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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탐식다반사] 시간과 경험으로 완성한 유니콘급 귤 브랜디

쌉쌀·고소한 응축된 귤 향 풍기는 '신례명주'…'일품진로' 양조사 이용익 공장장 작품

2018.09.18(Tue) 17:56:06

[비즈한국] 제주도 서귀포시 신례천로 46. 귤 농사에 쓰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트럭들이 듬성듬성 노변에 주차돼 있는 것이 인적의 전부인 한적한 도로를 조금 따라 올라가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건물이 나타난다.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서서 서성대고 있어도 인기척은 나타나지 않는다. 군데군데 진열된 술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계세요, 술 사러 왔어요” 하고 허공에 외치니 저쪽에서 드디어 사람이 바쁜 기색을 하고 잰 걸음으로 나타난다. 깡마른 체형의 노인이다. 나와는 한 번 스친 적 있는 구면이다. 나온 쪽을 쓱 보니 추석 전이라 선물 포장에 다들 매달려 소리도 여념도 없는 모양이었다.

 

신례명주를 생산하는 시트러스의 외관. 사진=이해림 제공

 

서귀포시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이곳은 양조장이다. 이름은 ‘시트러스’. 귤로 만든 술이 전문이다. 신례리는 제주에서도 귤 생산지로 이름난 곳인데, 생산량도 많고 귤 맛도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시트러스는 신례리의 귤 생산 농가 140곳이 공동체를 이뤄 차렸다. 지역공동사업단으로 시작해 현재는 농업회사법인이다.

 

시트러스에서 만드는 증류주인 ‘신례명주’는 이전 칼럼에서도 슬쩍 언급했다시피 홍대 앞 ‘산울림 1992’에서 맛을 봤다가 한 모금 만에 홀딱 반한 술이다. 4월 말 열린 주류박람회에서 이 양조장의 부스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시음주를 홀짝홀짝 과하게 많이 받아 마시면서 양조장 분들을 스치듯 만난 적이 있다.

 

제아무리 한국 술은 온라인 판매가 된다지만, 눈앞에서 사는 것만큼 편한 일이 없는지라 박람회에서 곧바로 미니어처를 몇 병 사서 나도 마시고, 친한 바에 칵테일 베이스로 써보라고 나눠주기도 했다. 개인적인 출장길 짐에도 신례명주 미니어처를 잔뜩 챙겨 도쿄의 덴(den), 뉴욕의 오이지(oiji), 아토보이(atoboy), 꽃 코리안 스테이크하우스(Cote Korean Steakhouse), 일레븐 매디슨 파크(Eleven Madison Park) 등 레스토랑에 선물로 안기기도 했다.

 

50도 고도주이지만 독하지 않다. 잘 만든 술이다. 40도짜리 ‘신례명주 마일드’도 따로 나오는데 역시 50도짜리가 더 맛있다. 사진=시트러스 홈페이지

 

오지랖이 풍년이지만, 그만큼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술이다. 그간 한국 술에 느꼈던 갑갑함과 섭섭함을 이 술이 첫 모금에 해소해줬기에 감사함이 있다. 아무튼 그 기세대로 휴가로 간 제주에서 굳이 짬을 내 기어이 양조장까지 찾아가고 말았다.

 

양조장 이용익 공장장을 서울의 박람회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귤 농사짓는 할아버지인 줄로만 알았다. “오크 이것저것 써봤는데 리무쟁 오크가 제일 낫더라고요” 하는 말씀을 해서 ‘귤 농사짓는 할아버지가 취미로 술 공부를 어쩜 저리 열심히 하셨나?’ 의아했지만 캐묻기도 애매한 자리라 대충 넘어갔던 바다. 리무쟁 오크는 프랑스 리무쟁 지역에서 난 오크를 말하는데, 코냑 등 브랜디를 만들 때 이 리무쟁 오크를 쓰는 일이 많다. 물론 와인을 숙성할 때도 사용한다. 타닌이 많아 술을 맛있게 쌉쌀하게 숙성한다.

 

귤 껍질을 제거하고 착즙해 즙만 걸러내 맞춤 배양한 효모로 발효시킨 것이 과실주인 혼디주, 그 술을 증류해 리무쟁 오크에 2년 반 숙성한 것이 신례명주가 된다. 과일을 발효한 술과 그것을 증류한 것이니 제주식 귤 와인과 귤 브랜디인 셈이다.

 

탱크에서 바로 뽑은 술을 맛보여주는 유니콘, 아니 이용익 공장장의 뒷모습. 미완의 술을 맛보며 술의 시간을 되짚어보는 것은 양조장 투어의 재미. 물론 맛은 오크에 숙성해 완성한 쪽이 낫지만. 사진=이해림 제공

 

이용익 공장장이 고안한 대로 제작했다는 증류기며 여과기, 습도와 온도가 조절되는 지하의 숙성실 등 제대로 된 양조 설비를 보면 다시 의아함이 솟구쳐난다. 귤 농부의 취미생활이라기엔 너무나 모든 것을 다 알고, 경험해보고, 실패로부터 답을 낸 후 차린 오차 없는 설비다. 무엇보다도 술의 퀄리티 자체가 취미생활로는 나올 수 없는 단계에 가 있다.

 

특히 신례명주는 확 퍼지는 응축된 귤 향에, 쌉쌀하다가도 고소한 맛에, 터져 나오는 감칠맛까지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다. 농부를 무시해서가 아니고, 귤을 무시해서도 아니다. 정체가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분명 뭔가 있다. 2015년 설립한 농가 공동체의 양조장이 이토록 실패가 없을 수는 없다. 신례명주는 첫 배치부터 완성도가 갖춰져 있었다.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경지로 시작한 양조장이다. 시간과 경험은 위장할 수 없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꾸밀 수가 없다.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감추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렇게 티가 나는데 무슨 수로 숨긴단 말인가.

 

‘내 신례명주’를 개별적으로 묵혀둘 수 있는 개인 오크통으로도 판매 중이다. 인생의 버킷리스트가 하나 늘었다. 사진=이해림 제공


“원래는 무슨 일을 하시던 분인가요? 이게 다 뭔가요?” 참지 못하고 탄식처럼 묻자 이 공장장이 아무렇지 않게 청춘을 풀어낸다. 1975년에 진로에 입사해서, 80년대에 이미 전 세계 주요 생산지의 양조장을 돌며 공부를 쌓았다. 우리는 고작 10년 전부터 싱글몰트 위스키를 즐기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미 80년대에 그 양조장까지 다녀온 것이다.

 

현재 품귀현상을 겪고 있는 일품진로를 만든 것도 이 공장장 본인이다. 92년도에 만들었다. 70대에 접어들어 제주로 스카우트되어 귤로 브랜디를 만들고 있는 양조사가, 아이고 진작 몰라 봬서 죄송한 그 정체다. 맛 좋은 술 좀 사보겠다고 먼 길 갔다가 한국 양조의 역사와 전설을 만나고 말았다. 이건 뭐 당나귀 체험 농장인 줄 알고 갔더니 유니콘 경주장이었달까.​

 

필자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신문, 잡지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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