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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노포열전] 히수무레하고 수수하고 슴슴한 ‘백석’의 맛, 암사동 동신면가

1964년 문 연 동두천 평안냉면의 후예…적당히 끊어지는 맛이 살아 있는 최고의 냉면

2017.02.20(Mon) 10:42:30

옛날, 시인 백석이 이렇게 썼다. 좀 길지만 읽어보면 입에 침이 고인다. 

 

(전략)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중략)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 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시인 백석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냉면을 노래했다.

국수란 곧 냉면이다. 백석(1912~1996)은 몇 해 전부터 한국에 ‘신드롬’이라 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월북 시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오랫동안 금지의 시인이었다. 기실, 그에게 월북이란 당치도 않다. 그의 고향이 이북이고, 평안도 정주다.

 

“제 부친과 고향이 같지요. 정주 사람도 월남을 많이 했습니다. 냉면은 저 시에 나오는 모양처럼, 아버지가 꿩 사냥을 해서 메밀로 내려 먹던 가족 음식이었지요.”

 

그의 부친은 1·4후퇴(1951년 1월) 때 월남하여 대전으로 피난했다. 거기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들을 낳았다. 박영수 사장(64)이 장남이다. 이후 동두천으로 이주했다. 원래 건설업을 했으나 손해를 보고 식당을 차렸다. 1964년의 일이다. 그것이 평안냉면이다. 동두천의 어른들은 다 기억하는 냉면의 명가. 의정부에 평양면옥, 동두천에는 평안냉면이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일했어요. 여름이면 손이 모자라 고양이손이라도 빌릴 판이었어요. 쇠로 된 분틀(제면기)로 연신 면을 내리고 그걸 삶고 육수 부어 냈지요. 저는 펌프로 찬 물을 퍼올리거나, 육수 냉각을 맡았어요.”

그는 직접 육수냉각기의 구조를 그렸다. 냉장고가 귀하던 60~70년대의 일이다. 얼음물에 소금을 타서 온도를 유지시키고, 그 안에 육수가 가득 든 함석통을 넣는다. 그것에 손잡이를 만들어 빙빙 돌렸다. 그렇게 하면 육수의 온도가 빨리 내려간다.

 

“메밀을 많이 넣었어요. 아버지가 메밀을 워낙 좋아하셨으니까. 메밀은 늦가을에 휴전선 가까운 산동네에 가서 구합니다. 농사 지어놓은 것을 사들이는 거죠. 그걸 제분해서 냉면을 뽑아 팔았던 게죠.”

 

장사는 잘됐다. 여름에 전염병이 돌면서 냉면집이 된서리를 맞은 게 문제였다. 찬 음식을 먹지 말라고 당국에서 계몽을 했던 것이다. 좀 억울한 일이었다. 대신 찬바람이 불면 이북 사람들이 더 신났다. 냉면 먹을 줄 모르는 남한 출신 사람들이 안 오기 때문이었다. 한겨울, 이북 사투리 쓰는 사람만 이 냉면집에 들렀다. 

 

“늘 이북 사람들이 식당에 가득했어요. 겨울에 절절 끓는 방에서 냉면을 먹는 맛! 이거 대단하죠. 거친 이북  투리가 들렸지. 하하. 남자들이 아주 거칠고. 냉면 한 그릇 쭉 비우고 말이죠. 그때 냉면이라는 말을 안 썼어요. 그냥 국수라고 했지. 국수는 메밀로 뽑은 냉면이라야 진짜 국수다, 이런 뜻이었고. 식당도 별로 없고, 실향민들은 많지, 장사가 잘될 수밖에 없었어요.”

 

원조 냉면의 디엔에이가 있는 집에서 막국수라고 부른다. 냉면이 쉬운 것이 아니다. 한 그릇 청해본다. 놀랍다. 메밀 향이 있다. 햇메밀을 쓸 때이고, 바로 도정을 직접 하기 때문이다. 

“그날 쓸 거 그날 갈아요. 몽골서 생산된 메밀을 구해옵니다. 그게 좀 비싸도 향이 있습니다.”

 

7 대 3(메밀 7에 전분과 밀가루가 3)으로 반죽한 면이 일품이다. 직수굿하고 적당히 끊어지는 맛이 살아 있다. 최고의 냉면이다. 육수도 시원하게 제대로 뽑았다. 사골과 고기, 동치미가 섞여 있다. 한때 흔한 작물이었지만, 이제 귀물이 된 메밀. 미국에 의해 다량의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메밀은 거의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일본이 우리나라 것을 수입해가면서 더 귀해지기도 했다. 

취재를 마치고 와서도 오래도록 그 냉면이 입에 남아 있었다. 참 좋은 면을 먹었구나, 싶었다.

 

냉면과 함께 만두 역시 이북음식.


박영수 사장은 스스로 ‘무향민’이라고 한다. 이북도, 태어난 대전도, 자란 동두천도 모두 고향이라고 부를 어떤 정서가 없다. 그는 대전의 피난민 수용소 지구인 대흥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그에게 “대전서 났디만 너는 고향이 피안도 덩두디(평안도정주지)”라고 세뇌(?)를 했다고 한다.

“그래봐야 제가 통일되어 정주를 가본들 뭘 알겠습니까. 저는 그냥 무향민이 맞아요. 이게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지요.”

 

그의 식당에서는 냉면을 막국수라고 부른다. 하얗고 연한 녹색이 도는 메밀을 갈아 만든다. 원래 막국수란 설(說)도 많은 음식이다. 막(갓) 갈아서 먹는다 하여, 막(거칠게) 갈아서 먹는다 하여, 냉면이 아니라 서민의 막(저렴한) 국수라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 물론 이 의미가 모두 포함된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박 사장으로부터 의미심장한 설명을 들었다.

 

“저희들은 그때 메밀을 공장에 들고가서 제분을 해옵니다. 이때 속메밀은 냉면을 하고, 좀 거무튀튀한 겉메밀은 보리개떡 같은 걸 해먹거나 국수를 내렸어요. 냉면에 쓰는 곱고 흰 가루가 아니라고 해서 그걸 ‘막국수’라고 불렀어요. 그 가루를 막가루라고 했거든. 아버지는 속메밀 8에 밀가루나 전분 2를 넣고 반죽을 했거든. 남는 막가루는 파는 게 아니고 식구들이 먹는 거였지요.”

당시 석발기(돌 고르는 기계)가 없을 때여서 겉메밀, 즉 막가루에서는 돌도 씹히고 그랬다. 

“구수하고 맛있었어요. 속 메밀과 달리 거친 맛이 있었어요.”

 

동신면가는 그날 쓸 메밀을 그날 도정해서 면을 뽑는다. 그래서 메밀 향이 살아 있다.


그의 집은 들어서는 입구에 제분기가 있다. 속메밀만 사서 하루치씩 즉석 도정하여 쓴다. 미리 갈아둔 건 향이 다 날아가서 싫다. 더러 냉면 모르는 이들이 ‘화장품 냄새가 난다’고 할 때가 있다. 그는 차분하게 설명한다. 메밀 향을 한번도 못 맡아본 이들을 위한 서비스다. 

“질기지 않다고 뭐라 하는 분들도 있어요. 메밀은 안 질긴 게 특징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죠.”

 

냉면 육수는 양지와 사골을 기본으로 한다. 그래서 육수가 어느 정도 색깔이 있다. 

“옛날 아버지 대에는 육수에 비결이 있다고 직원들 퇴근시키고 부모님 두 분이 만들곤 했어요.”

 

요즘 냉면 명가들이 재편성되고 있다. 새로 시장에 진입하는 집들도 있다. 어쨌거나 1964년 평안냉면의 맛이 이 집에 있다. 강력 추천한다.

 

*박찬일 노포열전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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