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 스타트업 신에서 ‘방산(Defence Tech)’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 꺼려지는 분야였다. ESG 중심의 투자 기준, 평화적 기술 선호, 군사 산업에 대한 역사적 거부감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판도가 급변했다. 실제로 2024년 유럽의 방산기술에 대한 투자가 10년 만에 역대 최대 규모를 달성하면서 관심이 뜨거운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선의 장기화되며 나토가 재정비 국면에 들어섰고, 불과 며칠 전까지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공습·상호 미사일 공격이 수차례 발생하면서 전 세계 방산 시장도 지속적으로 들썩이는 중이다. 미국이 이란의 지하 미사일 기지와 방공 시설을 공습하자 테러 관련 드론과 첩보 병기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런 추세 속에서 유럽도 지난 3월 4일 EU 차원의 Readiness 2030 계획을 발표하며 8000억 유로(1260조 원) 규모의 방산 강화 예산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물론 투자자들까지 ‘국방 기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스타트업 전문 매체인 시프티드(Sifted)에 따르면 2024년 한 해에만 유럽 내 방산 스타트업에 대한 민간 투자는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했으며, VC 펀드 중 일부는 민군 겸용(dual-use) 또는 자립형 기술s(overeign tech) 전용 트랙을 신설했다.

이런 가운데 방산 스타트업이 ‘조용히’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VC도 있다. 주인공은 베를린 비저너리스 클럽(Visionaries Club)의 공동설립자 롭 라허다. 비저너리스 클럽은 유럽의 디지털 창업자들과 패밀리 비즈니스 기업가들로 구성된 커뮤니티가 후원하는 벤처캐피털 펀드로, B2B 및 딥테크 분야를 중심으로 초기 단계 스타트업에 투자해왔다. 포트폴리오에는 피그먼트(Pigment), 페르조니오(Personio),미로(Miro), 베이(Vay) 등 유럽의 유망 스타트업들이 포함돼 있다.
이 펀드의 공동 설립자인 롭 라허(Rob Lacher)는 유럽 초기 투자 생태계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인물로, 앞서 라 파미글리아(La Famiglia) VC의 공동 창업자이자 파트너로 9년 넘게 활동해 왔다. 라 파미글리아는 시드 및 초기 단계 투자에 특화된 VC로, 롭 라허는 펀드의 초기 비전을 주도하며 첫 펀드를 관리해왔다. 그가 이끌거나 참여한 주요 투자처로는 딜(Deel), 포르토(Forto) 등 B2B SaaS부터 물류, AI, 헬스케어, 국방 기술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른다.
라허는 최근 시프티드 팟캐스트에서 “방산 스타트업은 생명이 걸린 산업을 다루는 만큼, 스텔스 모드(stealth mode)에서 조용히, 책임 있게 성장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방산 VC로서의 철학을 드러냈다. 그는 “실제로 전장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기술일수록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도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방산 분야에 비추어진 조명이 너무 밝아 이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존재한다.
#기업가치 12조 원으로 급성장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헬싱(Helsing)이다. 독일 뮌헨에 본사를 둔 방산 AI 스타트업 헬싱은 최근 다니엘 에크(Daniel Ek, 스포티파이 창업자)의 투자사인 프리마 마테리아(Prima Materia) 주도로 6억 유로(8700억 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를 120억 유로(17조 원)로 끌어올렸다.
투자금 규모뿐 아니라 그 성장 속도도 경이롭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헬싱은 AI 기반 전장 소프트웨어를 주력으로 하는 기업 가치 50억 유로의 기업이었다. 하지만 하드웨어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가치가 두 배 이상 상승했고, 이제는 유럽 전체에서 손꼽히는 하이테크 스타트업 반열에 올랐다.

투자자들은 헬싱을 미국의 팔란티어(Palantir), 안두릴(Anduril)과 비교하며 ‘유럽 방산 스타트업의 최전선’이라 평가한다. 팔란티어(Palantir)는 2003년 미국에서 설립된 빅데이터 분석 및 인텔리전스 소프트웨어 업체로 자체 플랫폼을 통해 미국 국방부 및 정보기관의 전장 데이터 통합·분석을 지원하고 있다. 2025년 기준, 이미 미국 국방부와 연간 13억 달러(1조 7000억 원) 이상의 계약을 체결했고, 최근 중동 긴장 고조 속에서도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안두릴(Anduril Industries)은 2017년 오큘러스(Oculus) 창업자 팔머 럭키(Palmer Luckey) 등이 설립한 자율 시스템 기반의 방산 테크 스타트업이다. Lattice AI 운영체제, 무인 감시탑, 드론, 해양·지상·공중 자율 플랫폼 등을 개발하며, 미국·영국 등에서 국경 보안 및 군 도입 계약을 따내고 있다. 2025년 6월 기준 기업가치는 약 305억 달러(41조 원)에 달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전략경쟁이 겹치며 급성장하고 있다.
방산 테크는 결국 성과가 증명된 시스템과 대규모 계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팔란티어와 안두릴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헬싱은 기대가 큰 만큼 미국의 방산 기업과 비교대상이 되어 훨씬 더 큰 무대와 검증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다.
#IPO 가능할까 ‘엑시트 딜레마’
헬싱의 17조 원 가치는 달리 보면 ‘탈출구(Exit)’가 사실상 IPO뿐이라는 의미다. 이미 유럽 방산 대기업의 시가총액은 헬싱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스웨덴의 대기업이자 헬싱 투자사인 사브(Saab)은 약 280억 달러, 프랑스 탈레스(Thales)는 510억 유로, 영국 BAE 시스템즈는 570억 파운드 수준이다. 업계에서 “이젠 방산 프라임들이 헬싱을 인수할 여력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IPO는 가능할까? 헬싱의 공동 CEO 토르스텐 라일(Torsten Reil)도 “성장과 실행에 집중하며, 엑시트 논의는 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미국 상장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린다. 유럽은 고성장 테크 기업에게 여전히 규제·자금 유치 측면에서 불리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 각국의 안보 규정이 다르고, 그에 따른 수출 통제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규제 벽이 굳건하다.
VC들 사이에서는 팔란티어나 안두릴과 같은 미국 모델은 미 국방부라는 ‘거대 고객’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냉정한 평가도 나온다. 유럽의 방산 시장은 규모가 작고 조달 과정도 복잡하다. 따라서 헬싱이 현재의 기업 가치를 실제 매출·수익으로 연결 지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한국도 최근 방산 및 이차전지, 원자력, 우주항공 등 ‘전략 기술’ 중심의 민간투자 흐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헬싱 사례는 단순히 투자금 유치만으로는 글로벌 방산 테크 기업으로 도약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어디서 자라고, 누구와 일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에 대해 지금부터 전략적 접근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한 기술’을 믿고 키울 수 있는 생태계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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