청와대도 비공식적으로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상황에서 이 회장의 발언은 듣기 거북하고 의아하다는 분위기”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회장이 북경발언에 대해 책에서 밝힌 속마음을 보면, 16년 뒤 ‘낙제점은 아니다’는 발언에 대해서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 자동차 사업 진출(1995년)

 

이건희 회장의 결단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이력에서 지우고 싶을 사업이 있다면 자동차사업 진출일 것이다. 삼성은 1990년대 자동차 사업 진출을 준비해 1995년 3월 삼성자동차를 설립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킨 자신감으로 자동차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했던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켜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고, 앞으로 자동차에 투자할 자금을 반도체에 투자하면 편하게 경영할 수 있는데, 내가 왜 또다시 어려운 길을 택했나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었다. 

 

(중략) 자동차에서 전장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으므로 삼성이 그간 축적해 온 전자 분야의 기술력을 성능 차별화의 포인트로 삼고, 전 세계에 걸친 수출망과 관련 분야에서 폭넓게 확보한 내부의 기술인력을 제대로 활용하면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중략) 나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 세계 웬만한 자동차 잡지는 다 구독해 읽었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도 거의 다 만나 보았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오해 속에서 말 못할 고생을 하고 자동차 산업을 잘못 시작했다는 세간의 우려도 있으나, 1998년 3월 출시될 삼성자동차의 품질과 서비스 수준이 이런 오해와 우려를 불식시켜 줄 것이다.

 

2014년 4월 17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이는 5월 10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 회장의 공개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사진=연합뉴스


호기롭게 시작한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곧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직후인 1998년 4월부터 첫 차인 SM5를 판매하기 시작했으나 내수시장 침체로 고전하다가 1998년 6월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당시 정부는 IMF의 지시사항으로 대기업 구조조정 차원에서 삼성자동차를 대우에, 대우전자를 삼성에 주는 ‘빅딜’을 추진했으나,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로 무산되기도 했다. 

 

2조 4500억 원의 채무를 떠안은 삼성자동차를 구하기 위해 이건희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채권단에 넘겨야 했다. 이후 삼성자동차는 2000년 르노에 매각됐으나, 삼성상용차는 매각에 실패해 2001년 청산됐다. 

 

# 이건희 회장의 독특한 습관

 

이건희 회장은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습관을 소개하기도 했다. ‘반도체 사업의 시작’에서는 일본 유학 시절 새로 나온 전자제품들을 사다가 뜯어보는 것이 취미라고 밝힌 바 있다. ‘시뮬레이션 경영’에서는 “삼성 본관 28층의 집무실에서 아래층 직원들 사무실까지 걸으면서 이동 시간을 재보고 가장 빠른 코스가 어디인지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또 어떻게 하면 더 편리하게 쓸 수 있을까 하고는 생각에서 서랍에 달린 손잡이의 위치를 옮겨 보기도 하고 가구 배치를 바꿔 보기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97년 발간된 ‘이건희 에세이-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는 이 회장이 쓴 유일한 저서​다. 사진=우종국 기자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유명 상점들을 둘러보는 것도 이 회장이 자주 하는 일이었다. 

 

나는 회사 직원들과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걸으면서 그곳의 유명 상점들을 둘러본다. 거기서 나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진열 상태, 시선을 끄는 독특한 조명, 그리고 점원들이 고객을 대하는 자세들을 관찰한다. 즉 그 상점의 무형 자산을 살펴보는 것이다.

 

김성근 야구감독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 설명하기도 했다. 시나리오 경영을 도입하자는 취지에서 예로 언급한 것이다.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 김성근 감독은 각종 통계를 바탕으로 철저하게 작전을 짜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시합 전에 그는 상대팀 투수들의 성적 통계를 면밀히 분석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선발 투수와 배팅 오더를 결정하고, 상대 팀 투수와 타자가 바뀔 경우에 가장 적합한 타자와 투수들을 준비해 둔다고 한다.

 

이 회장이 승마를 즐겼던 이유도 나온다. 

 

승마는 인간과 동물이 함께하는 스포츠로 색다른 의미가 있다. 나는 안양에 있는 마장에서 가끔 승마를 즐기고 있고 임직원들에게도 승마를 권하고 있다. 주부대학에 나오는 주부들에게 안양 마장을 개방해 승마를 하도록 했더니 반응이 꽤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장의 승마 사랑은 20년 뒤(발간 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라는 태풍을 낳은 ‘나비의 날개짓’이 되고 말았다. 

우종국 기자 xyz@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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