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전 세계가 K팝의 성취에 열광하고 있지만, 이 거대한 산업을 지탱하는 가장 큰 동력인 팬들이 마주치는 현실은 그리 눈부시지 않다. K팝 산업은 팬덤 경제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팬들의 구매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나 정작 소비자인 팬들의 기본적인 권리는 애정이라는 명분 아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K팝의 글로벌 위상에 걸맞지 않은 공연 산업의 관행과 문제점을 이용자 권익 관점에서 짚어본다.
음료 10잔을 사면 콘서트 티켓 응모권 1회가 부여된다. 가장 많이 응모한 상위 150명에게는 VVIP석 티켓이 제공되는 ‘응모왕 이벤트’도 별도 운영된다. 미션 메뉴 3개·일반 메뉴 7개 구매 달성으로 프리퀀시 한 판이 완성될 때마다 당첨 기회가 높아지는 방식이다. 더 많이 마시고 더 자주 응모할수록 당첨 확률이 올라간다.
메가MGC커피는 오는 30일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개최하는 ‘2026 메가콘서트’ 응모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콘서트에는 자사 모델 엔시티 위시를 포함해 엑소, 르세라핌, 제로베이스원, 트리플S, 미야오, 하츠투하츠, 알파드라이브원 등 인기 K팝 그룹이 참여한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라인업에 올라 있는 K팝 팬이라면 이미 메가커피 앱을 열어 자신의 응모 횟수를 확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3월에 개시한 이 이벤트는 3차 응모까지 마치고 4차 마지막 응모가 진행되고 있다. 공개된 지난 이벤트 결과에 따르면 1차 응모왕 컷은 87장으로 각 항목의 최저 단가를 적용해 계산하면 컷 달성에 소요되는 금액은 약 200만 원(87장×2만 3000원)에 달한다. 114장을 기록한 1위 응모자의 경우 최소 262만 원을 쓴 셈이다. 10분 단위로 자동 갱신되는 랭킹 현황은 앱에서 확인할 수 있다. 4회차 마감을 3일 앞둔 22일 오후 4시 기준 컷은 70장으로 집계됐다.
#K팝 협업 공식이 된 ‘응모권 마케팅’
이 같은 이벤트는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최근 K팝 산업과 협업하는 브랜드들 사이에서는 팬사인회, 자체 행사 등을 구매 조건과 연동하는 이른바 ‘응모권 마케팅’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과거 음반 판매 중심으로 작동하던 팬덤 대상 줄세우기 구조가 이제는 식음료·화장품·패션 등 일반 소비재 시장 전반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화장품 브랜드 유이크의 라이즈 팬사인회나 데이식스 원필을 기용한 애프터 블로우 이벤트처럼 구매 채널과 무관하게 1인 1회 응모로 제한하는 사례도 있지만 실제 아이돌을 모델로 기용한 브랜드 상당수는 구매량이 곧 응모권 수로 연결되는 방식의 행사를 운영한다.
화장품 브랜드 리엔케이는 지난달 더보이즈 멤버 주연의 팬사인회를 열고 특정 기획 패키지 구매 인증 시 응모 기회를 제공했다. 닥터지도 지난해 진행한 보이넥스트도어 대면 팬사인회에서 3만 원 이상 구매 시 응모권 1회를 지급하고 중복 참여를 허용했다. 여러 번 구매할수록 당첨 확률이 올라가는 구조다.
과거 기업들이 톱스타를 광고에 기용한 것은 대중적 인지도를 활용한 이미지 제고가 목적이었다. 지금의 ‘아이돌 마케팅’은 작동 방식이 다르다. 이 같은 구조가 가능한 배경에는 K팝 산업 특유의 팬덤 경제가 자리 잡고 있다. 확실한 구매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아이돌 팬덤만 한 것이 없다는 평가다.
의류 브랜드 관계자는 “대세 아이돌을 기용해 브랜드에 트렌디한 이미지를 이식하는 효과도 크다”면서도 “이미지 제고를 넘어, 아티스트를 직접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팬들이 참여하는 매출 견인 효과도 무시하기 어렵다”고 했다.
#구매량 순으로 팬덤 ‘줄세우기’
팬덤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30대 정 아무개 씨는 “큰 돈은 쓰지 않지만 참여 횟수 제한이 있는 브랜드 행사는 일단 기준에 맞춰 화장품이나 옷을 구매하고 신청해본다. 이게 정상적인 소비 구조가 맞나 하는 생각도 든다. 팬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전략은 엔터사·유통사에게는 낯설지 않은 수익 극대화의 수단이다. K팝 산업에서 팬사인회는 원래부터 팬덤의 대량 구매를 유도하는 대표적인 마케팅 수단이었다. 팬들이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실물 앨범을 여러 장 구매하면서 음반 판매량이 상승하는 구조다. 최근에는 이 같은 방식이 브랜드 협업 행사로까지 확장되며 팬덤 소비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16일 음반유통사 엠투유레코드가 주최한 코르티스 앨범 발매 기념 팬사인회가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열렸다. 행사 이틀 전부터 건물 출입구 인근 바닥에 자리를 맡아두는 팬들이 나타날 만큼 현장 열기는 과열됐다. 팬사인회 참여 50인 선발 기준은 엠투유레코드 온라인몰에서 5월 1일부터 5일간 구매한 앨범 수량이었다. 구매량 상위자 순으로 당첨자를 가리는 줄세우기 방식이다.
올리브영 등 대형 유통 플랫폼까지 음반유통에 뛰어들면서 저마다의 ‘독점 특전’과 ‘전용 팬사인회’를 내걸고 앨범을 판매하는 채널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올리브영은 지난 1월 알파드라이브원 앨범 판매 이벤트를 진행하며 팬사인회 응모권과 랜덤 포토카드 특전을 함께 제공했다. 지정된 4일 간 올리브영 채널을 통해 앨범을 구매한 소비자 구매액 순서대로 응모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엔터사 입장에서도 팬덤 기반 이벤트는 핵심 수익 모델이다. 팬사인회 등의 대면 행사는 음반 판매와 플랫폼 이용률 확대를 동시에 견인하고 있다. 브랜드 협업 역시 엔터사에는 광고 수익을 넘어 라이선스 수익으로 연결된다.
문제는 이런 구조 속에서 소비자 권리 보호 장치는 상대적으로 미흡하다는 점이다. 상당수 이벤트는 응모 이후 환불이 제한된다. 인기 아이돌의 경우 당첨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수십~수백만 원을 쓰는 사례도 적지 않지만, 탈락 시 비용은 그대로 소비자 부담으로 남는다. 구매 금액에 대한 반품이나 청약 철회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가 관행처럼 굳어져 있어서다.
응모 횟수 상한이 없는 경우에는 사실상 ‘많이 사는 사람이 유리한 구조’가 고착화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K팝 산업 특성상 아티스트 건강 문제나 일정 변경은 빈번하지만, 행사 내용 변경에 대한 보호 장치도 부족하다. 일부 멤버 불참이 행사 직전에 공지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소비자원의 팬덤 마케팅 소비자문제 실태조사에서도 당첨되지 못한 응모 음반에 대한 환불 거부 사례가 다수 접수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입장에서는 확실한 마케팅 성과를 낼 수 있는 방식이지만 소비자 권리 측면에서의 가이드라인은 여전히 부재하다. 현행 전자상거래법은 통신판매 계약의 청약 철회 기준을 명시하고 있으나, 응모권과 결합된 상품 구매의 경우 해석에 따라 적용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4년 특정 기획사 쇼핑몰이 청약 철회가 가능한 상황임에도 이를 일률적으로 불가하다고 고지한 행위에 대해 시정을 명령한 바 있다. 국내 대형 엔터사 관계자는 “현재의 팬사인회 응모 방식은 너무 오래, 너무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관행이라 어느 한 주체가 먼저 바꾸기 어려운 구조”라고 했다.
K팝 산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할수록 팬덤 소비 구조에 대한 점검도 필요한 시점이다. 글로벌 K팝 시장 규모는 연간 약 12조 7000억 원(92억 달러) 규모로 추산된다. 팬들의 지출이 그 성장의 실질적 토대가 되는 만큼, 소비자로서의 권리 역시 산업의 성장에 걸맞은 수준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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