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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라마] "닥쳐, 네 목을…" 악역을 응원하게 만든 '태양의 여자'

자극적 소재를 명품 연기로 버무려 시청률 대박…피해자의 잔인한 복수가 숨은 욕망 자극

2019.06.07(Fri) 16:18:36

[비즈한국] “닥쳐, 네 목을 부러뜨리기 전에.” 2008년 여름, 저 강렬한 대사를 들으며 전율했다. 안방극장에서 흔히 들을 수 없는 저 대사를 읊은 ‘태양의 여자’ 주인공 신도영(김지수)은 시청자로 하여금 ‘내가 스톡홀름 증후군을 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드라마에서 선한 주인공보다 사연 있는 악역에 꽂히는 ‘서브병’을 앓는 나로서는 신도영의 등장이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태양의 여자’는 지극히 통속적인 드라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교수 부부가 한 여자아이를 입양한다. 공교롭게도 아이를 입양하고 난 뒤 친자식이 생기고, 교수 엄마는 친자식만 편애하며 입양아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결국 입양아는 어린 동생을 서울역에 유기하고, 20년간 죄책감과 불안함 속에 산다. 대한민국 최고의 아나운서로 성장한 입양아 신도영 앞에 버림받은 동생 윤사월(이하나)이 나타나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사월은 자신의 이름 ‘신지영’을 되찾는 것은 물론 자신의 인생을 짓밟은 언니 도영에게 처절한 복수를 예고한다.

 

‘태양의 여자’​는 자매인 도영과 사월을 중심으로, 준세(한재석)와 동우(정겨운)의 사각관계도 그리지만 사실 도영과 사월의 이야기로 봐야 한다. ‘​진실’​로 이미 공감 가는 악역을 그린 바 있는 김인영 작가는 통속적인 내용임에도 탄탄하고 설득력 있는 대본으로 ‘태양의 여자’​​의 드라마틱한 성공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사진=KBS 홈페이지

 

뒤바뀐 운명, 버려진 친자식, 복수, 사각관계, 기억상실 등 ‘태양의 여자’는 한국 드라마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자극적 요소를 골고루 버무린 드라마다. 아침 드라마나 막장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요소들을 김인영 작가는 교묘히 변주해 뒤틀었고, 김지수와 이하나, 정애리 등의 배우들의 고품격 연기가 더해지며 ‘웰메이드 통속극’이라는 장르를 낳았다. 이 유쾌한 변주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홀렸다. 7%대의 시청률로 시작해 최종회 26.9%라는 보기 드문 수직상승으로 보답했으니까.

 

응원을 보내게 만드는 입체적인 악역 도영과 어쩐지 거부감이 들고 소름이 끼치는 선역 포지션의 사월의 대립. ‘태양의 여자’​는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과 받은 만큼 되돌려준다는 신조 등 욕망하고 그를 행동으로 옮기는 여성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를 연기한 김지수와 이하나의 뛰어난 연기는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 사진=KBS 홈페이지

 

2007년 ‘하얀거탑’으로 이미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성공하고자 폭주하는 욕망의 화신을 경험한 적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태양의 여자’ 신도영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친자식이 생기며 공공연해진 차별로 언제 파양될까 전전긍긍했다는 사연이 있긴 하지만 열두 살짜리 아이가 동생을 버린다는 설정은 충격적이다. 20년 뒤 우연과 운명이 겹쳐지며 자신 앞에 나타난 동생의 존재를 발각당하지 않고자 거짓말을 이어가며 진실을 외면하는 것도 여느 드라마의 주인공들과는 판이하다. 

 

무엇보다, 신도영은 반성하지 않는다. 당한 것은 배로 갚아주지만 그 전에 반성할 기회를 주는 윤사월이기에, 도영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거짓으로 버텨오며 쌓은 완벽해 보이는 도영의 삶은 작은 추락도 허용하지 않았고, 결국 처절하게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우리는 어느새 도영의 그 몸부림을 안타까워하게 된다. 김지수의 어마무시한 연기력 때문에 가능한 기이한 몰입이었다. 아, 예외는 있다. 당시 우리 엄마를 비롯해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치를 떨며 도영을 미워했더랬다.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도영이 사월과 극적인 화해를 하지만, 이내 숨을 거두며 끝나는 ‘태양의 여자’​. 뒤이어 바닷가를 걷는 도영과 동우의 모습을 보여주며 열린 결말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도영을 연기한 김지수의 해석이나 드라마 제작진은 모두 도영이 죽었다는 입장이었다. 아마 도영에게 공감한 시청자들이 도영이 행복해지길 바랐기에 열린 결말이라고 봤던 것이 아닐까. 사진=KBS 홈페이지

 

‘태양의 여자’가 뻔한 통속극이 되지 않은 이유로는 피해자의 입장인 동생 윤사월을 마냥 피해자의 입장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 초반, 사월은 고교생 때 자신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퇴학하게 만든 동창의 결혼식장을 찾아가 그녀의 과거를 낱낱이 까발리는 복수를 감행한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인 복수였다. 도영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끝까지 도영이 자신을 외면하자 사월이 감행한 복수는 어땠나. 단순히 친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서서히 도영을 코너로 몰아갔다. 

 

김인영 작가의 전작 ‘메리대구 공방전’​에서 유쾌, 발랄한 루저 캐릭터를 연기했던 이하나는 ‘​태양의 여자’​로 밝지만 독할 때는 소름 끼치도록 독한 사월 캐릭터를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사진=KBS 홈페이지

 

저 유명한 대사 “닥쳐, 네 목을 부러뜨리기 전에”도 그 과정에서 발생했다. 도영이 진행하는 생방송 쇼에서 즉흥으로 자신의 연극 ‘두 자매’의 일부분을 연기해 보자는 사월의 제안으로 시작된 도영과 사월의 연기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이다. 사월이 “그런데 왜 사랑받은 티가 안 나지?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환한 빛이 언니한테선 안 나네? (중략) 그런데 언니 표정은 늘 춥고 초조해. 꼭 파양될까 두려움에 떠는 아이처럼”이라며 도영의 상처를 잔인하게 쑤실 때는 나 또한 아팠다. 닥치라고, 네 목을 부러뜨리겠다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구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한 ‘​태양의 여자’​에서도 특히 강한 존재감을 발휘했던 최정희 교수 역의 정애리. 아이를 입양하고도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하는 걍팍한 성정의 최정희 교수의 행동이, 도영과 사월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강한 모성과 동시에 비뚤어진 모성을 보여준 독특한 캐릭터. 사진=KBS 홈페이지

 

선한 피해자로 남아 있을 수 있던 사월이 직접 복수에 나서면서, 그리고 그 복수가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시청자들은 당황했다. ‘통쾌해야 하는데, 왜 사월이 악역처럼 보이지?’ 하고 당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김지수의 빼어난 연기 때문에 도영에게 끌린 것도 있지만, 사월이 마냥 선하기만 한 피해자가 아니었기에 일어난 당황이었다. 

 

그리고 도영과 사월의 엄마인 최정희 교수 역의 정애리! 사월의 복수 이전까지는 도영과 최 교수의 불꽃 튀기는 대립이 눈길을 끌었다. 오랜 시간 아이를 낳지 못하다 도영을 입양한 후 아이를 낳은 최 교수의 비뚤어진 모성애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친딸이 사라지고 20년간 시시때때로 도영을 긁고 찌르고 쑤시는 그 잔인한 눈빛과 말과 행동들. 도영의 악행이 밝혀지고 난 뒤에 도영에게 가하는 압박은 문자 그대로 피를 말린다. 가해자인 도영에게 응원을 보내게 된 것에는 저런 엄마 밑에서 20년 넘게 자란 도영에게 연민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자 주인공들의 존재감은 미미했지만 그래도 도영을 사랑하는 동우의 사랑은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처지가 도영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우는 도영에게 소유욕이 거세된 조건없는 사랑을 보내며 곁을 지킨다.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그 사랑법은 당시 많은 여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사진=KBS 홈페이지

 

‘태양의 여자’는 죄를 지은 사람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숨은 욕망을 자극하며 공감을 샀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단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줬으면 하는 욕망 말이다. 죄를 지었어도 도영에게 돌을 던질 수 없게 하는 그 본능적인 욕망을 인정한다면 ‘태양의 여자’에 당신은 무조건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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