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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전세사기②] 고시촌 꼭대기에서 희망을 빼앗기다

집주인도 중개업자도 책임 안 져…세입자 대부분 20~30대, 가족·대출로 모은 보증금 찾을 길 없어

2021.09.21(Tue) 13:37:28

[비즈한국] 서울대 정문에서 신림역 방면으로 1km가량 올라가면 대학동 고시촌이 나온다. 식당과 학원이 밀집한 녹두거리를 지나면 비좁은 언덕길이 이어진다. 눈이 오면 버스 운행도 하지 않는 가파른 경사 양옆으론 고시원, 원룸 건물이 빽빽하다. 

 

사법시험 폐지와 코로나 여파로 고시생이 빠진 고시촌에는 직장인이 모인다. 서울 치고는 전세 시세가 저렴한 편이기 때문이다. 14일 찾은 고시촌의 한 부동산 바깥 창에는 ‘원룸 4천만 원, 투룸 8천만 원’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강남, 구로 등 직장 근처에 방을 구할 여력이 안 되는 사회초년생들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이 동네를 오간다. 고시촌은 여전히 삶이 여유롭지 않은 이들의 둥지다. 

 

전세난이 극심해지는 와중 더욱 교묘해진 사기 수법이 횡행한다. 고시촌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이는 여러 개의 건물을 소유한 채 부채를 돌려막고, 어떤 이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사진=임준선 기자

 

‘비즈한국’은 신림동 E 원룸 전세사기 사건 피해자 개개인에 주목했다. 원룸은 신림동 고시촌에서도 오르막길 끝자락, 5515버스 종점 근처에 위치한다. 9월 7일부터 15일까지 피해를 입은 23가구 중 8가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 20~30대인 세입자들은 대출을 받거나 가족 도움을 받는 등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전세보증금을 마련했다. 피해자의 이야기와 사기가 이뤄지는 구조를 짚으며 여러 번 물었다. 보증금은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왜 아무도 이들을 책임지지 않는가.

 

#결혼자금·사업자금·8년 모은 돈…보증금의 의미

 

이사한 지 9개월이 지났지만 23㎡(7평) 남짓한 방 한구석에는 풀지 않은 짐박스가 있다. TV와 가구를 사지 않아 조용한 방에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집으로 향하는 매일의 퇴근길이 지옥이었다. 현지 씨(33·가명)는 이 전세 계약이 잘못됐다는 걸 작년 11월 이사하는 날 알았다. 분명 부동산 전세계약서에 ‘잔금 입금과 동시에 신탁등기는 말소할 것’이라는 특약사항을 넣었지만 이사 당일이 되자 집주인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출을 허가한 은행은 대출기한이익상실 통지문을 보냈다. 고스란히 빚이 될 판이었다. 변호사도 은행도 고개를 저었다. 전세금 2억 원 중 1억 원은 직장생활 8년간 모은 돈, 나머지 1억 원은 안심전세대출을 통해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이었다. 곧 결혼자금으로 쓰일 돈이기도 했다.

 

성현 씨(35·가명)는 준비하던 시험을 접고 고향인 울산에 내려가 프랜차이즈 카페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가맹 계약 상담까지 다녀왔지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지금은 올스톱 상태다. 2019년 2월 이 집에 들어왔고, 올해 2월이 계약 만료 시점이었다. 작년 10월부터 방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다. 뒤늦게 보증보험에 가입하려 했지만 등기신탁을 낀 집이라 가입이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서울에서 여름을 보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금방 가을이 왔다.

 

민정 씨(38·가명)의 보증금 1억 원은 6년간 간호사로 일하면서 모은 돈이다. 일부는 가족이 도움을 줬다. 투룸을 원했고, 건물 바로 앞에 버스 종점이 있어 교통편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 직후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집주인과 공인중개사에게 신탁사 동의서를 요청했지만 다들 모른 척하기 바빴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퇴근해도 불안감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우면 집이 괴물 같았다. 내 돈을 먹고 나까지 삼키는 것 같았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각자가 느낀 불안한 신호는 8월 27일 두 건물 23세대 집에 ‘불법점유 해제 협조문’이 붙자 하나로 모아졌다. 협조문을 손에 들고 20여 명의 세입자가 연락처를 공유했다. 종이에는 ‘우선수익권자인 신협이 임대차계약에 동의하지 않았으니 이사를 가지 않으면 명도소송을 진행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올 게 왔다 생각한 사람도, 이제서야 계약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아름 씨(25·가명) 부모님은 딸의 전화를 받고 “지방 사는 부모가 못 배워서 그런 꼴을 당했다”며 울었다. 전세금 8000만 원은 본인과 동생, 부모님이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마련한 돈이었다. 전세 계약을 할 때 인터넷으로 확인한 주의사항을 전부 체크했으며 공인중개사에게도 재차 문제가 없음을 확답받았다. 집주인은 이사 당일 입주 청소도 직접 해줬다. 여러 번 되짚어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아직 부모님에게 말하지 못해 불안한 마음으로 추석을 기다리는 이도 있다. 경민 씨(31·가명)는 부산에서 일하다가 서울로 직장을 옮기면서 이 동네에 왔다. 보증금 1억 원은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과 은행 대출을 통해 마련했다. 곧 다가올 추석에는 부모님이 있는 경남 남해에 내려가는데 마음이 좋지 않다. 멀리 있는 부모님이 상황을 알아도 속만 상하실 것 같아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되면 얘기할 생각이다. 

 

세입자 모임에서 원룸 건물 지하주차장에 붙인 포스터. 9월 7일 저녁 사진을 찍은 뒤 다음날 오전에 가 보니 포스터는 사라져 있었다. 사진=김보현 기자

 

협조문을 받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인 세입자 16명은 현재 집주인을 상대로 형사소송을 계획하고 있다. 내부에서 팀을 나눠 법률 자문을 구하거나 언론에 연락하고, 건물 주변에 포스터를 붙이는 등 공동행동도 진행 중이다. 

 

법안 개정을 위해 지역구 의원을 찾아가거나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는 등의 활동도 함께하고 있다. 9월 3일 올린 ‘거리로 내몰린 청년들을 도와주세요. 부동산, 공인중개사 관련 제도와 법안의 개선을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은 16일 기준 1만 5000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세입자 모임에서 오가며 건물 벽에 붙인 포스터는 반나절이 지나면 사라진다. 세입자들은 길어질지도 모르는 싸움에 마음이 답답해진다. 세입자 모임 대표를 맡아 매일 법률 자문을 받으러 다니는 인성 씨(28·가명)는 “시험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아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 다들 가족이나 친구, 직장에 사기를 당했다고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어 답답한데 그나마 우리끼리 모일 때 마음이 좀 놓인다”고 전했다. 

 

누군가를 내 자리에 밀어 넣어야만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을까. 현지 씨는 한숨을 쉬며 “가장 힘든 건 누군가 이 지옥에 들어와야 내가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집주인은 부동산에 집을 내놨고, 다른 사람의 돈이 들어와야 내 돈을 돌려준다고 말하는데, 그 상황이 되어도 마냥 마음이 편할 것 같진 않다. 이곳을 벗어난다 해도 우린 또 집을 구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는지, 왜 아무도 우릴 책임지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김보현 기자 kbh@bizhankook.com
차형조 기자 cha6919@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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