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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나] 독일 한복판 월드컵 '한독전' 관람기

한국 골 터지자 남편 "빨리 나와라" 메시지…철없는 아들은 환호성

2018.06.28(Thu) 10:26:19

[비즈한국] 설마 했다. 러시아 월드컵 독일 대 한국의 경기를 앞두고 한국이 2 대 0으로 승리할 확률보다 독일이 한국을 7 대 0으로 이길 확률에 더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는 기사도 보긴 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독일이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 어쩌고 해도 설마 독일이, 전차군단이, 피파 랭킹 1위가 조별리그에서 그것도 4위로 탈락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설마’ 때문에 나는 과감하게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독일 시간 오후 4시, 동네 레스토랑과 펍 등은 응원하기 위해 모인 독일인들로 자리가 없었다. 사진=박진영 제공


학교에서 아이를 픽업해 돌아오니 이미 전반전 중반. 생각해두었던 집 근처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이미 응원 인파로 자리가 없었다. 다른 펍이며 레스토랑도 마찬가지. 겨우 한 곳에 자리 잡은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분위기를 살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는 이가 없었다. 

 

0 대 0이고, 아직은 전반이고, 독일 선수들이 숱하게 기회를 노리며 골문을 두드리고 있어서였는지 모두들 차분한 표정이었다. 일부는 경기를 보는 듯 마는 듯 식사에 열중하는 이도 있었다. 나 말고 동양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 테이블이 눈에 띄었지만 한국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맥주, 피자를 시켜놓고 경기를 보면서 ‘괜히 적진에 가서 봉변당하지 말라’던 지인들에게 카톡을 날렸다. “독일 사람들 듣던 대로 정말 나이스해.” 광적인 팬도 없진 않겠지만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경기 자체에 집중하며 차분하게 응원한다고, 심지어 캐스터와 해설자도 흥분하기는커녕 객관적이라는 얘기를 전에 들은 터였다. 

 

자국 팀의 선전을 응원하는 뜻으로 독일 국기를 매단 자동차들이 거리마다 눈에 띄었다. 사진=박진영 제공


성과 없이 전반전을 끝내고 후반전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독일 사람들은 평온했다. 골이 터질 듯 안 터지는 안타까운 순간에는 탄식하다가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 건 스웨덴이 멕시코를 상대로 3골을 넣고 TV 화면 하단에 F조 승점과 순위 표가 뜨면서였다. 

 

독일이 한국을 이긴다 하더라도 큰 득점차가 아니면 16강 진출이 어려운 상황, 남은 시간을 따지면 사실상 16강 진출 실패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주독일 한국문화원에서 마련한 한국과 독일 축구팬들이 함께하는 응원전 현장에 가 있던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다. 

 

“이제 나와. 사람들 흥분하기 전에.” 나는 답장했다. “그래도 아직 모르는 일 아닌가. 최근 본 경기마다 추가 시간에 골이 터졌는데.” 물론 독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때도 나는 0 대 0으로 비기거나 독일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후반전 추가시간이 시작되고 한국이 한 골을 넣자 레스토랑 안에는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3분의 1 정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던 중에, 그 골이 오프사이드라는 말에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경기가 끝난 후 길가에 버려진 독일 국기. 누군가의 실망스런 마음이 엿보인다. 사진=박진영 제공


희비는 다시 엇갈렸다.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마른 침을 삼키며 비디오 판독을 지켜보던 그들은 결국 골로 인정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남아 있던 독일 팬들도 실망감과 좌절감을 드러냈다. 단 한 사람, 동양인으로 보이던 젊은 여자만이 고개를 숙인 채 히죽히죽 웃으며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아, 한국인이었구나. 

 

대놓고 좋아할 수도 없어 난감한 나와 달리, 흥분한 아들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면서 “혹시 한국이 골을 넣어도 떠들면 안 돼”라고 주의를 줬는데, 기쁜 나머지 잊어버린 거겠지.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전에 서둘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급히 계산을 하고 뒤돌아 나오는데, 세상에, 두 번째 골이 터졌다. 망연자실한 독일 팬들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주독일 한국문화원에서 마련한 한국과 독일의 축구 팬들이 함께하는 응원전 현장 모습. 사진=박진영 제공


같은 시각, 남편에게 전해들은 주독일 한국문화원 상황도 비슷했다. 현장에 모인 200여 명 중 3분의 2가 독일 사람이었는데, 국적 불문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한국 승리로 굳어지면서 환호와 탄식으로 엇갈렸다. 

 

경기가 끝나고 독일 언론들은 ‘악몽’과 ‘재앙’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자국 팀을 비판했고 한국의 경기력을 높이 평가했다. 세계 1위 독일을 꺾은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마음 한편, 슬퍼하고 있을 독일인 친구가 떠올라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말했다. “한국이 정말 잘하더라. 독일 팀이 실망스러웠지. 나는 괜찮은데 내 아들은 울고 있어.” 

 

독일과 한국이 같은 조이니, 두 나라가 함께 16강에 가면 되겠다고, 월드컵 시작할 때만 해도 웃으면서 얘기했는데, 동반 탈락이라니 이런 운명의 장난이 또 어디 있을까. 지인들에게서 ‘당분간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날아드는 이 시각,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기쁘면서도 미안한 이중적인 마음이라니.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지난해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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