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전체메뉴
HOME > Story↑Up > 엔터

[올드라마] 신데렐라 없는 21세기 자본주의의 비극 '발리에서 생긴 일'

예측을 불허하는 복잡한 사각관계…기존 문법 파괴한 파격적 결말

2019.04.09(Tue) 14:53:12

[비즈한국]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어떻게 ‘발리에서 생긴 일’ 같은 드라마가 주말 밤에 안방극장을 통해 방영될 수 있었을까? ‘발리에서 생긴 일’(발리)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재벌집 남자와 실력 있는 개천용 사이를 갈팡질팡 오가던 가난한 여자와 부잣집 여자의 사각관계로, 셋은 죽고 남은 하나 역시 불행해지는 이야기’쯤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파격적인 전개가 이어진다. 1회 오프닝부터 호텔방에서 낯선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정재민(조인성)이 허겁지겁 예물을 고르는 엄마와 약혼녀 최영주(박예진)를 만나러 가는 모습을 비춘다.

 

팍스그룹의 망나니 둘째아들 정재민과 역시 재벌 2세인 최영주는 정략결혼을 앞둔 사이인데, 영주가 가난한 옛 애인 강인욱(소지섭)을 만나러 발리에 오면서 이 격정 스토리는 시작된다. 최영주를 쫓아온 재민과 이들 셋의 가이드를 맡게 된 가난한 여자 이수정(하지원)이 엮이며 신들의 섬이자 지상 최후의 파라다이스 발리에서 네 사람의 운명은 얽혀버린다.

 

재벌 2세인 재민과 영주, 하류계급이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개천용’​이 될 수 있는 인욱, 하류계급에서 벗어날 길 막막해 보이는 수정. 마주칠 일 없어 보이는 이들이 발리에서 만난다. 이 드라마로 발리는 여행지로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SBS 홈페이지

 

재민과 약혼한 영주는 인욱을 잊지 못한다. 영주의 마음을 알게 된 재민은 발리에서의 인연을 핑계 삼아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 보려는 가난한 여자 수정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매번 수정과 만나게 되는 인욱 역시 수정에게 마음을 주게 된다. 그렇다면 수정은? 악착발랄 캔디형인 수정은 처음부터 팍스그룹 둘째아들이란 재민의 타이틀에 눈독을 들이지만 젠틀하고 능력 있는 인욱에게 먼저 마음이 흔들린다.

 

보통 드라마라면 수정과 인욱이 사랑의 결실을 맺고 성공하는 해피엔딩을 보여줄 테지만, 이 드라마는 인욱에게 흔들리던 수정이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명언을 날리고 돈을 쫓아 재민의 ‘숨겨진 여자’가 되는 모습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통상 삼각, 사각관계를 다룰 때 여주인공을 두고 다투는 남자 주인공 둘은 상이한 매력을 과시하며 팽팽하게 대립하는데, ‘발리’는 다르다. 정재민은 설정만 놓고 보면 진짜 그냥 망나니거든. 걸핏하면 신문 사회면 또는 연예면을 장식하는 재벌 2세인 그는 돈만 있지 실력은 없어서 부하직원들의 비웃음을 사는 데다 줏대도 없어 호랑이 같은 아버지 밑에서 설설 기며 사는 처지다.

 

재민과 수정의 관계는 묘하다. 인욱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현실을 감안, 재민의 돈을 쫓아 ‘숨겨진 여자’​가 되는 수정의 모습은 이수일을 버리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따른 심순애 같다. 하지만 결국, 수정은 재민에게 마음까지 주게 된다. 너무 늦었지만. 사진=SBS 홈페이지

 

이수정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후에 보이는 행태도 그야말로 ‘초딩’ 수준. 수정에게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보이지만 그 사랑을 지킬 줄은 모른다. “결혼 빼고 다 해줄게”라며 고급 오피스텔과 돈을 퍼붓지만 아버지가 휘두르는 골프채와 위협에 결국 수정을 떠나고도 찌질찌질 그녀 곁을 맴돈다. 최영주의 옛 남자이자 이수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부하직원 강인욱에게 보이는 질투는 또 어떻고. 심지어 허구한 날 아버지와 인욱, 때로는 조폭에게 얻어터지기까지 한다. 

 

재미난 건 이토록 매력 없어 보이는 정재민이 드라마 진주인공 포지션인 강인욱보다 큰 인기를 얻었다는 것. 강인욱은 밥집 운영하는 다소 천박한 홀어머니가 있는 가난한 남자라는 사실만 빼면 외모, 지성, 능력, 심지어 여자를 사로잡는 매너까지 우월해서 재벌 2세인 정재민이 강인욱에게 자격지심을 느낄 정도인데 말이지. 인욱과 달리 여리고 소심하고 유치한데 미워할 수 없는, 없던 모성애도 쥐어짜게 만드는 힘이 정재민이라는 캐릭터에게 있었다.

 

인욱은 수정에게 있어 어떤 의미에선 재민보다 더 먼 존재다. 결혼 빼고 모든 걸 줄 수 있는 재민의 돈은 현실적이지만, ‘개천용’​이 될 수 있는 인욱의 아내가 된다는 건 현실적으로 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수정은 재민과 인욱 사이를 계속 갈팡질팡 오간다. 사진=SBS 홈페이지

 

물론 정재민을 연기한 것이 조인성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인성의 우월한 기럭지는 ‘정장에 스니커즈 신고 백팩 매기’ ‘화려한 패턴의 셔츠와 털코트’ 같은 난해한 패션을 소화하며 갖가지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청순뽀짝’한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눈물 흘리고, 오열이 터져 나오는 입을 주먹으로 틀어막는 전화신을 더욱 폭발적으로 만들었다. 오열 전화신은 이후 10년이 넘도록 주구장창 패러디되며 사랑받은 장면이기도 하다. 

 

파격적인 전개에서 눈치챘어야 했지만 ‘발리’는 예상보다 더 충격적인 엔딩으로 시청자의 입을 벌리게 했다. 거액을 빼돌린 인욱이 수정과 함께 발리로 도망치자 질투의 광기에 사로잡힌 재민이 쫓아와 침대에 누워있던 둘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 또한 자살하는 엔딩은, 그 어떤 드라마도 넘보지 못한 파격 그 자체다. 인욱과 동침한 침대에서 죽어가는 수정이 재민에게 “사랑해요”라고 남기는 고백도 놀랍긴 마찬가지.

 

드라마 내내 누군가에게 얻어터지며 모성애를 자극하는 정재민. 조인성이 연기한 재민은 걸핏하면 눈물 흘리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신기하게도 그 약함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점. 특히 오열 전화신은 조인성 연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사진=드라마 캡처

 

‘발리’의 결말이 충격이었던 건 천민자본주의사회에서 굳건히 뿌리내린 계급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적나라한 현실을 죽음으로 표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욱이 인용한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처럼, 계급은 중세시대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지배자의 헤게모니에서 눈과 귀를 눈가림당하지 않아야 한다던 인욱은 헤게모니에 저항하길 포기하고 도망쳤고, 수정은 재민에게 몸은 물론 마음까지 주었으며, 계급으로 사랑을 ‘소유’하려다 실패한 재민은 두 사람의 목숨을 앗고 자신마저 죽는 길을 택한다.

 

여느 드라마들은 신데렐라 이야기로 잘만 해피엔딩을 맞던데, 이 드라마만 왜 그러냐고? 수정의 친구 미희(신이)가 이야기하지 않았나. 신데렐라도 계모를 잘못 만나 고생했을 뿐 실은 왕자님의 파티 초대장 정도는 받을 수 있는 귀족 출신이라고. 그러니 무수히 많이 그려지는 부잣집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사랑이야기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발리’는 파멸의 엔딩으로 말하는 것이다.

 

엔딩에서 재민에게 죽기 직전 인욱과 수정의 동침 모습. ‘발리에서 생긴 일’의 엔딩은 ‘파리의 연인’​ ‘지붕 뚫고 하이킥’​과 더불어 가장 충격적인 엔딩으로 손꼽히곤 한다. 사진=드라마 캡처

 

2017년 말, ‘발리’가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큰 관심과 함께 ‘그 배우들의 그 감성을 해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동시에 표했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구체적인 제작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나는 누가 조인성, 하지원, 소지섭을 대신할지도 궁금하지만 어떤 톤의 결말로 그릴지도 무척 궁금하다. 

 

훗날 하지원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약간의 이익을 잃는 대신 재벌 2세와의 사랑을 쟁취하는 판타지 결말을 얻었는데, 리메이크 되는 ‘발리’의 이수정도 그런 판타지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현실은 핏빛 죽음뿐일까.

 

수정의 친구인 미희는 “벗으라면 벗겠어요”​라는, 에로영화 연기 대사로 인기를 끌었는데, 극중 가장 코믹한 포지션이면서도 가장 현실을 잘 아는 인물로 나와 눈길을 끌었다. 사진=SBS 홈페이지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핫클릭]

· [올드라마] 그 시절, 우린 '호텔리어'를 꿈꿨다
· [올드라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을 꿈꾸는 '연애시대'
· [올드라마] 내 안의 흑염룡이 날뛰던 '학교'
· [올드라마] 각자도생 현대인에게 건네는 초코파이 '고맙습니다'
· [올드라마] 삼일절, 볼 때마다 아픈 '여명의 눈동자'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