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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인생독서] 우리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

2017.11.07(Tue) 09:36:12

[비즈한국] 제 주위에는 지난 몇 년 사이, 아픈 사람이 부쩍 늘었습니다. 목 디스크로 치료를 받는 사람, 공황장애로 약을 먹는 사람, 호르몬 이상으로 고생하는 사람, 등등. 업무상 스트레스가 심해 휴직을 하는 이도 많고, 퇴사를 결심하는 사람까지 있었어요. 회사를 나가겠다는 후배를 붙잡고 말리면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형, 그냥 계속 다니다가 병 날까봐 겁이 나요.” MBC를 20년 가까이 다녔지만, 이런 집단 발병은 처음입니다.

 

 

질병의 원인을 찾는 학문은 역학입니다.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고 노동자가 벤젠에 노출되면 백혈병에 걸릴 수 있다는 걸 밝혀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요. 사회 역학이란, 흡연과 벤젠 노출처럼, 차별과 사회적 고립과 고용불안이 인간의 몸을 해칠 수 있다는 연구가설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은 사회적 상처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는지 보여줍니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책 7쪽

 

세월호 특조위 기간에 책임연구원으로 ‘생존 학생 실태조사’를 진행한 저자는 과거의 기록을 찾아봅니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대구지하철 등의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는데, 놀라울 만큼 기록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답니다. 참사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 그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습니다.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국가가 그 아픔을 개개인에게 넘긴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월호 참사마저 그렇게 보내면, 우리에게 공동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은 참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니까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그 아픔을 글로 남겨야 합니다.

 

MBC 동료들의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것을 보며, 방송 장악이란 결국 방송 노동자들에게 산업재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부당한 노동탄압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진 언론의 폭력으로 보면 가해자입니다. 얼마 전 MBC 파업 현장을 찾아오신 단원고 어머니들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MBC 뉴스였답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튿날 유족보상금을 다룬 MBC 보도는 자식을 잃은 부모를 운 좋은 사람 취급하고, 국민과 피해자를 이간질했습니다. 이런 구조적 폭력이 벌어질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 생각을 하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은 참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분향소를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민들. 사진=고성준 기자


책 말미에 미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행해진 차별 실험이 소개됩니다. 백인 아이들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눈 색깔로 우월하고 열등한 사람을 나누었답니다.  갈색 눈이 우월하고 파란 눈은 열등하다고 가르쳤더니 아이들이 눈 색깔에 따라 주눅이 들기도 하고 차별도 하더라는 거죠. 나중에 반대로 가르쳤더니 상황은 금세 역전되더랍니다. 

 

주목할 사실은, 피해자의 경험을 가진 아이들은 ‘우월한’ 집단이 되어서도 ‘열등한’ 집단에게 너그럽더라는 거죠. 차별받는 소수자가 되어본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더욱 조심할 줄 알게 된다고요. 지난 몇 년, MBC에서 노동탄압을 겪은 피디와 기자 들이, 이제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시선을 돌려 그들의 입장에서 방송을 만들어 줄 것을 희망합니다. 우리의 아픔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힘든 나날이 갖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 

김민식 MBC 피디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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