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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경제팩트] '아시아의 용' 중국은 왜 영국에 뒤처졌나

16세기 이후 석탄·인쇄술 등으로 인해 경제 격차 벌어져

2019.04.01(Mon) 11:03:43

[비즈한국] 15세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여행한 사람들, 대표적으로 마르코 폴로 같은 사람들은 중국의 아름다운 도시와 잘 발달된 운하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의 정확한 소득수준을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500년 전까지는 서양과 동양의 경제력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15세기까지 동양과 서양의 경제력 격차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유는 1260년부터 1450년까지의 잉글랜드의 인구와 1인당 소득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래 그래프에 잘 설명되어 있다. 

 

중국은 15세기까지 영국과 경제력 격차가 크지 않았으나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양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구가 소득수준을 좌우한다.

 

다시 말해, 인구가 늘어나면 1인당 소득이 감소하며, 반대로 인구가 줄어들면 1인당 소득은 늘어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1310년이다. 

 

당시 잉글랜드 인구는 500만 명에 육박했지만, 1인당 소득은 역사상 최저 수준이었다. 국토는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늘어나니 1인당 소득은 줄어들어 국민 대다수는 기아선상에 놓여 있었다. 이때 흑해지방에서부터 서유럽으로 흑사병이 번졌다. 안 그래도 소득수준이 줄어들어 영양상태가 부실한데, 낯선 전염병이 유입되자 잉글랜드 인구는 140년 만에 1/3 수준으로 감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2배 이상의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렸기에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토지는 더 늘어났고, 또 비옥한 토지만 경작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1260년부터 1600년까지 잉글랜드의 인구와 1인당 소득. 자료=Gregory Clark(2001), ‘THE SECRET HISTORY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이처럼 인구에 의해 소득수준이 좌우되는 상황을 ‘맬서스 함정(Malthus Trap)’이라고 부른다. 

 

15세기까지는 인구가 많은 나라가 더 잘사는 나라였다. 어차피 1인당 소득수준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니, 인구가 많은 나라가 군사력도 강하고 경제력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500년대 후반부터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난다. 1500년부터 1590년대까지는 인구가 늘면서 1인당 소득이 줄어드는 전형적인 ‘맬서스 함정’의 시대였다. 그러나 1590년을 기점으로 인구와 1인당 소득이 함께 늘어나는 이른바 ‘근대적인 성장’이 시작되었다. 

 

1590년부터 잉글랜드에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인구와 1인당 소득의 증가가 함께 나타났을까? 

 

1500년부터 1860년까지 잉글랜드의 인구와 1인당 소득. 자료=Gregory Clark(2001), ‘THE SECRET HISTORY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가설을 제시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케네스 포메란츠로, 그는 ‘대분기’에서 북아메리카 대륙의 자원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변화를 유발한 가장 결정적 이유라고 지적한다.

 

18세기 유럽도 화석연료의 이용 및 신세계의 자원에 접근할 수 없었다면 경제적 가능성을 모두 극대로 활용한 가운데 중국과 비슷한 운명에 빠져들었을 수 있다. (중략) 더욱이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 영국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보유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목재 공급과 토양의 소모 그리고 다른 중대한 생태학적인 요소에 있어서 영국은 중국의 양쯔강 삼각주 지역보다 더 부유하지 않았다. (중략) 해외 자원과 지하 에너지 창고, 즉 석탄을 사용하는 영국식 돌파구의 조합으로 그러한 절벽에서 구조되었다.

 

포메란츠의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1500년대를 전후해서 영국도 인구가 늘어나는 가운데 1인당 토지가 줄어들고, 과다한 인구를 부양하는 과정에서 삼림자원이 고갈되는 등 이른바 ‘생태적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석탄자원의 활용 방법이 발견되고, 더 나아가 발전된 항해술에 힘입어 북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에 성공한 것이 돌파구를 제공했다. 즉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과잉인구를 수출하고, 목재와 식량 자원을 조달함으로써 생태적인 한계를 돌파할 방법을 찾았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이 주장에도 한 가지 흠결이 있다. 중국 청나라도 18세기 이후에 발생한 인구 급증으로 삼림이 파괴되고 1인당 소득수준이 줄어드는 곤경에 처했는데, 왜 석탄 자원의 활용 등 다른 해법을 찾아내는 데 실패했을까? 

 

이에 대해 최근에 읽은 책 ‘투자자가 된 인문학도’는 흥미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그 이유가 바로 15세기 말에 이뤄진 거대한 기술 혁신 덕분이라는 것. 여기서 말하는 거대한 기술 혁신은 인쇄술의 발명을 의미한다. 

 

구텐베르크의 혁신적인 인쇄술이 발명된 15세기 이후 책의 인쇄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미 16세기 후반에 한 판당 하루 1500부를 생산할 정도로 생산성이 개선되었으며, 18세기가 되면 기계공업의 발달과 함께 인쇄기가 책의 수요를 못 맞추는 단계를 벗어난다. 이에 따라 책의 가격도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다. 네덜란드의 기록을 보면, 인플레를 감안한 책의 실질 가격은 15세기 후반에 비해 불과 몇십 년 후인 16세기 초반에 1/6 수준으로 떨어진다. (중략) 18세기에는 중세 수도원에서 책을 필사하던 시절에 비해 책의 제작 비용이 1/3000 이하로 떨어진다. -책 121~122쪽

 

15~19세기 네덜란드의 책 가격 추이. 자료=Van Zanden(2009), ‘The Long Road to the Industrial Revolution: The European economy in a global perspective, 1000-1800’


이렇듯 책값이 저렴해진 게, 왜 인구와 1인당 소득의 동시 증가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에 대해 ‘투자자가 된 인문학도’의 저자는 한 명의 천재로 달성하기 어려운 과학기술의 진전을 유발하는 데, 인쇄술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지적한다.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는 1600년 ‘자석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간하여, 나침반 바늘의 수평 각도가 위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실험으로 밝혀내고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중략) 200년만 먼저 태어났어도 이 책은 어느 수도원의 장서고에 필사본으로 처박혔을 텐데, 시의 적절하게 인쇄술이 등장한 덕분에 큰 공명을 일으켰다. (중략)

 

길버트의 책이 나온 지 60년 만인 1663년, 독일의 오토 폰 게리케가 유황으로 만든 구를 회전시킨 후 천 조각을 문질러 정전하(정지상태의 전기)를 만드는 실험에 성공하며 정전기에 대한 길버트의 가설을 입증했다. (중략) 프랑스에서도 이 대화에 동참했다. 샤를 뒤페가 양전하와 음전하를 발견하면서 같은 전하는 서로 밀어내고 서로 다른 전하는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규명해냈다. 그러자 이웃 네덜란드의 피터 판 뮈센브뢰크도 여기에 가세해 라이든 병이라고 불리게 된 세계 최초의 전지를 만들어냈다. -책 129~130쪽

 

‘투자자가 된 인문학도’의 저자는 인쇄술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진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지적한다.


쉽게 이야기해, 책 덕분에 일종의 거대한 협업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지식이 저렴한 책값(및 신속한 출간) 덕분에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지식이 다시 새로운 발견을 유발하는 선순환(지식혁명)이 벌어졌다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론 금속활자를 이용한 출판 인쇄술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된 중국에서 왜 이상과 같은 ‘지식혁명’이 벌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8만 자가 넘는 엄청난 한자 때문에 금속활자를 이용한 출판의 채산성이 매우 낮았다는 설명을 들으니 허전한 마음이 앞선다. 우리 조상들이 한자가 아닌, 훈민정음을 진작에 잘 활용했더라면 그 뛰어난 금속활자의 기술을 이용해 세계의 혁신을 주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필자 홍춘욱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2011년 명지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12월 한국금융연구원에 입사한 후 교보증권, 굿모닝증권에서 경제 분석 및 정량 분석 업무를 담당하며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KB국민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투자운용팀장을 거쳐, 현재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에서 투자전략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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