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얼마 전 라운드를 나간 아들에게 톡이 왔다. 평소 톡을 자주 주고받지 않는 사이라 무슨 일인가 했는데, 81개의 타수로 라베를 했다는 것이었다. 자랑스럽게 스코어카드도 보내 왔다. 그 스코어카드를 보며 한참 전 일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첫 70대 타수를 기록하고 그 소식을 아버지께 제일 먼저 전화를 드렸었다. 나는 아버지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다. 어느 날 골프클럽 풀세트를 집으로 보내셨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에 가까웠던, 그래서 골프는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게 “골프는 하루라도 먼저 시작하는 게 좋다”고 하셨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들과 라운드를 하는 것이 당신의 ‘로망’이셨다. 물론 그 로망은 이루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당신은 손자와 함께 3대가 나란히 필드를 밟는 것이 로망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로망은 이루지 못하셨다. 몇 달만 더 사셨다면 가능했을 텐데, 그 약속 전에 아들과 아들의 아들을 남겨 두고 돌아가셨다.

‘로망’이란 소망이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다. 로망이란 말 안에는 지극히 ‘이상적’이고 ‘원대함’이란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해서 가끔은 이루기 힘든 거대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골프를 시작하면 누구나 골퍼로서 로망이 생긴다. 우리는 가슴 속에 ‘골프 로망’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혹은 선별하면서 오늘도 나의 볼을 향해, 그린을 향해, 홀을 향해 걷는다.
골프 로망,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골퍼로서 ‘…만 할 수 있다면 난 정말 행복할 텐데’가 어떤 것이 있을까? 첫 번째는 스코어가 아닐까? 골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골퍼에겐 100타를 깨는 ‘깨백’이 로망일 것이고, 어떤 골퍼는 ‘보기 플레이어’가 골프 로망일 것이다. 모든 골퍼들의 로망은 ‘싱글 디짓 핸디캡(single digit handicap) 골퍼’가 되는 것이며, 이에 도달하고 나면 마음속에 ‘72타’라는 로망이 자리 잡고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남보다 골프에 소질이 보인다고 느껴지면, 혹은 골프에 어떤 목표를 쥐어 주고 싶다면 ‘프로 테스트’ 통과가 로망일 수도 있다. 수십 번의 실패 끝에 결국 프로가 되는 로망을 이루는 골퍼의 도전 스토리를 우리는 접하게 된다.
같이 라운드를 하고 싶은 ‘동반자’가 로망일 수도 있다. 부부가, 부자나 모자가, 장인 장모나 사위와 가족 4명이 같이 라운드를 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흐뭇하고 오래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드는 로망이지 않을까? 그렇다. 명품 코스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라운드는 명품 라운드일 수밖에 없다.
평소 열렬히 응원하는 골프 선수와의 라운드도 로망 중에 로망이다. 박성현 선수의 열혈 팬이자 팬클럽 회원이 박성현 선수와 라운드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조금은 덕후스러울 수 있겠지만, 내가 응원하는 골프 선수의 골프백을 매고 캐디를 해보는 것이 로망일 수도 있다.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타이거 우즈의 캐디라니… 타이거와 코스 공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설렌다.
어떤 골퍼는 골프의 본향인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코스에서 라운드를 하는 것이 로망일 것이다. 몇 백 년 된 클럽하우스에서 역시 몇 백 년 된 코스를 내려다보며 스코틀랜드 위스키 한 잔을 마시는 것,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고 골프스럽다. 해외에서 골프로 한 달 살기가 로망인 골퍼도 있다. 대한민국의 날씨와 정반대인 곳에서 오직 골프만을 위한 여행을 꿈꿔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오디오 기기에 심하게 빠져 결국 앰프를 만든 친구가 있다. 골프에 빠져 골프클럽을 만들고 골프용품을 만들고 골프 옷을 만드는 것이 로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비즈니스로 확장되든 그렇지 않든, 좋아하는 것에 빠져 본인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것, 참으로 멋진 일이다.
인간으로서 나이가 드는 것은 골퍼로서도 나이가 든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골프를 할 때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시니어 골퍼가 될수록 골퍼의 가슴속엔 ‘에이지 슛’이란 로망이 자란다. 에이지 슛이란 본인의 나이와 같은 타수를 기록하는 것이다. 77세에 77타를 친다면, 88세에 88타를 친다면 인생의 몇 가지 조건이 제공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골퍼의 최후의 업적이 되지 않을까?
거창한 로망이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골프를 오래도록 칠 수 있으면 좋겠다’가 로망일 수도 있다. 건강해야 가능하고, 어느 정도 재력이 있어야 가능하고, 함께할 동반자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골퍼들은 마음속에 본인의 라베 스코어카드처럼 ‘로망 카드’가 있다. 그 로망을 이룰 때까지 우리는 필드 위를 걷고 또 걷는다. 당신에겐 어떤 ‘골프 로망’이 있는가. 그 로망 앞에 몇 번 홀까지 와 있는가.
강찬욱 작가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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