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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라마] 21세기에도 구전되는 주홍글씨의 악몽 '애정의 조건'

남자는 돼도 여자는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지독한 이야기

2019.05.31(Fri) 11:19:38

[비즈한국] 케케묵은 구전 같지만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질문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 어디까지 받아들이세요?” 누군가는 “이봐요, 지금 2019년이라고요!”라고 분기탱천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당장 여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선 빈번하게 올라오는 질문이다. 그리고 또 케케묵은 답변 같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말한다. “절대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마세요.”

 

2004년 방영한 ‘애정의 조건’은 강금파(채시라)와 강은파(한가인) 자매를 중심으로 사랑과 결혼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갈등에 주목한 드라마다. 여기서 가장 주요한 갈등은 여자의 과거다. 엄마의 냉대로 애정결핍이던 은파는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전성기(박용우)라는 남자와 2년 가까이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애정의 조건’은 금파, 은파 자매의 사랑과 결혼을 중심으로 한국사회 가정의 보수적인 면모를 풀어낸다. 남편의 외도로 힘들어하다 맞바람을 핀 금파와 동거와 파혼, 유산을 숨긴 은파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의견도 격렬하게 맞붙었다. 2004년의 그 분위기는 2019년에도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사진=KBS 홈페이지

 

선생님을 꿈꾸던 순진무구한 은파는 허랑방탕한 성기의 빚을 갚느라 나이트클럽에서 ‘세일러문’ 복장을 하고 주문을 받는 아르바이트까지 한다. 은파의 바람은 하나, 불안한 동거를 끝내고 안정적으로 결혼하는 것이지만 남자의 마음이 딴 데 가 있어 불안하다. 임신이 되어 은파네 집에서 밀어붙인 끝에 결혼식장까지 입장하지만 그 앞에서 성기는 도망치고, 남겨진 은파는 유산을 한다.

 

이 상황에서 은파의 큰언니인 금파는 절대, 절대 앞으로 만날 남자에게 과거를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비밀이 지켜지면 그게 어디 드라마인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결혼을 꺼리던 은파는 강력하게 대시하는 나장수(송일국)와 결혼하지만, 장수의 여동생이자 은파의 첫사랑 노윤택(지성)과 연애 중인 시누이 나애리(조여정)에게 과거를 들키고, 남편 장수에게 들키고, 결국 시댁식구 모두에게 알려지며 고초를 겪는다.

 

‘​애정의 조건’​에 출연하며 인지도가 껑충 상승하며 스타로 발돋음한 한가인과 송일국. 현재는 ​​‘​삼둥이 아빠’​로 유명한 송일국은 ‘​애정의 조건’​​의 인기를 시작으로 이후 ‘​해신’​의 염장, ‘​주몽’​의 주몽, ‘​바람의 나라’​의 무휼 역을 맡는 등 사극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다. 사진=드라마 캡처

 

이건 사기 결혼이라며 울부짖는 시어머니 이현실(윤미라) 앞에서 은파의 아버지 강한걸(한진희)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범죄 이력이나 혼인 유무가 아닌 동거와 같은 과거를 숨겼다고 사기 결혼이 성립되진 않는다).

 

은파의 상황이 첩첩산중 ‘깝깝’하지만, 언니 금파 역시 만만치 않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결혼한 변호사 남편 진정한(이종원)이 1년 넘게 후배 변호사와 불륜관계인 것을 안 것도 충격인데, 심지어 남편은 뻔뻔스럽다. 미치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술김에 실수로 초등학교 동창과 하룻밤을 보낸 사실을 들킨 금파는 도리어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아이를 빼앗기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당한다.
 

금파의 남편 진정한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후배 변호사와 1년 넘게 불륜을 저지르는데, 이를 연기한 배우가 ‘​​배신 전문 배우’​​ 이종원이어서인지 특히 더 잔혹하고 찌질하고 밉살스럽게 느껴졌다. ‘​​애정의 조건’​​은 금파와 정한, 그리고 상간녀인 백진주의 관계를 통해 외도와 이혼을 대하는 부부의 모습, 자녀가 입게 될 피해 등도 자세히 묘사했다. 사진=드라마 캡처

 

남편 바람은 봐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여자가 맞바람을 피느냐는 거다. 바람을 핀 건 똑같지만 그에 가해지는 비난과 유무형의 형벌은 천양지차다. 은파도 마찬가지인데, 은파의 남편 장수가 동거한 적은 없지만 석 달이 멀다 하고 여자를 갈아치운 전력이 있던 바람둥이라는 사실은 결혼하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아니, 주변에선 오히려 능력 있는 인기남이라고 추켜세울 뿐이다.

 

‘애정의 조건’을 집필한 작가는 문영남으로, 이후 ‘소문난 칠공주’ ‘조강지처 클럽’ ‘왕가네 식구들’ ‘왜 그래 풍상씨’ 등을 선보이며 지금은 은퇴한 임성한 작가, 김순옥 작가와 함께 막장계 트로이카로 이름을 날렸다. ‘애정의 조건’뿐 아니라 문영남 작가의 작품 대다수에는 남자의 바람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관대하게 치죄하고, 여자의 바람은 어떤 식으로든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동거와 불륜이 판을 치는 가운데 분위기가 너무 무겁게만 가지 않은 역할을 톡톡히 한 트리오들이 있었으니 바로 장수 부친 만득과 고모 진득, 장수 모친 현실 트리오와 윤택네 집 삼촌 마진과 형 광택, 친구 범수 트리오다. 특히 문영남 사단 배우로 꼽히는 윤미라의 찰지고 재미난 사투리 연기, 손현주의 어딘가 나사 한 군데 빠진 듯한 소시민 연기가 일품. 사진=드라마 캡처

 

물론 끝에 가서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주말극 특성상 ‘애정의 조건’ 또한 결국 해피엔딩을 맞기는 한다. 금파와 정한 부부는 3년간의 별거를 거친 후 온전히 재결합하고, 상대의 행복을 위해 이혼했던 은파는 장수의 아이를 몰래 낳아 기르고 있다가 장수와 만난 후 다시 결합할 것을 암시하며 끝났거든. 이럴 거면 왜 그 난리를 치며 헤어졌나, 어이가 없기도 하고 과거를 받아들이는 데 장장 3년이라는 시간과 태어난 아이까지 있어야만 가능한가 싶어 씁쓸하기도 한 결말이다. 

 

‘애정의 조건’은 한가인과 송일국이라는 스타 탄생에도 기여했다. 2003년 ‘노란 손수건’으로 김종창 PD의 선택을 받았던 한가인은 ‘애정의 조건’에도 연이어 캐스팅되어 사연 많고 눈물 많은 은파를 연기하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세일러문 복장을 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고, 남자와 동거는 물론 아이까지 유산했음에도 시청자들은 사슴 같은 눈망울로 눈물을 뚝뚝 떨구는 한가인의 처연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은파의 처지와 심경에 공감을 던졌다. 이건 분명 한가인의 힘이다.

 

만약 은파가 남편 장수에게만이라도 결혼 전 과거를 미리 말했다면 장수네 가족도 결국 은파를 받아들이게 됐을까? 특히 은파의 첫사랑 윤택을 사랑하기에 노심초사하던 장수의 여동생 애리와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 않고 해왔고, 어느 정도 공사가 분명한 편인 장수의 어머니 현실의 충격은 당연한 것이었기에, ‘애정의 조건’​은 시청자들의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드라마 캡처

 

은파의 과거를 알고 충격 받아 방황하지만 끝내 은파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감싸는 멋진 남자 장수 역을 맡은 송일국 또한 마찬가지. 사실 ‘애정의 조건’에서 은파와 결국 맺어지는 남자 주인공은 지성이 연기하는 노윤택이었는데, 드라마가 10회 연장되면서 다른 작품 계약 때문에 부득이하게 지성이 하차하고 송일국이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주말 드라마에서 나오는 온갖 상투적인 장면이란 장면은 죄다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정의 조건’이 많은 사랑을 받은 건, 상투적인 만큼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남편이 불륜을 저질러도 이혼하자고 나설까 두려워하는 전업주부의 마음, 내 바람은 일시적인 거니까 괜찮지만 배우자의 바람은 용서할 수 없는 이중적인 마음, 결혼 전 과거는 무덤까지 갖고 가라고 신신당부하는 부모형제의 마음, 자신의 오빠가 과거가 험한 여자에게 속아서 결혼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미는 동생의 마음들은 현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니까. 옳지 않다는 마음과 매정하다고 생각되는 마음은 있을지언정 아예 이해되지 않는 마음은 없다.

 

물론 이런 내용이 앞으로도 계속 통한다면 너무 씁쓸할 것 같긴 하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니까. 뼈를 잘 때리는 기혼녀 친구가 ‘애정의 조건’을 보고 남긴 말을 곱씹게 된다. “결혼 전 연애, 동거, 파혼, 다 OK인데, 결혼 후 바람은 안 돼. 결혼 전에 과거를 고백해야 하냐고? 야, 그건 내 맘 편하자는 거지, 결국 상대 괴로워지라는 행동밖에 안 돼. 그러니까 서로서로 말하지 말라고.” 결국 궁금해하지도, 말하지도, 들키지도 않아야 한다는 건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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