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국과 유럽연합(EU)의 비즈니스 생태계가 단순한 무역 파트너 관계를 넘어 공동 연구개발(R&D)과 첨단 제조를 아우르는 기술 동맹으로 진화하고 있다. 2011년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양측의 교역과 투자는 꾸준히 늘어, EU는 현재 한국의 3대 상품 교역 상대이자 최대 외국인 투자국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기준 한-EU 간 상품·서비스 교역 규모는 1550억 유로(약 267조 원)를 넘었고, 투자잔액은 950억 유로(약 164조 원) 수준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유럽의 혁신 중소기업과 스타트업들이 한국의 헬스케어 및 딥테크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이러한 협력의 중심에는 유럽 기업들의 아시아 시장 진출을 돕는 ‘EU 비즈니스 허브’ 프로그램이 있다. 2024년 출범한 이 프로그램은 2027년까지 총 20회의 비즈니스 세션을 열어 일본과 한국에 1000여 개의 혁신 유럽 기업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중 절반인 10회가 한국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반도체·디지털 솔루션, 친환경 에너지·탄소저감 기술, 헬스케어·의료기기 분야가 주요 협력 대상으로 선정됐다.
비즈한국은 주한 유럽연합 대표부(EEAS)에서 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월터 반 하툼 경제통상부문 공사참사관과 서면 인터뷰를 통해, 유럽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주목하는 이유와 향후 협력 비전을 들어봤다.
#EU는 한국 최대 외국인 투자자…유럽 헬스케어 기업들, 파트너 찾아
반 하툼 참사관은 유럽 기업들이 한국과의 협력에 강한 의지를 보이는 배경으로 전략적 가치와 상업적 잠재력을 꼽았다. 그는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되고 혁신적인 경제 중 하나”라며 “탄탄한 산업 기반과 높은 수준의 소비자층, 한-EU FTA에 기반한 안정적인 비즈니스 환경이 유럽 기업들을 끌어당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EU는 한국의 전체 외국인직접투자(FDI) 잔액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투자 주체 중 하나다. 지난해 3월 한-EU 디지털 무역협정까지 타결되면서 양측 간 디지털 비즈니스의 법적 기반도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가장 큰 관심을 받는 분야는 헬스케어와 의료기기다. 초고령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한국의 인구 구조적 특성과 바이오헬스 및 AI 기반 헬스케어 솔루션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육성 의지가 맞물리면서 수요가 가파르게 늘고 있다. 반 하툼 참사관은 “의료기기, 보조기술, 디지털 헬스, 원격의료, 재생의학 등에서 한국은 매우 매력적인 시장”이라며 “유럽 기업들은 한국 기업 특유의 공학 기술력, 신속한 실행력, 디지털 통합 역량, 혁신을 빠르게 상용화로 연결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 시장 가장 큰 강점은 안정성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새로운 관세 정책 시행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반 하툼 참사관은 유럽 시장의 가장 큰 강점으로 안정성을 꼽았다. 한국과 EU 모두 WTO(세계무역기구) 중심의 규범 기반 다자무역체제를 지지하는 만큼, 불확실한 통상 환경 속에서도 상호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EU 비즈니스 허브 프로그램’ 통해 양국 실질 협력 확대
반 하툼 참사관은 EU 비즈니스 허브 프로그램이 한국에서 빠르게 추진력을 얻고 있다고 자평했다. 그는 지난 2월 열린 반도체 코리아 2026(Semiconductors Korea)를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반 하툼 참사관은 “주목할 점은 이러한 미션들이 이미 구체적인 비즈니스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44개의 유럽 중소기업 및 스타트업이 서울을 방문해 한국 기업들과 520건 이상의 비즈니스 미팅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미팅들은 단순한 네트워킹을 넘어 파일럿 프로젝트, 공동개발, 공급망 협력 등 다양한 형태의 실제 파트너십 논의로 이어졌고 MOU 체결이라는 구체적 진전까지 끌어냈다”면서 “단순히 혁신 기업의 가시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실제 계약과 기술 협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고무적”이라고 밝혔다.
주한 EU 대표부는 지난 19~2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KIMES 2026(국제의료기기·병원설비전시회)를 통해 의료기기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했다. 한국에서 인구 고령화와 디지털 및 가정 간호 수요가 증가하는 것에 주목해 보조공학, 의료기기, 디지털헬스 및 의료용 ICT, 원격의료 모니터링, 나노기술, 재생의학 및 조직공학 등 분야 50여 개 유럽 기업을 소개했다. 폴란드 의료 AI 기업 메디컬고리드믹스가 한국의 한 웨어러블 ECG(심전도) 기업과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다음 EU 비즈니스 허브는 오는 5월 20~22일 열릴 예정으로 청정 에너지 기술, 에너지시스템, 순환경제, 환경 및 기후변화 완화 기술 및 솔루션 등의 분야가 대상이다.
#세계 최대 연구프로그램 ‘호라이즌 유럽’에 한국 참여
한국과 EU의 비즈니스 생태계가 더욱 긴밀하게 융합하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도 있다. 반 하툼 참사관은 규제 협력과 시장 접근성, 제도 간 상호운용성 측면에서 추가적인 진전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특히 규제 장벽이 높은 바이오·헬스케어 산업의 경우 행정 절차의 효율화가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반 하툼 참사관은 “의료기기 분야 등에서 시험·인증, 조달, 상용화에 이르는 절차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된다면 유럽의 혁신 기업들이 초기 접촉 단계에서 실제 시장 진출까지 훨씬 신속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향후 양측의 미래 지향적 협력 전망은 밝다는 게 반 하툼 참사관의 판단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다자간 연구혁신 프로그램인 EU의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두 번째 축(Pillar II)에 한국이 2025년부터 준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 하툼 참사관은 “이제 한국과 유럽 기관들은 AI(인공지능), 양자기술, 보건·바이오, 탄소중립 등 분야에서 거의 동등한 조건으로 대형 프로젝트에 공동 참여할 수 있게 됐다”면서 “단순한 연구 협력을 넘어 향후 양국의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한 단계 더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영찬 기자
chan111@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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