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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광복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에 가다

아이와 함께 살펴보는 독립운동가 김구의 최후

2018.08.14(Tue) 14:18:58

[비즈한국] 8·15 광복과 관련된 문화유산이 여럿이지만, 경교장만큼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장소는 드물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머문 곳이 바로 경교장이다. 그는 여기서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온 힘을 쏟다가,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한다. 2층 집무실에선 지금도 총알 자국 선명한 유리창을 볼 수 있다. 아이와 함께 광복의 의미와 역사를 살펴보는데 이만큼 실감나는 장소도 드물 것이다. 

 

강북삼성병원 구내에 자리잡은 경교장은 원래 일제 강점기에 금광으로 큰 돈을 번 최창학의 별장이었다. 이름도 경교장이 아니라 죽첨장이었고. 그걸 해방 이후 중국에서 귀국 준비를 하던 백범 김구 선생에게 내어놓았다. 아마도 일제 말기에 거액의 군자금을 바쳐 친일파로 비난받았던 최창학에게는 속죄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경교장은 백범의 숙소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로 사용되었다. 그러니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는 충칭이 아니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셈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온 힘을 쏟다가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한다. 백범의 마지막 집무실이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바로 경교장이다. 사진=구완회 제공


# 독립운동가 김구의 삶과 죽음

 

아시다시피, 김구의 일생은 그대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다. 10대 후반에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했고, 만주에서 의병 활동을 했으며,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그 보복으로 일본인을 죽이고 옥고를 치른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광복군을 창립하는 등 그야말로 조국 해방의 한 길로 불철주야 매진한 인생이었다. 

 

해방 후 귀국한 뒤에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만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1948년에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1949년 6월. 김구는 이곳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다.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눈물을 쏟았다. 주인을 잃은 경교장은 이후 중국대사관과 월남대사관으로, 그리고 병원이 들어선 후에는 의사 휴게실로 쓰이다가 2013년에야 복원되었다. 흉탄에 간 주인의 운명만큼이나 험한 세월을 돌아서 제 모습을 찾게 된 셈이다. ​

 

경교장에서는 백범이 암살되던 당시 유리창에 생긴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강북삼성병원 안, 누구도 이런 곳이 이런 장소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그곳에 있는 경교장에 들어서면 제법 널찍한 응접실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곳에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 등 회의와 국내외 주요 인사들의 접견이 이루어졌다. 맞은편 귀빈식당은 백범이 서거했을 때 빈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현재 귀빈식당 벽에 걸려 있는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백범의 영정과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 아직도 남아 있는 그날의 흔적

 

2층에는 백범의 집무실이 있었다. 그는 평상시에 주로 여기서 일했고, 그날 이곳의 창가에 앉아 있다가 안두희에게 총을 맞았다. 총탄은 모두 네 발이었다. 첫 발은 코 아래를 뚫고 오른쪽 볼을 빠져 유리창을 뚫고 나가고, 두 번째는 목을 정면으로 뚫고 역시 유리창에 맞고, 세 번째의 탄환은 오른쪽 폐를 뚫고 복도에 박혔다. 이때 백범이 일어섰다. 그러자 마지막 총알이 왼쪽 하복부를 관통했다. 백범은 즉사했고, 안두희는 현장에서 잡혔다. 그때 두 발의 총탄이 관통한 유리창의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지하 전시실에는 당시 백범이 입었던 피 묻은 옷이 전시되어 있다. 죽음 직후의 모습을 담은 데드마스크, 당시 상황을 담은 ‘라이프’ 잡지와 함께. 그 옆에는 그 유명한 ‘나의 소원’이 담겨 있는 ‘백범일지’ 초간본과 홍커우 공원 거사 직전 윤봉길과 바꿨다는 시계, 백범이 서명한 태극기 등이 보인다. 그날 윤봉길과 시계를 바꾸고 헤어지면서 백범은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했단다. 그래서일까? 1946년 윤봉길의 유해가 효창공원에 안장되고 3년 후, 백범 또한 효창공원에 묻혔다. 

 

지하 전시실에는 암살 당시 백범이 입었던 피 묻은 옷과 데드마스크, 당시 상황을 담은 ‘라이프’ 잡지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그리고 남은 이야기 하나.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는 사건 1년 만에 군대로 복귀해 육군소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평생을 숨어 살다 1996년 백범의 원수를 갚으려는 시민의 손에 죽었다. 이로써 백범 암살의 배후는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가장 유력한 배후로 의심받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1965년 망명지 하와이에서 눈을 감은 후였다. 

 

여행정보

▲위치: 서울시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내

▲문의: 02)735-2038

▲관람 시간: 09:00~18:00(월요일 휴관)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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