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유럽의 스타트업 투자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이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리스트가 지난주 공개됐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을 대표하는 테크 미디어 테크크런치(TechCrunch)는 지난 2일 주목할 유럽 스타트업 21개를 소개했다. 선정 방법은 간단했다. 유럽 주요 벤처캐피털(VC)로부터 두 곳씩을 추천받았다. VC의 포트폴리오에서 한 곳과 아쉽게도 투자하지 못한 한 곳이다. 여기에 기자들이 자체 선정한 몇 곳을 더했다.
기사 제목이 흥미롭다. ‘러버블(Lovable)과 미스트랄(Mistral)을 넘어서’다.
러버블은 AI 코딩 툴로 연간반복매출(ARR) 1억 달러(약 1450억 원)를 찍은 스웨덴 스타트업이고, 미스트랄은 유럽의 오픈AI로 불리는 프랑스 AI 기업이다. 방산기업 헬싱(Helsing) 등 이미 유니콘 반열에 올라선 스타트업들도 명단에서 빠졌다. 이렇게 잘 알려진 이름 말고, 다음 유럽 스타트업은 어디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번에 공개된 리스트다.
리스트에 오른 스타트업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됐다.
#방산테크: 기피에서 필수 포트폴리오로
우선 ‘유럽스타트업열전’에서 몇 차례 다뤘던 방산 분야 스타트업이 2개다.
알타 아레스(Alta Ares)는 AI 기반 대드론 요격 시스템을 만드는 프랑스 스타트업이다. 드론 위협을 탐지하고 무력화하는 요격기를 개발하는데, 기존 방공망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카이랩스(Cailabs)는 빛(레이저)을 이용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기술을 항공우주·방산에 적용한다. 레이저를 이용한 위성 통신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광학 지상국 50개를 구축해 위성과 지상 간 고속 데이터 전송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불과 3~4년 전 유럽 주요 VC들은 방산 스타트업 투자를 거부했다. ESG 기준과 함께 “우리는 킬러 로봇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윤리 투자 원칙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각국은 국방비를 급격히 늘렸고, VC들 역시 헬싱, 스타크 디펜스(Stark Defence), 퀀텀 시스템스(Quantum Systems) 등의 방산 스타트업을 포트폴리오에 적극 채우고 있다.
#AI 인프라: 모델 위의 모델
리스트 21개 중 절반가량은 AI 스타트업이다. 다만 대부분 자체 모델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AI 모델 개발은 천문학적인 자원이 들기 때문에 스타트업이 오픈AI, 구글, 메타와 같은 미국 빅테크나 중국 기업들과 정면 경쟁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유럽 AI 스타트업들은 틈새를 파고든다. 이미 존재하는 모델을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안전하게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체코의 보틀캡(BottleCap) AI는 기존 오픈소스 모델을 경량화하고 그 위에 앱을 얹는 전략을 쓴다. AI 뉴스 앱 ‘펄스(Pulse)’가 대표 서비스다.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이 게임 회사를 메타에 매각한 경험이 있어 VC들의 주목을 받는 팀이다.
스페인의 멀티버스 컴퓨팅(Multiverse Computing)은 오픈AI, 딥시트, 미스트랄 같은 오픈소스 모델을 압축해 기업 자체 하드웨어에서 저비용으로 구동하게 만든다. 대형 모델을 쓰고 싶지만 클라우드 비용과 데이터 보안이 걱정인 기업들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누적 투자액이 2억 5000만 달러(약 3600억 원)에 이른다.
최근 가장 핫한 스타트업인 펀더멘털(Fundamental)도 포함됐다. 공개된 정보가 별로 없었던 기업 빅데이터 분석 AI 스타트업인데, 시리즈 A에서 2억 5500만 달러(약 3700억 원), 기업가치 14억 달러(약 2조 원)를 찍으며 단번에 유니콘에 등극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이지만 런던에 기반을 둔 구글 딥마인드 출신 연구자들이 창업했다는 이유로 유럽 스타트업으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보티파이(Botify)는 AI 검색 최적화, 이른바 GEO(Generative Engine Optimization) 플랫폼이다. 지난 20년간 디지털 마케팅의 핵심은 SEO(검색엔진 최적화)였다. 구글에서 특정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내 웹사이트가 상위에 뜨게 만드는 기술이다. GEO는 그 다음 버전으로 AI 답변에 내 브랜드가 포함되게 만드는 기술이다. 사람들이 구글 대신 AI로 정보를 찾기 시작하면서 기업들은 마케팅 예산을 AI 검색 대응으로 옮기고 있다. 보티파이는 2012년 SEO 회사로 창업해 이 변화를 일찍 읽고 GEO로 전환했다. 고객사로는 미국 최대 백화점 체인 메이시스(Macy’s)와 뉴욕타임스가 있다.
#하드테크·우주: 유럽의 진짜 강점
리스트에서 가장 유럽다운 영역이다.
유럽은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에 강하다. 독일의 정밀 기계, 프랑스의 항공우주, 북유럽의 청정에너지 기술과 같은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공학 인프라가 있다. 이 기반 위에서 나오는 딥테크 스타트업들은 미국 스타트업이 쉽게 복제하기 어렵다.
PLD 스페이스(Space)는 스페인 최초의 민간 로켓 기업이다. 2023년 유럽 최초로 완전 민간 로켓 발사에 성공했고, 현재 소형 위성을 저궤도에 올릴 수 있는 재사용 발사체 미우라(Miura) 5를 개발 중이다. 지난 3월 미쓰비시전기가 주도한 시리즈 C에서 2억 900만 달러(약 3000억 원)를 모아 누적 투자액이 3억 5000만 달러(약 5000억 원)를 넘겼다. 미쓰비시전기가 리드 투자자로 나선 건 자체 발사체 기술이 없는 일본이 전략적 베팅을 한 것으로 읽힌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 “스페이스X에 발사를 의존하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퍼지면서 PLD의 전략적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스페이스 포지(Space Forge)는 우주 공간에서 반도체 소재를 직접 제조하는 영국 스타트업이다. 지구 궤도의 미세중력과 진공 환경을 이용해 지상에서 만들기 어려운 고순도 반도체 기판을 만든다. 최근 저궤도에서 플라즈마 생성에 성공하며 핵심 기술을 검증했다. 칩 제조의 핵심 소재를 우주에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파격적이지만, 특정 지역에 집중된 반도체 공급망을 다각화하려는 지정학적 수요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테커(Theker)는 자라 모기업 인디텍스가 전략적으로 투자한 스페인 로보틱스 스타트업이다. 물류, 식음료, 폐기물 관리 등 다양한 산업 현장에 로봇을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는 게 목표다. 인디텍스가 자사 물류 자동화를 위해 직접 스타트업에 베팅한 구조라는 점이 흥미롭다.
프록시마 퓨전(Proxima Fusion)은 독일 뮌헨 기반 핵융합 스타트업이다. 막스플랑크 플라즈마물리연구소(IPP) 최초의 상업적 스핀오프로, 바이에른 주정부, 독일 최대 에너지 기업 RWE, IPP와 협약을 맺고 폐원전 부지에 세계 최초 상업용 핵융합 발전소 건설을 추진 중이다. RWE는 석탄·원전을 운영하다 재생에너지로 전환했는데, 수십 년의 발전소 건설·운영 경험을 이 프로젝트에 쏟는다. 총 프로젝트 예산은 약 20억 유로(약 3조 4200억 원)에 달한다.
하드테크는 소프트웨어보다 느리고 비싸다. 대신 한번 자리를 잡으면 복제하기 어렵다. 방산 자립, 반도체 공급망 다각화와 같은 현재 유럽이 처한 현실은 하드테크 스타트업에게 역대 최고의 시장 환경이다.
필자 이정우는 17년간 언론사 기자로 자동차, 2차전지, 중공업 등 주요 산업을 비롯해 국방, 외교, 환경, 교육, 보건복지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담당했다. 특히 모빌리티 및 에너지 전환과 지속가능성 중심의 산업 구조 변화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123팩토리'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정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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