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자기한테 주어진, 자기 앞에 펼쳐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가는 거,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장애물이 닥쳐도, 원망 같은 거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런 게 쌓여 인생이 된다.”
판에 박힌 뻔한 인생론 아니냐고? 누가 이렇게 말했는지를 알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이 인생론의 주인공은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사형수 우창선 씨의 아내 강순희 씨다. 강 씨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사건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네 자녀를 키워냈다.
인혁당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박정희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대학생 조직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적발해 구속하면서 그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라는 조직이 있다고 조작해 8명을 사형시킨 사건이다. 이들은 국가보안법과 내란 선동 등의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열 달 만에 대법원에서 8명의 사형이 확정됐고, 바로 다음날 새벽 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는 그날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30년이 지난 2007년 재심에서 법원은 사형수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최근 나온 책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에는 강순희 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담겼다. 이 책은 자기 앞에 펼쳐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온 강 씨의 이야기를 유시민 작가가 듣고 정리했다.
‘인혁당 사형수의 아내’. 강순희를 설명하는 말로는 이것이 대표적이겠지만 그 사건으로만 그의 삶이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강순희는 1933년 북한에서 태어나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세 살 때 중국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북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니다 6·25가 터지자 월남해 대전, 부산 등지에서 살았다. 부산에서 한국은행을 다니다 우창선을 만났고, 결혼 후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하며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넉넉한 집안에서 장녀로 태어나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자랐다. 그 덕분인지 어떤 상황에서든 부당한 대우를 참거나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왔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남편이 경찰과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도, 자신이 중정에 끌려갔을 때도 할 말은 했다. 연애를 할 때도 재지 않고 감정에 충실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늘 존중했다.
남편이 억울하게 잡혀간 뒤에는 구명활동에 적극 나섰다. 옥바라지를 할 때는 늘 양장을 갖춰 입고 선글라스를 꼈다. “못살아서 이북에서 왔다느니, 빨갱이라느니 어쩌지 하면서 얕잡아 보니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당당하게 하려고” 그랬다. 직장을 다시 구하고 곗돈을 부어가며 아이 넷을 키우고 남편 영치금을 넣었다. 매일 형사들이 따라다니는 와중에도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나고 YWCA, 국제앰네스티 집회 같은 곳에 나가 인혁당 사형수들의 억울한 사정을 알렸다. 나중에는 야당과 종교계 지도자는 물론 박정희, 육영수에게까지 눈물로 쓴 탄원서를 보냈다. 사건의 공판 기록이 조작됐다는 사실도 그가 알렸다.
그러나 남편 우창선은 결국 사형대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꺾이지 않던 강순희도 남편의 죽음 후엔 몇 달 동안 드러누웠다. 다시 일어선 것은 아이들 때문이다. 아픈 몸을 추스른 뒤 로열젤리를 팔고, 의상실을 다시 열고, 50대에는 성심여대 장학법인에서 책임자로 일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아흔세 해. 강순희의 삶에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랑이 있으면 살아진다, 열심히 살아라’라고 말한다.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로는 남편과 처음 데이트하던 날을 꼽는다. “사는 동안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해요”라는 그는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라고 회고한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는 당당하게 살아간 한 여인의 인생 이야기이자 한국 현대사의 귀중한 기록이다.
김남희 기자
namhee@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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