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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신격호 별세] ① 가난한 문학청년, 껌으로 '롯데'를 일구다

가난 못 이겨 일본행…화학 제품으로 사업 시작해 롯데주식회사 설립

2020.01.19(Sun) 20:24:36

[비즈한국]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4시 30분쯤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롯데그룹은 19일 신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신 명예회장은 18일 밤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돼 서울 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였다. 일본 출장 중인 신동빈 롯데 회장도 급히 귀국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重光初子)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 차남 신동빈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딸 신유미 씨 등이 있다. 2회에 걸쳐 신 회장의 일생을 되돌아본다.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초기의 신격호. 사진=롯데 제공


신격호 명예회장은 1922년 10월 4일 경상남도 울산군 상남면(현 울산광역시 상동면) 둔기리에서 아버지 신진수와 어머니 김순필의 5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공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조성된 대암호에 수몰됐으나, 신 명예회장은 후일 마을 언덕 위 생가를 복원하고 인근에 별장을 지어 1년에 두 번 정도 찾아와 며칠씩 묵었다.​

 

신격호는 1929년 입학한 4년제 삼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6년제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의 5학년으로 진학했다.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고, 졸업 후엔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다행히 자수성가로 성공한 큰아버지 신진걸의 도움으로 어린 신격호는 1936년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양산 통도사 인근 경남도립종축장 기수보로 취업했다. 이 무렵 18세의 나이로 상남면 제1의 부농의 딸 노순화와 결혼한다. 

 

신격호는 직장 근처에서 홀로 하숙을 했고, 집에 오면 10남매 대식구가 복작거려 아내와의 정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격호는 박봉에 부업으로 양털 깎기나 돼지 사육을 했지만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처가에 달구지 살 돈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부부 사이도 멀어졌다. 

 

신격호가 가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1941년 큰아버지 신진걸이 사망하면서다. 친척으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데다, 마침 흉년으로 벼 수확이 줄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신격호는 청운의 꿈을 품고 가출을 단행했다. 애초 그의 꿈은 일본에 가서 공부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 후쿠오카로 향한 그는 경남 양산에서 하숙할 때의 집주인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도쿄로 향했다. 고향 친구의 자취집에서 머물며 우유 배달로 생계를 이어갔다. 대학 진학을 위해 와세다중학 야간부에 편입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확한 시간에 우유를 배달하는 그의 신용이 소문나면서 우유 배달을 맡기려는 고객이 늘자 신격호는 고학생들을 우유 배달원으로 직접 고용할 정도로 수완을 발휘했다.

 

작가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신문기자를 꿈꿨던 신격호는 틈만 나면 헌책방으로 향해 문학 전집을 읽었다. 이후 사명을 ‘롯데’로 지은 것도 이때 읽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를로테(샤롯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문학으로 먹고살기가 어려움을 깨달은 그는 와세다중학 졸업 후 와세다공업고등학교 야간부 화학과에 입학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이공계 학생은 징집되지 않는 것도 이유였다. 

 

1944년 신격호를 눈여겨보았던 하나미쓰라는 전당포 겸 고물상 주인이 찾아와 “6만 엔을 출자할 테니 공장을 차려 군수용 커팅 오일을 제조해보라”는 제안을 했다. 당시 회사원 월급이 80~100엔 정도이니 6만 엔이면 꽤 큰돈이었다. 당시 일본은 군수용 물자 생산에 몰두할 때였고 쇠를 깎는 선반작업에 쓰이는 커팅 오일의 수요가 컸다. 그러나 도쿄에 얻은 공장건물은 가동 직전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다시 공장을 얻어 가동했지만 1년 반이 지난 뒤 다시 미군 폭격으로 건물, 기계, 원료가 모두 타버렸다. 롯데의 시초가 전범기업이라는 논란은 신격호의 최초 사업이 전쟁용 군수물자 제조였기 때문이다. 롯데 측은 이에 대해 공장이 폭격을 당해 실제로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전범기업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한편 신격호는 첫 공장 가동 전에 가출 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문안편지를 보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후 재일 조선인들은 대거 귀환선을 타고 귀국했지만, 신격호는 성공하기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화학 전공자인 그는 1946년 공습으로 반쯤 타버린 허름한 벽돌건물에서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전쟁 중 만들던 커팅 오일을 이용해 비누와 포마드를 만들어 팔았다.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물자가 부족한 시대라 신격호의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나미쓰에게 빌린 6만 엔을 1년 반 만에 모두 갚고, 이자로 집까지 한 채 사줬다. 신격호는 일본생활에서 처음 생활의 여유를 누렸다. 이 일로 신격호는 사업의 묘미를 터득하게 되었다. 1947년 그는 금 두덩어리를 고향의 아버지에게 보냈다. 

 

이대로라면 롯데는 식품회사가 아니라 아모레퍼시픽 같은 화장품회사 또는 LG처럼 화학회사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날 공장을 방문한 지인이 껌이라는 것을 소개했다. 미군을 통해 들어온 껌이 기호품으로 인기를 끌었고 전국에 400여 개의 무허가 업체들이 껌을 만들고 있었다. 껌은 적은 자본으로 제조가 가능했고 판매가격의 절반이 이익으로 남았다.

 

화학을 전공한 신격호는 약제사까지 고용해 연구를 거듭한 끝에 품질 좋은 껌을 만들 수 있었다. 껌 역시 성공가도를 달렸다. 과자점 주인들이 제품을 확보하려 공장 앞에서 줄을 설 정도였다. 신격호는 인근 주부들과 고학생들을 고용했다. 주부들에게는 명절에 명주 옷감을 선물하고, 고학생들에게는 학비까지 대주었다. 

 

사업의 규모가 커지자 개인사업자로선 한계를 느낀 신격호는 1948년 6월 28일 도쿄에서 주식회사 롯데를 창립했다. 가출해 일본에 온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신격호는 도서관에서 껌 관련 문헌을 뒤지면서 껌을 연구했다. 그간 값싼 재료와 가내수공업으로 만들던 껌의 품질을 높여 일본 내 1위의 껌 회사가 되겠다는 의욕에 불탔다. 1950년엔 오사카 지사를 설립할 정도로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좌측부터 신동주 전 부회장, 신격호 명예회장, 부인 하쓰코 씨, 신동빈 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롯데 제공


1950년 9월 3일 한국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때 신격호는 세 들어 살던 집 주인의 딸 다케모리 하쓰코(당시 25세)와 결혼했다. 하쓰코의 아버지는 일본 육군 대좌로 1944년 싸이판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결혼 당시 하쓰코가 신격호의 기혼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후일 신격호는 37세 연하인 미스 롯데 출신 서미경 씨(1959년생) 사이에 딸 신유미를 낳았다.  

 

1983년생인 신유미는 외가에 입적돼 있다가 1988년 아버지 신격호의 신고로 법적인 딸로 인정받았다. 신유미는 2010년부터 롯데호텔 고문으로 재직하다, 2017년 퇴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2017년 롯데가 ‘형제의 난’ 수사 도중 서미경 씨가 증여세 미납 관련해 법원에 출두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자 퇴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부인 노순화 씨는 1960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실제 사망 시기는 그보다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신격호의 장녀 신영자 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은 노순화 씨에게서 태어났고, 신동주·신동빈 형제는 하쓰코 씨에게서 태어났다.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이 과거 노순화 씨의 제사를 챙기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장녀 신영자 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도 공식행사에서 하쓰코 여사를 수행하며 ‘다정한 모녀’의 모습을 자주 보였다.

 

한때 문학도를 지망했던 신격호는 마케팅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53년 ‘미스 롯데’ 선발대회를 개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껌이 부서져서 판매가 불가능해진 경우 제조사와 도매상이 반반씩 손해를 지는 관행을 거부하고 제조사가 모두 부담해 업계 평판을 관리했다. 

 

일본에서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1957년 한 가요 프로그램을 몽땅 사서 프로그램명을 ‘롯데 가요 앨범’으로 지었다. 지금도 많이 볼 수 있는 ‘네이밍 스폰서’를 1950년대에 활용한 것이다. 1961년엔 당첨금 1000만 엔 경품 잔치로 업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의 월 평균 가계 수입이 2만 5000엔 하던 때였다. 

 

1961년 롯데는 초콜릿 사업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직원을 유럽으로 보내 스위스 출신 초콜릿 기술자를 영입하고 최신 설비를 도입한 뒤 1964년 첫 제품인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을 발매했다. 이후에도 해외에서 기술자를 영입해 사탕, 비스킷, 아이스크림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종합 과자 메이커로 성장했다. 

 

이즈음 신격호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이자 1957~1960년 일본 수상을 지낸 일본 보수파의 거물 기시 노부스케와 30년 넘게 친분을 유지했다. 조국에 마음의 빚을 지녔던 신격호는 박정희 정권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일본과 한국의 가교 역할과 물밑에서 갈등을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신격호는 본격적으로 한국의 가족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바로 아래 동생 신철호를 일본으로 불러 경영수업을 받게 했다. 신철호는 귀국 후 1959년 주식회사 롯데를 세워 껌 생산을 시작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박정희 정부는 재일동포 기업인의 고국 투자를 적극 권유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신격호에게 군수산업 투자를 요청했으나, 일본 내 ‘평화산업’으로 분류되는 롯데가 군수산업에 진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평소 제철산업에 관심을 가졌던 신격호는 가와사키 제철에 용역을 주어 제철 공장 건립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제철산업은 국영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롯데의 모국 투자는 일본에서 성공한 제과업으로 결정됐다. 

 

그러자 이미 국내에서 제과업을 하고 있던 동생들이 반발했다. 신철호는 캔디와 비스킷 부문을 떼어 ‘메론제과’를 설립하고, 신춘호는 라면 시장 진출을 위해 ‘롯데공업’을 차렸다. 신춘호는 ‘롯데’라는 상호명의 사용을 거부당하자 ‘농심’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신격호는 1967년 자본금 3000만 원 직원 500명 규모의 롯데제과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우종국 기자 xyz@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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