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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잔혹한 인턴' 0.78이란 숫자가 합당한 대한민국에 고하는 드라마

7년 경력단절 겪은 워킹맘에게 던져진 잔혹한 미션…우리의 현실은 이보다 정말 나을까

2023.09.01(Fri) 09:53:19

[비즈한국] ‘잔혹한 인턴’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온다. 2023년에 회사에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쓰려는 직원들을 퇴직으로 유도하려는 내용을 담은 드라마가 버젓이 방영되는 나라라니, 너무 서글프지 않나. 더 슬픈 건 이 잔혹한 내용이 여전히 현실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다. 이걸 보면 이 나라에겐 합계출산율 0.78명이란 숫자가 합당해 보인다.

 

전설적인 MD로 날렸으나 아이를 돌봐주던 친정엄마가 아프게 되고, 아이 또한 돌봄의 시간이 늘어나는 ‘초1’이 되면서 퇴사했던 고해라. 7년 만에 재취업을 희망하지만 긴 경력단절에 40대 여성인 그를 반기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사진=티빙 제공


‘잔혹한 인턴’에서 인턴을 맡게 된 이는 7년간의 경력단절을 겪은 40대 기혼여성 고해라(라미란)다. 이전 직장에서 여러 히트 상품을 낸 ‘전설의 MD’였지만 7년간이나 쉰 40대 여성을 경력직으로 받아주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해라에게, 면접장에서 만난 이전 직장 동기였던 최지원(엄지원)이 인턴 자리를 준 뒤 은밀한 제안을 던진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앞둔 팀 내 워킹맘들을 퇴사하도록 유도하거나 해고할 수 있는 실책을 모아 달라는 것. 그 잔혹한 미션을 성공하면, 예전 커리어처럼 과장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이다.

 

아쉽고 절박한 처지의 고해라는 이 제안을 수락한다. 물론 최지원 또한 아무나에게 이런 미션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같은 직장에 다녔을 때, 고해라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직장인이었기 때문. ‘임신포기각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회사가 요구했을 때도 승진을 위해 눈 하나 깜짝 않고 사인했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아이가 화상을 당했다는 급한 소식을 듣고도 태연하게 회의를 이어나간 인물이었다. 그랬던 고해라였기에, 일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고해라였기에 최지원이 그를 인턴으로 뽑은 것.

 

과거 고해라와 같은 직장 입사 동기였던 최지원. 과거에는 워킹맘들을 배려하는 인물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성공을 위해 그들을 외면하고 앞만 보고 나간다. 출산휴가와 육아휴가를 쓰려는 워킹맘들을 퇴사로 유도하라는 부적절한 지시에 총대를 메는 것도 최지원이다. 사진=티빙 제공

 

그러나 고해라는 그때의 고해라가 아니다. 워킹맘을 핍박하는 워킹맘이었다가 7년간 경력단절을 겪고 인턴으로 입사한 고해라는 자신의 예전 모습이 투영되는 워킹맘 동료들을 더 이상 매몰찬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 출산휴가를 앞둔 이문정 대리(이채은)가 임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일을 해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에 마음이 먹먹하고, 자신처럼 ‘초1맘’이 되어 육아휴직을 결심한 금소진 과장(김혜화)을 보면 애잔한 감정이 든다. 그럴 수 있다.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사람은 또 무수히 많이 변한다. 일에 조금이라도 지장을 주는 다른 워킹맘을 대놓고 비난하는 인물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워킹맘을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다. 홍상수 영화 식으로 말하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된 것. 

 

인턴으로 입사한 고해라. 과거의 실력은 흐릿해졌고, 이제는 뭘 물어야 할지 뭘 묻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신입의 마인드가 되었다. 경단녀를 뽑기 싫어하는 기업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업무 적응도 느리고, 조직 구성원과 위화감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누구나 경력단절을 겪을 수 있고, 한 번 도태되었다고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는 결코 아니라는 것. 사진=티빙 제공

 

문제는 그 변화가 고해라에게만 적용된 게 아니라는 거다. 과거 임신포기각서라는 부당한 일 앞에 충동적으로 자살 결심까지 했던 것으로 보이는 최지원은, 지금은 워킹맘들을 퇴사로 유도하고자 하는 회사의 지시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물론 그의 속내에는 예전과 같은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1화에서 비행기 내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에게 눈살 하나 찡그리지 않고 다가가 유아용 과자를 주며 아이 엄마를 위로하는 모습이 진짜 최지원의 속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최지원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예전의 고해라가 했던 것들이다. 워킹맘들을 부정하고 핍박하는 언어와 행동을 버린 고해라는 커리어로부터 도태되었고, 그를 습득한 최지원은(물론 결혼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잔혹한 인턴’에서 남성들은 무능하거나 비열하거나 혹은 부재한다. 경단녀, 워킹맘 등 여성을 바라보는 드라마이긴 하지만, 남성 캐릭터들이 납작하다는 점은 드라마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소가 된다. 사진=티빙 제공

 

‘잔혹한 인턴’을 보며 “요즘처럼 저출생이 사회적 문제로 심각한 때에 저게 말이 되나?” 하는 반응도 있다. 아이를 낳으면 출산축하금을 주는 기업, 육아휴직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기업, 아이가 있는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보장하는 기업 등 저출생에 맞서 출산을 장려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한편에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인한 인력 손실로 회사가 손해를 입힌다는 지고한 인식이 여전히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3개월 출산휴가까지는 못 건드린다 해도, 육아휴직을 다녀오면 고과나 승진에 불이익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복직을 어렵게 하거나 아예 육아휴직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정이 이럴진대 남성 육아휴직은 언감생심의 상황. 육아휴직을 쓴 남성이 예정돼 있는 승진에서 탈락되었거나 대놓고 퇴사를 요구받았다는 뉴스가 보도되는 것도 2023년의 대한민국이다. 

 

사실 ‘잔혹한 인턴’은 캐릭터 구성과 서사가 납작한 측면이 있다. 특히 이 드라마의 남자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거나 비열하거나 생각이 없는 걸로 묘사된 부분이 그렇다. 임원 자리를 두고 최지원을 쥐락펴락하는 주 이사(김원해)는 사내정치와 골프 연습에만 오매불망이다. 그가 일과 관련해(?) 지시를 내린 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워킹맘들을 어떻게든 퇴사로 유도하라는 부적절한 지시뿐이다. 고해라의 이전 직장 후배이자 현재는 팀 내 과장인 소제섭(김인권)도 최지원의 비위를 맞추는 것 외에는 능력이라고는 1도 보이지 않는 인물. 출산을 앞둔 이문정 대리와 육아휴직을 결심했던 금소진 과장은 분명 기혼임에도 남편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전혀 화면에 비치지도 않은 점을 보라. 이들에 반해 아내와 딸아이에게 툴툴거리는 듯 다정한 고해라의 남편 공수표(이종혁)도 있지만, 딱하게도 그는 강단 있는 아내에 비해 한없이 무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문정 대리에 이어 금소진 과장의 퇴사를 유도하면 금 과장의 자리를 고해라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던 최지원. 그러나 임원 승진에 목매달고 있는 최지원의 자리 역시 주 이사의 손아귀에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반목과 부딪침은 허망해 보인다. 사진=티빙 제공

 

그 외에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MZ세대를 보여주는 박승주 주임(박경리)이나 트렌드 쫓기에만 급급한 MZ세대를 표현하는 강인욱 사원(서지후)의 캐릭터도 납작하긴 마찬가지. 이런 납작한 캐릭터와 서사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이끄는 라미란과 엄지원의 연기와 케미는 좋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던 고해라나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린 최지원의 폭넓은 변화를 담아내는 데 이 베테랑 배우들의 활약이 크다. 담아내는 이야기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지만 코미디의 외피를 둘러 부담없는 분위기로 진행되는 것도 나쁘지 않고.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잔혹한 인턴’은 티빙에서 선공개 후 tvN에서 방영 중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한다. 취임 당시 내각을 남녀 동수로 구성해 세계에 화제를 일으켰던 것에 대해 심플하게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고 답했던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 같은 파격적인 변화까지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아이 낳으라고 그렇게 부탁할 거면 어느 정도는 마음 낳고 아이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달라. 겉으로는 “애국자”라고 떠벌이면서 육아휴직 후에는 불이익 주는 표리부동이나 없애라는 소리다. 전국의 수많은 이문정 대리나 금소진 과장은 그렇게 생각할 거다. 아, 그리고 노동력이 사라지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경력단절 여성은 그렇게 외면하는 현실도 좀 재고해 보길. 7년이란 시간이 길긴 하지만, 그렇게 날렸던 전설의 MD가 경력자 채용에서 죄다 떨어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냐고요.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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