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서울 도심 곳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1000세대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에 전세 물건이 단 한 건도 없다. 월세도 마찬가지다. 예전 같으면 수십 건씩 올라왔을 매물 게시판이 텅 비어 있다.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라면 모르겠다. 그런데 이 ‘공백’이 구조적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매물이 증발하고 있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어디를 열어봐도 같은 광경이다. 서울 주요 지역의 대단지 아파트에서 전·월세 물건이 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입주 물량이 몰리면 전세 물건이 넘쳐나고, 집주인들이 임차인 구하기에 애를 먹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이 불과 몇 년 전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반대다. 임차인이 물건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통계는 냉정하다. 수도권 전세 거래량은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공급이 줄었다는 말이 아니다. 물건 자체가 시장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왜인가. 구조적인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토지거래허가구역의 확대다. 정부와 서울시는 투기 억제를 명분으로 토지거래허가구역을 꾸준히 넓혀왔다. 이 구역 내에서 아파트를 매입하면 실거주 의무가 생긴다. 즉 집을 사면 직접 살아야 한다. 임대를 놓을 수가 없다.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임대 가능 물건이 하나씩 줄어드는 구조다. 매매가 활발할수록 임차 시장은 더 빠르게 쪼그라든다. 규제가 시장을 옥죄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둘째, 신규 입주 물량의 급감이다. 2021~2022년 금리 급등기에 인허가가 급격히 줄었고, 그 여파가 지금 입주 물량 감소로 현실화되고 있다. 건설사들은 고금리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착공조차 꺼리는 분위기다. 분양은 됐는데 착공이 안 되는 현장, 착공은 됐는데 준공이 늦어지는 현장이 속출하고 있다. 새 아파트가 공급되지 않으니 기존 임차 시장의 수요가 분산될 출구도 없다.
셋째, 갱신청구권이 소진된 계약이 시장에 복귀하는 과정에서의 구조 변화다. 임대차 3법 시행 이후 갱신청구권을 한 차례 사용한 임차인들이 대거 계약을 종료하는 시점이 도래하고 있다. 집주인들은 이 시점을 활용해 실거주 전환을 선택하거나, 아예 월세로 전환하는 비율을 높이고 있다. 전세 물건이 줄고 월세 물건도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 이중 공백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세의 구조적 소멸, 그리고 월세의 역습
전세는 한국 고유의 임대차 형태다. 세입자가 목돈을 집주인에게 맡기고 이자 대신 거주권을 얻는 이 방식은, 고도성장기에 집주인과 세입자 양쪽 모두에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집값이 오를수록 집주인은 전세금을 ‘무이자 대출’처럼 활용했고, 세입자는 월 지출 없이 주거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저금리 시대에는 전세금을 굴릴 마땅한 수단이 없어진 집주인들이 월세를 선호하게 됐다. 고금리 국면에서는 반대로 전세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진 세입자들이 월세를 택하는 경향이 생겼다. 수요와 공급 양쪽에서 전세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이다.
전세는 한국형 주거 사다리였다. 그 사다리가 부러지고 있다. 집을 살 여력이 안 되는 무주택 서민들이 딛고 설 발판이 사라지는 것이다.
월세 전환이 가속화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월세 부담은 곧 생계비 증가를 의미한다. 수도권 직장인들의 월세 부담률이 소득의 30~40%에 육박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주거비가 이 수준을 넘어서면 소비 여력이 사라지고, 결혼·출산을 포기하는 원인이 된다. 저출생 문제와 주거 불안정이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전문가들 사이에서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정책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127만 호의 허상, 2030년의 유령 공급
정부는 수도권 127만 호 공급 계획을 야심차게 발표했다. 숫자만 보면 대규모 공급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계획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허탈감이 앞선다. 착공 목표가 2030년이다. 지금으로부터 4년 뒤에야 ‘땅을 파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완공은 그로부터 또 몇 년이 지나야 한다.
지금 전·월세 시장에서 짐을 싸야 하는 세입자들에게 2030년 착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장 내년, 내후년의 계약 갱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2035년에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조롱에 가깝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127만 호가 예정대로 공급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도심 내 정비사업은 갈수록 난도가 높아지고 있다. 재건축·재개발 사업은 조합원 간 갈등, 시공사 선정 분쟁, 인허가 지연, 이주 비용 부담 등으로 평균 사업 기간이 10년을 훌쩍 넘긴 지 오래다. 정비사업 해제 구역도 늘어나고 있다. 사업성이 나오지 않는 지역에서는 민간이 나서지 않는다.
신통기획(신속통합기획), 모아타운 같은 새로운 정비 방식들이 도입되고 있지만, 이 역시 시간이 걸린다. 행정 절차를 단축해 5~7년 안에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라지만, 현실에서는 이조차 순조롭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착공 목표 연도는 계획대로 지켜지는 일이 드물다.
공공택지 공급도 마찬가지다. 3기 신도시의 경우 발표에서 입주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교통망이 완비되지 않은 신도시는 수요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공급 숫자가 아무리 커도 실수요자들이 원하는 ‘직주근접 도심 주택’이 아니라면 시장의 공급 공백을 채우기 어렵다.
#정책 기조의 문제: 수요 억제 대 공급 확대
한국 부동산 정책의 고질병은 ‘수요 억제 편향’이다. 집값이 오르면 투기 수요를 막겠다며 각종 세금과 규제를 쏟아낸다. 대출을 죄고, 취득세를 올리고, 양도세를 강화하고, 토지거래허가구역을 지정한다. 정치적으로는 효과적이다. ‘투기꾼을 때린다’는 메시지가 여론에 먹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요 억제책의 부작용은 항상 임차 시장에서 나타났다. 집주인들이 실거주 전환을 택하거나 매물을 거두어들이면, 정작 집이 없는 세입자들이 피해를 입는다. 다주택자를 옥죄면 임대 공급이 줄어든다. 집값 상승기에는 집주인들이 전세금을 올린다. 어떻게 해도 세입자는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수요 억제 정책이 세입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입자를 더 취약하게 만드는 역설이 반복되어 왔다.
규제로 집값을 잡으려 할수록 그 피해는 집 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역대 정부가 반복해 온 이 실수를 현 정부도 되풀이하고 있다.
공급 확대가 정답이라는 것은 이제 좌우를 막론하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통된 인식이 됐다. 문제는 말뿐이라는 것이다. 공급 확대를 위해서는 규제 완화, 사업성 보장, 인허가 속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규제를 풀면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기득권 보호 논리, 행정 편의주의 등이 맞물려 실질적인 개혁은 지지부진하다.
용적률 규제 완화만 해도 그렇다. 1기 신도시 재건축에서 용적률을 대폭 높이면 새 주택 공급이 늘어나고, 기존 주민들의 사업성도 개선된다. 그런데 “층수가 높아지면 경관이 훼손된다”는 반대론과 “기존 주민들만 이익을 보는 것 아니냐”는 형평성 논란이 뒤엉킨다. 결국 중도에서 타협하고, 공급 효과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임차 시장의 미래: 세 가지 시나리오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임차 시장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세 가지 경로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버티기 고착화’ 시나리오다. 공급 부족이 지속되는 가운데 전·월세 가격이 꾸준히 오르는 상황이다. 수요자들은 더 먼 외곽으로 밀려나거나, 과도한 주거비를 감당하거나, 주거 수준을 낮추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사회 전반의 삶의 질이 하락하고, 인구 유출이 가속화되는 지역이 늘어난다. 이 시나리오는 현재 추세대로라면 가장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는 ‘전세 소멸, 월세 보편화’ 시나리오다. 전세 제도가 사실상 소멸하고 월세 중심으로 임차 시장이 재편되는 것이다. 유럽이나 일본처럼 월세가 일반적인 임대 형태로 자리 잡는 구조다. 이 경우 단기적으로 주거비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충격이 불가피하다. 월세 시장이 안정화되려면 충분한 임대 주택 공급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전세 소멸은 주거 불안정으로 직결된다.
세 번째는 ‘정책 선회와 시장 정상화’ 시나리오다. 정부가 공급 확대에 실질적으로 나서고, 규제 일변도 정책에서 벗어나며, 임대 사업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기조를 바꾸는 것이다. 임차 물량이 회복되고, 전세 가격이 안정되며, 주거 이동성이 높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가 실현되려면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표를 의식한 정책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본 정책이 나와야 한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들
시장이 스스로 해법을 찾을 여유는 없다. 정부가, 그것도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 기준을 재검토해야 한다. 투기 억제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구역을 무분별하게 유지하면서 임차 물량만 죽이는 현 방식은 시정이 필요하다. 최소한 신규 매입 주택에 대한 실거주 의무 적용 방식을 탄력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민간 임대 공급에 대한 세제 인센티브를 회복해야 한다. 임대사업자 등록제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이후 민간 임대 공급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일정 기간 임대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계약 갱신에 대한 적정 보상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
정비사업 인허가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서류 검토에만 수년이 걸리는 현 행정 시스템을 혁파해야 한다. 패스트트랙 제도를 형식이 아닌 실질로 운영해야 한다. 사업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공사비 부담도 줄어들고, 분양가도 낮출 수 있다.
공공임대 공급도 병행되어야 한다. 민간 임대 공급의 부족분을 공공이 메워야 한다. 그러나 공공임대는 입지와 품질이 관건이다. 교통이 불편하고 생활 인프라가 부족한 외곽 공공임대는 수요자의 외면을 받는다. 도심 내 공공임대 공급을 늘리기 위한 창의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기존 공공건물의 복합 개발, 역세권 소형 공공임대 확대 등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정책에도 책임이 있다
전·월세 시장의 붕괴는 갑자기 찾아온 재난이 아니다. 예고된 위기다. 수년 전부터 전문가들이 경고해 왔다. 입주 물량 감소,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 임대사업자 제도 훼손, 정비사업 지연이 맞물리면 반드시 이런 상황이 온다고. 그 경고를 무시한 결과가 지금의 ‘전세 0건, 월세 0건’ 단지들이다.
정책은 의도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결과로 평가받는다. 투기를 잡겠다는 의도가 아무리 선해도, 세입자들이 더 높은 월세를 내고 더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 정책은 실패다. 서민 주거를 안정시키겠다는 구호가 아무리 화려해도, 시장에 물건이 없다면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정부는 이제라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임차 시장은 지금 비상 상태다. 수치 뒤에는 집을 구하지 못해 쪽방에 머무는 사람이 있고, 전세금을 올려줄 능력이 없어 이사 갈 곳을 찾는 가족이 있다. 정책이 이들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다.
공급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기조를 바꾸는 결단은 오늘도 할 수 있다. 그 결단을 미룰수록, 피해는 고스란히 세입자의 몫이 된다.
1000세대 대단지에 전세 물건이 단 한 건도 없는 나라.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임차 시장의 현주소다.
※필명 빠숑으로 유명한 김학렬 스마트튜브 부동산조사연구소장은 한국갤럽조사연구소 부동산조사본부 팀장을 역임했다. 네이버 블로그 ‘빠숑의 세상 답사기’와 유튜브 ‘스튜TV’를 운영·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3040 부린이 처음 부동산 투자(2026)’ ‘다시쓰는 대한민국 부동산 사용 설명서(2025)’ ‘경기도 부동산의 힘(2024)’ ‘서울 부동산 절대원칙(2023)’ ‘인천 부동산의 미래(2022)’ ‘김학렬의 부동산 투자 절대원칙(2022)’ ‘대한민국 부동산 미래지도(2021)’ ‘이제부터는 오를 곳만 오른다(2020)’ 등이 있다.
김학렬 스마트튜브 부동산조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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