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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우주는 '떡락'과 함께 탄생했다

빅뱅 이론 문제 해결한 '인플레이션 모델' 우리는 수많은 다중우주 가운데 하나일 뿐

2020.07.27(Mon) 10:00:12

[비즈한국] 크게 요동치며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게 했던 비트코인. 그 시세가 크게 떨어질 때면, 많은 사람들은 이제 더 떨어질 리 없을 거고 반등할 일만 남았다며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이미 해탈한 듯한 일부 사람들은, 그게 끝이 아닐 거라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바닥인 줄 알았지만 그 아래에는 지하가 있었다.”

 

더 이상 떨어질 리 없는 최저점, 맨 끝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비트코인의 시세는, 사실 아직 더 아래 ‘떡락’할 곳을 숨겨둔 채 잠깐 중간에 머무르는 ‘가짜 최저점’에서 잠시 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들의 슬픈 예감대로, 비트코인은 다시 진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우리 우주의 탄생도 그랬다. 

 

우주는 무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무는 없었다. 단지 무로 보이는 유가 태초부터 있었을 뿐이었다. 우주는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

 

#들판 위를 굴러다니는 구슬 속 우주 

 

공을 높이 들고 있다가 공에서 손을 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공은 아래로 떨어진다. 공이 위에 있을 때에는 더 높은 위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바닥에 있을 때보다 더 불안정한 에너지 준위(Energy level)에 놓인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 그래서 강제로 불안정한 에너지 준위에 공을 붙잡고 있던 손의 외력을 풀어주는 순간, 공은 위치 에너지가 더 낮은 땅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에너지 준위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우주의 모습은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원자핵 주변을 도는 전자들도 에너지를 잃으면서 더 낮은 에너지 준위로 떨어진다. 이때 전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높은 에너지를 바깥으로 방출하며, 원자들은 특정한 빛을 방출한다.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놀이부터, 우주의 알록달록한 가스 구름의 빛깔 모두 전자들이 더 높은 에너지에서 낮은 에너지로 떨어지면서 남긴 흔적이다. 이미지=Encyclopaedia Britannica, Inc


우주 그 자체도 이런 방식으로 그 진화 양상을 표현할 수 있다. 개념을 생각해본다면, 우주 역시 아주 깊은 골짜기와 높은 언덕들이 가득한, 위아래로 들쭉날쭉하는 아주 거대한 에너지 스칼라 장의 들판 위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구슬의 상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우주라는 구슬이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으면 우주는 더 불안정한 높은 에너지 준위에 놓여 있는 상태다. 우주가 깊은 골짜기 가장 바닥에 빠져 있으면 우주는 훨씬 더 안정한 낮은 에너지 준위에 놓인 상태가 된다. 이렇게 넓게 펼쳐진 에너지 스칼라 장의 풍경 위에서 우주 구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따라 우주의 특성과 운명이 결정된다. 

 

#진공은 텅 비어 있지 않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생각해보자.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분자들, 먼지들, 작은 원자들이 실제로 있지만, 완벽하게 이상적으로 이 모든 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짜 진공 상태를 생각해보자. 얼핏 보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의 상태로 보인다. 우리 우주도 이처럼 아무것도 없었던 무에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주 작은 양자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도 실은 아주 난잡하게 요동치는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주 그 자체의 해상도라고도 이야기하는 물리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가장 작은 스케일, 플랑크 길이 수준으로 더 작게 이 텅 빈 공간을 들여다본다면,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다. 텅 빈 공간은 사실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를 파괴하고 서로를 생성하는 혈투가 벌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조용한 전쟁터다.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쌍소멸과 쌍생성을 반복하며 에너지를 토해내고 흡수하는 과정을 표현한 그림. 입자와 반입자가 서로 충돌해 사라지면서 감마선 (에너지)을 남기거나, 다시 진공에서 입자와 반입자가 생성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아주 짧은 순간에 벌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알기 어렵다. 이미지=ANU physics


우주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물질과 그에 대응되는 반물질(anti-matter)로 이루어져 있다. 반물질은 마치 좌우가 바뀐, 거울 세계 속 도플갱어처럼 질량과 크기 등 기본적인 물리량은 동일하지만 전기적 성질과 같은 요소가 완전히 정반대인 물질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전자에 대응되는 반전자는 질량과 크기 등은 모두 전자와 동일하지만, 전기적으로 음(-)의 전하를 띠는 일반 전자와 달리 전기적으로 양(+)의 전하를 띤다. 반물질은 실제로 실험을 통해 그 존재가 입증된 오묘한 물질이다. 

 

마치 나를 쏙 닮은 도플갱어와 악수를 하면 나와 도플갱어, 두 사람 모두 뿅 하고 사라진다고 하는 도시 전설처럼, 전자와 반전자도 서로 충돌하면 아주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토해내며 함께 사라진다. 이렇게 미시 세계에서 벌어지는 도플갱어들이 사라지는 현상을 쌍소멸이라고 한다. 전자와 반입자가 진공 속에서 생성되었다가, 다시 또 서로 충돌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함께 쌍소멸한다면,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로 보일 뿐이다. 

 

텅 빈 듯 진공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양자 스케일의 양자 요동을 시각화한 시뮬레이션 영상. 진공도 실은 상대적으로 에너지 밀도가 높고 낮은 영역이 무작위하게 요동치고 있는 세계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는 에너지도 물질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진공도 실은 그 안에서 계속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물질과 반물질이 혼란스럽게 요동치는 세상이다. 이런 상태를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이라고 부른다. 진공 상태는 소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안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진공인 듯, 진공 아닌, 진공 같은 가짜 진공 

 

우리 우주 역시 에너지 스칼라 장의 들판 위에서 얼핏 보기에는 에너지 준위가 가장 바닥 상태인, 가장 안정적인 지점에 있다고 착각할 만한 지점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 진짜 바닥이 아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작은 골짜기 바닥에 있으면서, 그곳이 산의 가장 아래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보다 더 아래로 산은 계속 이어진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의 뼈아픈 교훈처럼, 바닥 아래에는 더 깊은 진짜 바닥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이처럼 에너지 준위가 제로인 진짜 최저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진짜 최저점이 아니었던 이러한 상태를 ‘가짜 진공(false vacuum)’이라고 부른다. 에너지 스칼라 장에서 가짜 진공에 해당하는, 산 중턱 골짜기에 머무르고 있던 우주 구슬이 어느 순간 더 아래 깊숙한 진짜 바닥을 향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가 방출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시공간을 만들어낸 인플레이션, 우주 급팽창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아직 바닥 상태에 떨어지지 않은 가짜 진공 상태에 머무르고 있던 준안정 상태(meta-stable)의 초기 우주는 ‘양자 터널 효과(quantum tunneling effect)’에 의해 에너지 장벽을 넘어 더 깊은 아래 바닥 상태의 에너지를 향해 추락했다. 바로 이때 만들어진 막대한 에너지는 우주를 탄생하게 만들었다. 이미지=https://bit.ly/39wUgqX


태초에 우리 우주의 구슬은 에너지 스칼라 장의 들판에서 평탄해 보이는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우주가 스칼라 장의 가장 밑바닥, 가장 낮은 안정적인 에너지 준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트코인 투자자들의 교훈처럼, 사실 이건 완벽한 바닥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밑에 아직 한참 남은 더 낮은 바닥들이 숨어 있었다. 우리 우주는 이 최저 바닥보다는 약간 더 높은, 에너지 스칼라 장의 대륙붕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던 셈이다. 

 

어느 순간 그보다 더 깊은, 해구와 같은 가장 바닥 상태의 에너지 준위를 향해 우주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원자핵 주변에서 높은 에너지 준위에 놓여 있던 전자가 낮은 준위로 떨어지면서 그 에너지를 알록달록한 빛으로 방출한다. 마찬가지로 높은 준위에 있던 우주는 낮은 준위로 떨어지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토해냈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과 함께 시공이 태동하는 어마어마한 역사가 쓰이기 시작할 수 있었다. 

 

#바느질 조각이 없는 완벽한 우주 

 

지난 글에서 기존의 고전적인 빅뱅 모델이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몇 가지 살펴봤다. 우주가 태초부터 거의 완벽에 가깝게 우주의 모든 영역이 열적인 평형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할 정도로 우주가 아주 균질하게 식어 있다는 지평선 문제가 있다. 또 우주가 태초부터 거의 완벽에 가깝게 딱 정확한 밀도로 시작되었어야 한다는 편평도 문제가 있다. 둘 모두 우주가 마치 태초부터 아주 특정하고 절묘한 상황에서, 부자연스럽게 모든 조건이 미세 조정되어 짜맞춘 상태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미세 조정 수수께끼(fine-tuning mystery)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주가 처음 탄생하면서, 태초에 하나의 힘으로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던 전자기력과 강력, 약력이 서로 분리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양의 모노폴이라는 가상의 입자가 튀어나왔어야 하지만 실제 우주에서는 단 하나의 모노폴도 실제로 검출된 적이 없다. 

 

물리학자 앨런 구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묘안으로 태초에 우주가 너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우주 속 모노폴의 밀도가 순식간에 낮아져 희석되는 바람에 우리가 모노폴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오늘날 우리가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는 우주의 급팽창이 수학적으로 가능한 해를 찾아냈고, 이를 통해 앞서 다른 천문학자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우주의 미세 조정 문제를 별 일 아니라는 듯이 허탈할 정도로 깔끔하게 해소해버렸다. 

 

우주의 인플레이션은 마치 방금 끓기 시작한 액체 상태의 물이 기체 상태의 수증기로 기화하는 순간, 순식간에 아주 빠르게 부피가 늘어나는 현상과 같이 진행된다. 물은 액체에서 기체로 물질의 상(phase)가 변할 때, 부피가 무려 천 배 넘게 커진다. 이처럼 물질의 부피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상전이(phase transition)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전혀 이상하지 않은 현상이다. 인플레이션 역시 태초에 어떤 임계점을 돌파한 우주가 상전이를 겪으면서 급격한 팽창을 겪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사진=pixabay


새롭게 제시된 인플레이션의 관점에서 우주가 시작되는 순간을 상상해본다면, 우주가 완벽에 가깝게 온도가 아주 고르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 된다. 우주의 지평선 문제의 핵심은 우주가 통째로 골고루 열을 나눠가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국지적으로는 좁은 영역 안에서 지난 138억 년간 열을 나눠가지며 비슷한 온도가 만들어질 수 있지만, 서로 멀찍이 떨어진 영역들이 굳이 완벽하게 온도가 같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빅뱅 모델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우주의 배경복사는 완벽하게 균질하고 매끈한 단 한 장의 거대한 담요가 아니라, 서로 각기 다른 온도로 식은 작은 천 조각들이 얼룩덜룩하게 누더기처럼 널브러져 있는 조각보와 같아야 한다.

 

인플레이션이 없을 때(위)와 인플레이션이 있을 때(아래)의 상황을 비교했다. 인플레이션이 없는 경우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우주의 모든 영역이 고르게 열을 나눠가질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관측 가능한 우주(회색 영역) 안에서 온도가 각기 다른 여러 영역을 봐야 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있었다면, 열평형에 도달한 좁은 영역 자체가 관측 가능한 우주를 다 포함할 정도로 아주 크게 성장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우주가 통째로 열평형에 도달한 것으로 관측될 수 있다. 이미지=Nick Strobel


하지만 태초에 시공간이 아주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인플레이션을 겪었다면, 초기의 아주 좁은 범위에 제한된 열적평형에 이른 국지적인 영역 자체가 우리의 관측 가능한 우주를 압도할 정도로 훨씬 거대해질 수 있다. 태초의 우주는 작은 보자기 조각 하나 안에서만 열적 평형에 이르렀지만, 그 작은 천 조각 자체가 담요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비대해지면서 결국 관측 가능한 담요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완벽하게 균질한 온도로 식어 있는 세상을 보게 된다. 

 

결국 우주는 태초의 순간, 급격한 팽창과 함께 누더기같이 꿰매진 자신의 흔적을 빠른 속도로 바깥으로 밀어내며,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자신의 바느질 조각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버렸다. 말 그대로 무결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우주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인플레이션에서 피어난 거품들 

 

우주가 너무 완벽하게 임계밀도에 근접한 밀도를 갖고 있다는 편평도 문제 역시 인플레이션으로 깔끔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급격한 시공의 팽창으로 인한 우주 편평도의 변화는 급격하게 팽창하는 볼링공의 표면 위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볼링공이 작을 때는 우리는 당연히 볼링공 표면의 곡률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볼링공이 빠른 속도로 쭉 늘어나서 태양만 한 크기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구 정도 크기만 되어도 그 표면에 살면서 지구의 곡률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아직 있지 않던가. 그런데 볼링공이 태양만 하게 커진다면 우리는 과연 그렇게 커진 볼링공 표면에서 공의 곡률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볼링공 표면의 곡률이 편평하게 관측되기 위해서, 굳이 공 자체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편평할 필요가 없다. 그 공이 아주 급격한 팽창을 한다면 초기에 그 곡률이 어떠했는지와 상관없이, 비대해진 공 표면의 곡률은 완벽에 가깝게 편평하게 관측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벌어진 1초보다 훨씬 더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우주는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너무나 절묘한 모습을 완성했다. 

 

아주 빠르게 부풀어오르는 풍선 표면 위에 살고 있는 개미를 상상해보자. 풍선이 작을 때는 풍선의 곡률을 느낄 수 있지만, 너무 커져버린 풍선 표면 위에서 개미는 풍선이 평편하다고 착각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Pearson education, Inc


인플레이션 모델은 최근까지 기존 빅뱅 이론의 한계라고 이야기되던 우주의 미세 조정 문제를 속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사실 기존의 빅뱅 이론은 엄밀하게 말하면 빅뱅 이후의 역사만 다룰 뿐, 빅뱅 그 자체는 다루지 않는다. 일단 알 수 없는 이유로 빅뱅이 시작되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그 이후의 역사를 아주 훌륭하게 설명한다. 이름은 빅뱅 이론이지만 정작 빅뱅 순간은 쏙 빼고 우주를 설명하는 훌륭한 이론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빅뱅을 일어나게 만든 기저의 원인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이라는 단 하나의 설명으로 기존 빅뱅 이론이 야기한 우주의 미세 조정 패러독스를 모두 해소했다.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아주 낮은 밀도로 희석된 가상의 입자 모노폴처럼, 우주의 급격한 팽창은 빅뱅 모델의 한계들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희석시켰다. 우주가 어떤 인위적인 조작으로 탄생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절대적인 존재의 마지막 남은 여지를 희미하게 지워버린다. 

 

인플레이션 모델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수학적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우주 바깥 또 다른 우주들의 존재 가능성을 이야기해준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은 한 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 오래전 이미 급격한 팽창을 시작한 시공간의 바다 위에서 크고 작은 물거품들이 계속해서 뽀글거리고 있다. 그렇게 피어난 수많은 물방울 중 하나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하나의 물방울 바깥에는 우리가 어쩌면 앞으로도 절대 관측할 수 없을, 또 다른 우주들이 쉴 새 없이 부풀어오르고 터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곧 우주(universe)란 단어 뒤에 ‘우주들(universes)’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쩌면 문법상 전혀 잘못되지 않은, 올바른 표현이 될지 모른다. 

 

수많은 다중우주 중에 어떤 곳들은 운 나쁘게 중력이 살짝 더 강하거나, 암흑에너지가 살짝 더 많거나, 양성자가 중성자에 비해 살짝 더 가벼워서, 일찍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는 전혀 다른 끔찍한 파국을 맞이한 곳도 있을 것이다. 일부는 운 좋게 우리처럼 안정적인 우주를 유지하며, 그 안에서 자신들의 우주를 바라봐줄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성공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언젠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우주가 실은 수많은 물거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을 그리워하듯, 그들도 절대 만날 수 없을 우리들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이미지=Harald Ritsch/Science Photo Library


만날 수도, 서로의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도 없을 그 수많은 다른 다중우주 종족들과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단 하나, 우리 모두 오래전 하나의 동일한 인플레이션 파도에 휩쓸리면서 피어난 물거품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우주의 탄생 순간이, 무가 유로 바뀌는 마법 같은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롭게 세워지고 있는 인플레이션 모델은, 애초에 우리가 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무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우주는 무에서 유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무에는 사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유가 있었다. 우주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유에서 다른 모습의 유로 변화했을 뿐이다.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galaxy.wb.z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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