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데이] 3·1절, 위안부 직시한 '여명의 눈동자'부터 '귀향'까지

[비즈한국] “우리가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나눔의 집)

제99주년 3·1절을 맞은 2018년 ‘미투’(나도 피해자) 운동이 온 나라를 강타하고 있다. 현재도 힘의 논리로 여성 피해자들이 끊이지 않는데 전쟁 상황에서야 오죽했겠는가. 언급조차 한없이 슬프고 부담스럽지만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되새겨야 하는 역사가 있다.

일본군 위안소에서 만난 윤여옥(채시라 분)과 최대치(최재성 분). 사진=‘여명의 눈동자’ 스틸 컷

일제강점기 시절 막바지 군국주의 광란에 빠져 있던 일제가 군의 사기 진작이란 명분으로 우리의 어린 소녀들을 끌고 능멸했던 일본군 위안부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짓밟힌 소녀들은 흐르는 세월에 하나둘 타계하거나 고령의 할머니들이 되었다.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할머니 중 생존자는 3·1절 기준 서른 명에 불과하다. 가해자인 일본은 아직도 진정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면으로 다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작품은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눈길’(2015)과 ‘귀향’(2016)에 이어 ‘아이 캔 스피크’(2017)가 한국인의 뇌리에 치욕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 여명의 눈동자, 50% 넘나들던 시청률로 국민에게 위안부 문제 각인

‘여명의 눈동자’의 원작은 한국 추리소설의 대부 김성종이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담은 대하소설이다.

소설 출간 이후 영화화나 드라마화 시도가 적지 않았으나 장벽에 부딪히며 실패하기 일쑤였다. MBC는 창사 30주년 특집기획극으로 ‘여명의 눈동자’를 기획해 송지나 극본, 김종학 연출로 1991년 10월부터 1992년 2월까지 36부작으로 방송했다.

이 드라마는 아낌 없는 물량 공세에 힘입어 원작의 엄청난 스케일을 완벽하게 형상화했고 작품성과 시청률까지 동시에 거머쥐었다. 이런 연유로 ‘여명의 눈동자’는 그 전과 후로 한국 드라마를 나누는 이정표가 됐다. 주인공이었던 윤여옥 역의 채시라, 장하림 역의 박상원, 최대치 역의 최재성에게 이 드라마는 모두의 인생작으로 남았다.

원작과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이전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있었다. 하지만 ‘여명의 눈동자’ 초반부에서 다뤄진 일본군 위안부만큼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킨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너무나 적나라한 묘사로 인해 독자가 성인층으로 국한된 한계가 있었다. 반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연령층에 구애받지 않고 볼 수 있도록 큰 무리 없이 소화한 동시에 분명한 문제의식을 전달했다. 시청률이 50%를 넘나들던 이 드라마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위안부 부분은 세 주인공이 만나는 계기이자 초반부의 주요 줄거리로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윤여옥은 ‘춘향전’의 배경인 전북 남원 출신이다.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1943년 겨울 어머니의 장례 때문에 고향에 왔다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가게 된다. 실의에 빠진 채 위안소에 있던 여옥은 이곳에서 중국 베이징대학 출신의 인텔리로 조선인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된 최대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막바지, 대치가 속한 부대가 버마(현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작별 장면에서 대치가 여옥과 입 맞추기 위해 철조망에 간신히 의탁하면서 행하는 ‘철조망 키스신’은 지금도 한국 드라마 사상 최고로 꼽히는 명장면이다.

여옥은 위안소에서 만난 봉순과도 친하게 지낸다. 봉순은 위안소에서 일본군을 받을 때마다 받는 군표를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 부자로 살겠다는 꿈을 꾸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소녀다.

봉순은 최대치와 같은 조선인 학도병 출신 권동진을 사랑하게 된다. 동진은 일본군 상관인 오오에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봉순을 이를 말리려 하다가 결국 오오에에게 사살되고 만다. 소심하던 동진은 오오에를 죽이려고 하나 실패하고 할복을 명령받아 자결한다.

여옥이 속한 위안부들은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사이판에 투입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위안부 검진을 위해 온 동경제국대학(현 도쿄대학) 의대 출신의 의학도 장하림을 알게 된다.

미군의 사이판 상륙이 임박해지자 일본군은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위안부들을 사살한다. 이때 여옥은 극적으로 살아남고 장하림의 도움을 받아 포로수용소에서 무사히 최대치의 아이를 출산한다.

이후 ‘여명의 눈동자’는 해방, 해방 이후 혼란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여옥, 하림, 대치가 겪는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통해 독자와 관객들에게 가슴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원작과 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최대치에 대한 인물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했던 군사정권 시절 집필된 원작은 공산주의 편에 서있는 대치를 인간 말종의 절대악으로 그려낼 수밖에 없었다.

반면 군사정권 30년의 막바지에 제작된 드라마에서 최대치는 작가 송지나의 각색으로 원작과 상당히 다른 인물로 그려진다. 초반의 초식동물 같은 순수한 청년의 모습은 원작소설에서도 같지만, 드라마에서 대치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 편에 서게 된 것으로 표현된다.

# 눈길, 위안부 소녀들의 성장물

‘눈길’은 2015년 3·1절을 맞아 KBS가 제작해 방송한 2부작 특집극이다. ‘눈길’은 일제강점기 막바지인 1944년 밝고 씩씩하지만 가난한 최종분과 유복한 환경 속에서 신여성으로 성장하는 강영애 두 소녀가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가며 겪는 암울한 개인사를 다뤘다.

최종분(오른쪽)과 강영애가 일본군 위안소를 탈출해 힘겹게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눈길’ 스틸컷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영애가 위안부로 전락해 자포자기할 때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준 사람은 종분이었다. 종분은 여전히 맑고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종분과 영애를 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하던 위안부 아야코는 일본군이 옮긴 병으로 온몸에 반점이 돋아나 더 이상 위안부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자 살해된다.

종분과 영애가 있던 위안소 주둔 일본군 부대가 전세의 변화로 전선을 옮기게 되면서 일본군은 모든 위안부를 죽이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두 소녀는 가까스로 탈출해 고향으로 향한다. 도도하고 이기적이었던 영애는 온갖 시련을 겪으며 인격적으로 성숙해진다. 영애는 탈출할 때 일본군의 총을 맞았지만 종분이 걱정할까봐 마지막까지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았다.

종분은 홀로 살다가 어느새 할머니가 됐다. 고아로 살아가는 비행소녀 은수가 방세를 못 내 주인에게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종분은 은수를 가족으로 맞이한다.

‘눈길’은 방송 당시 종분 역의 김향기, 영애 역의 김새론의 연기와 빼어난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다. 2년 후인 2017년 3·1절을 맞아 극장판으로 개봉됐고, 기대만큼 인기몰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중화권 3대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 금계백화장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 소녀들이 일본군에게 유린당했던 어두운 과거를 중화권 사람들도 기억하고 깊이 공감했던 것이다.

# 귀향, 산고 끝에 탄생한 ‘국민 제작 영화’

‘귀향’은 1943년 15세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의 제목부터 매우 의미심장한데,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의 귀향(歸鄕)이 아니라 귀신 鬼(귀) 자를 쓴 귀향(鬼鄕)이다.

일본군이 위안부 소녀들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사살하기 직전의 모습. 사진=‘귀향’ 스틸컷

영화 중간 중간 등장하는 씻김굿(망자를 천도하는 목적의 굿)은 영화 제목을 상징하는 단어다. 영화 속에서 씻김굿은 타국에서 온갖 만행을 당한 채 무덤도 없이 죽어간 위안부 소녀들의 원통한 혼을 조국으로 불러 안식을 주는 의미로 등장한다.

‘귀향’의 감독 조정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 봉사 활동을 하다가 강일출 할머니로부터 참담한 경험담을 듣고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고 한다. 특히 강 할머니가 2001년 미술 심리 치료를 받을 때 직접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노로 피를 끓게 한다.

‘태워지는 처녀들’은 강 할머니가 위안부 소녀 시절 위안소에 역병이 돌자 일본군이 위안부 소녀들을 모아 살해하고 시신을 구덩이에 던져 불에 태운 장면을 그렸다고 한다. 강 할머니는 극적으로 구출돼 살았지만 불타는 친구들을 볼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이다.

‘귀향’에서 이 장면은 너무나 끔찍하고 처절하게 재연되어 관객들을 울린다. ‘귀향’은 2016년 3·1절을 맞아 개봉할 때까지 제작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조정래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한 것은 2002년이었으나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2015년에야 제작을 할 수 있었다.

위안부는 무겁고 암울하고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한 소재라 흥행 여부도 불투명해 선뜻 나서겠다는 투자자가 없었다. 결국 제작비 마련을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크라우드펀딩’이 진행됐다.

그 결과 국민 7만 5000여 명이 영화 전체 제작비의 절반에 달하는 12억 원을 성금으로 냈다. 원로배우 손숙은 무료로 출연했다. 일본에서 평범하게 살던 5명은 일본군 역을 맡기 위해 비행기표, 숙식까지 사비로 조달하는 등 재능기부도 잇따랐다.

개봉 당시 상영관 확보에도 제약을 받았던 ‘귀향’은 신드롬을 일으켰다. 영화를 상영하라는 시민들의 빗발치는 의견에 정치권까지 가세하면서 3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귀향’은 국민이 만들어낸 영화였다.

주인공 정민 역의 강하나는 일본 오사카 출신의 재일교포 4세임에도 영화에서 능숙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강하나가 조총련이 지원하는 오사카 중급 조선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이민 이후 교포 2, 3세만 돼도 한국어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예사다. 재일교포 4세인 강하나가 한국어를 잊지 않고 우리 영화에, 그것도 위안부를 다룬 영화에 출연한 사실은 놀라울 뿐이다. 강하나는 영화 개봉 이후 신상이 ‘털려’ 한동안 일본 우익의 협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2017년 9월에는 속편인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도 개봉됐다.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