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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드 뮤지끄] 탐욕이 야기한 말린 과일과 종말, 그리고 전기성

80년대 감성 흠뻑 젖은 레트로 사운드로 종말을 노래하는 아티스트

2018.12.10(Mon) 16:11:35

[비즈한국] 비교적 따스한 집에 앉아 모니터에서 ‘-10’이란 숫자를 본다. 어렴풋한 지구과학상식을 뒤져 시베리아 기단을 떠올린다. 어제 봤던 이 숫자를 떠올리며 옷을 단단히 입고 문을 열고 나선다. ‘-10’으로 측정된 공기에 속도가 더해진 바람이 되어 내 얼굴과 얇은 바지 아래 허벅지를 때리는 순간 ‘악’하는 비명과 함께 나의 생각은 시베리아 기단을 빠르게 지나쳐 깊고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된다. 

 

나의 조상, 그리고 그 조상의 조상은 어쩌다 이런 척박한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한반도에는 구석기 유적지가 있다. 발품을 조금 더 팔아 태국이나 베트남으로 갈 수는 없었던 것일까. 또 150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몸은 이런 추위에 맞게 진화한 것일까. 그런데 왜 이렇게 괴로울까.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 생명력이 진동하는 여름, 풍족한 가을에 이 땅에 정착한 내 조상의 조상이 겨울을 맞이하는 순간을 상상한다. 영하 10도. 발가락이 얼어붙고, 뛸 수 없게 되고, 지독한 굶주림에 생명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가며 이 동네로 이사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겐 자식이 있었다. 자식에 자식이 거듭되어 내가 나오기까지.

 

나사, 아니 옥토끼 우주센터. 영상=온스테이지

 

뗀석기와 우주여행 사이 그 어디쯤에서 인류는 달콤하고 맛있지만 금방 상하는 과일을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낸다. 햇볕에 말리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말린 과일을 럼에 절인다. 한 병의 럼을 만들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곡식이 필요한가. 

 

게다가 21세기의 인류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럼에 절인 말린 과일에 버터, 샹보르(Chambord, 블랙베리와 라즈베리가 들어간 리큐어)시럽, 마지막으로 화이트 초코를 아찔하게 콕 찍어 케이크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끝모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이 아찔하고 위험한 케이크는 바로 두모망(doux moment)의 크리스마스 럼후르츠 파운드 케이크다. 

 

크리스마스 럼후르츠 파운드 케이크. 사진=이덕 제공

 

한 손에 들고 크게 한 입 물고 씹으면 버터향 틈에서 과일향이 럼을 타고 올라온다. 말리면서 한 번 죽은 과일의 상큼함은 샹보르시럽으로 부축했다. 덕분에 촉촉하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초코는 덤이다. 외관과 구성을 보면 이제 한국에서도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케이크로 자리 잡은 슈톨렌이 떠오른다. 두모망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방식이다. 

 

맛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이런 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은 인간을 동굴에서 우주로 인도했다. 트랜지스터, 컴퓨터, 손목시계, 인공지능…. 결국 이러한 기술들이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새로운 21세기가 다가오면 컴퓨터가 오류를 일으켜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80년대 홍콩영화 주제곡처럼 들리겠지만 한국어다. 영상=붕가붕가레코드 제공

 

양 팔뚝에 빛나는 케이가드(K-Guard, 전기성이 추구하는 K-Wave에서 비롯되었다)를 장착한 미래의 존재는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 접촉을 통해 물건에 관련된 과거를 읽어내는 힘)능력을 통해 종말 이전에 일어났던 일을 읽어낸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다만 저기는 공룡알 화석지이기에 미래의 존재는 인류에게 일어난 일과 공룡에게 일어난 일을 혼동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처럼 전기성은 세기말의 경계에 서서 20세기와 21세기의 악기를 혼용하여 만든 80년대 소리를 통해 종말에 대해 노래한다. 덕분에 전기성의 공연에 가면 80년대 그 어디쯤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소리에 감성이 촉촉해지고 가사를 쫓는 나의 뇌는 90년대 후반 어디쯤에 있는 동시에 내 몸은 현재에 존재하니 여러 개의 평행우주가 겹치다 못해 복잡하게 얽혀버리는 환상을 체험하게 된다. 

 

인류의 종말이 아직 찾아오진 않았지만 인간의 욕망이 작은 세계를 파괴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한다. 이를테면 ‘젠트리피케이션’처럼. 가게가 없어지고 건물이 없어지면 거기에 있던 사람과 기억과 추억 모두가 소멸된다.

 

이 노래의 모티브가 된 공간은 월세가 올라 사라질 일은 없다. 영상=전기성 유튜브

 

전기성의 우려와 달리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컴퓨터가 2000년을 1900년으로 인식해서 전 세계가 혼란을 겪는 일 또한 생기지 않았다. 1999년 12월 31일에 잘 자고 일어나 2000년 1월 1일을 맞이했을 뿐이다. 어쩌면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종말보다는 몇 시간 뒤 찾아올 오늘 밤이 더 사무칠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면 더 지독하게 추워질 테고 매일 다른 고독함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렵다.

 

전기성-이 도시의 밤. 영상=온스테이지

 

필자 이덕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두 번의 창업, 자동차 영업을 거쳐 대본을 쓰며 공연을 만들다 지금은 케이크를 먹고 공연을 보고 춤을 추는 일관된 커리어를 유지하는 중. 뭐 하는 분이냐는 질문에 10년째 답을 못하고 있다.

이덕 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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