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국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펀드 시장이 단기간에 큰 폭으로 성장했으나, 정작 투자 포트폴리오에는 탄소 배출량이 많은 화석연료 기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는 국내 금융당국의 ESG 금융 상품 규제가 자산 편입 비중을 강제하지 않는 공시 중심의 체계에 머물러 있어, 자본의 실제 흐름과 상품 명칭 간의 불일치를 막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기후솔루션이 29일에 발간한 ‘ESG 펀드 그린워싱을 해결하는 방법: 해외 규제 사례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중심으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주식형 ESG 펀드 54개와 채권형 펀드 30개 등 총 84개를 조사한 결과 다수의 펀드가 석탄화력발전, 천연가스, 석유, 철강 생산 등 탄소 배출량이 많은 화석연료 및 고배출 제조업 기업의 증권을 다수 보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석탄 퇴출 리스트(GCEL), 세계 석유·가스 퇴출 리스트(GOGEL), 금융 배제 추적기(Financial Exclusion Tracker) 등을 활용해 선정한 38개 국내 화석연료 관련 기업을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화석연료 관련 기업을 전혀 편입하지 않은 펀드는 고작 6개에 그쳤다. 나머지 펀드는 포트폴리오의 일정 비율을 화석연료 관련 기업의 주식이나 채권으로 구성하고 있었다. 펀드별 화석연료 기업 편입 비중은 5%~20% 수준인 것으로 파악됐다.
조사 대상 펀드들이 보유한 대표적인 자산으로는 한국전력공사와 산하 발전 자회사들이 발행한 금융 상품이 있다. 유럽연합(EU)의 탄소감축 투자지표인 파리협약 연계 벤치마크(Paris-Aligned Benchmark, PAB)·기후 전환 벤치마크(Climate Transition Benchmark, CTB) 기준에 따르면 열탄 채굴 매출이 1% 이상이거나 전력 생산 중 석탄발전 비중이 50% 이상인 기업은 투자 배제 대상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한전 산하 5개 발전자회사는 매출 대부분이 석탄발전에서 발생해 이 기준에 해당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전 본사 역시 연결재무제표 기준으로 그룹 전체 사업을 평가하는 관행을 적용하면 같은 기준에 해당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국내 ESG 펀드 시장에서는 이들 고배출 기업의 금융상품이 유입되어 운용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친환경 전환을 기대하고 자금을 기탁한 투자자의 의도와 달리, 고탄소 산업에 자본이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것이다.
#공시 중심 규제의 한계와 정량적 가이드라인 부재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배경으로는 국내 금융당국의 규제 방식이 지목된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024년 2월부터 'ESG 펀드 공시기준'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산운용사는 펀드 명칭에 'ESG'나 '지속가능' 등의 용어를 사용할 때 투자 목적, 전략, 운용 능력, 그리고 ESG 관련 투자 위험 등을 증권신고서에 의무적으로 기재해야 한다. 제도의 취지는 투자자에게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여 오인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 제도는 자산운용사가 투자 전략과 방법론을 투명하게 밝히도록 유도하는 ‘공시 규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펀드 자산 중 ESG 요소를 충족하는 자산을 몇 퍼센트(%) 이상 채워야 하는지, 혹은 화석연료 기업의 편입을 어디까지 제한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량적 임계점이 없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주식형·채권형 등 자산 형태에 따른 50% 초과 투자 기준만 규정하고 있을 뿐, ESG와 같은 특정 주제(테마) 명칭에 대해서는 별도의 비중 제한을 두지 않았다. 자산운용사가 설명서에 ESG 통합 전략을 사용하며 일부 고배출 기업도 포함될 수 있다고 문서상으로 밝혀두기만 하면, 고탄소 기업 자산을 다수 편입하더라도 정량적 규제를 받지 않는 구조다.
이러한 규제 체계의 허점에 대해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사무총장은 “현재 금융감독원이 요구하는 공시기준은 펀드의 ‘지속가능성 목적’이나 ‘투자 전략 및 방법론’이 무엇인지 사전에 밝히도록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해외의 사례와 달리 ESG란 이름과 명실상부하게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도록 강제하는 임계치 자체가 아예 없다”라고 설명했다.
#해외 주요국, 명칭 규정 및 최소 투자 비중 법제화
반면 주요 선진국들은 금융 소비자의 오인을 방지하고 금융시장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펀드 명칭과 포트폴리오의 구성 비율을 연계하는 정량적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단순히 운용 방식의 설명을 요구하는 단계를 넘어, 이름에 부합하는 실질적인 자산 구성을 강제하는 방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명칭 규정(Names Rule)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명칭 규정을 개정하여 펀드 이름에 ESG, 지속가능성, 혹은 특정 환경 테마 등의 용어가 포함될 경우, 펀드 순자산의 최소 80%를 명칭이 나타내는 투자 전략과 부합하는 자산에 의무적으로 투자하도록 강제했다. 투자자가 펀드의 이름만 보고도 직관적으로 포트폴리오의 성격을 신뢰할 수 있도록 법적 가이드라인을 제공한 것이다.
유럽연합(EU) 또한 지속가능금융공시규제(SFDR) 체계를 고도화하고 펀드 명칭 가이드라인을 제정하여 통제 수위를 높였다. 유럽증권시장청(ESMA)은 ESG 및 지속가능성 펀드명을 사용하기 위해 최소 80%의 투자 비중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비중 규제를 넘어 EU는 PAB·CTB을 통해 화석연료 관련 기업을 포트폴리오에서 강제 배제하도록 하는 네거티브 스크리닝 기준을 마련했다. 싱가포르 통화감독청(MAS) 역시 리테일 ESG 펀드를 대상으로 순자산 가치의 최소 3분의 2 이상을 명시된 ESG 전략과 일치시키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해외 당국들은 공시의 투명성 확보를 넘어 실제 자산 구성과의 정합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운용하며 그린워싱 위험을 차단하고 있다.
#단기적 법 집행 강화와 정량적 기준 마련 필요성 제기
국내 시장의 건전성을 높이고 자본 흐름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외 주요국 수준의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자본시장법 개정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ESG 명칭 사용 펀드에 대해 70~80% 수준의 법정 최소 투자 비중을 설정하고, 친환경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화석연료 기업 배제 가이드라인을 단계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금융당국 차원에서 펀드의 실제 운용 내역을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검증할 수 있는 실사 인프라 구축의 필요성도 함께 언급된다.
동시에 새로운 법안의 제정이나 개정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해 단기적인 입법 공백기를 현행법 체계의 적극적인 집행으로 메워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새로운 규제 장치를 신설하지 않더라도 기존 자본시장법 내의 조항들을 실효성 있게 활용한다면 그린워싱 단속이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호주의 경우 별도의 ESG 규제법이 존재하지 않지만 증권투자위원회법(ASIC Act)에 명시된 금융 서비스의 성격이나 품질에 대한 오해 유도를 금지하는 조항을 적용해 대형 자산운용사들의 그린워싱 행위에 수천만 호주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등 단속을 하고 있다.
이관행 기후솔루션 리걸팀 미국 변호사는 “미국, EU, 호주 등은 ESG 전용 법규 제정 여부와 무관하게, 기존 증권법·금융법상의 ‘허위 공시 및 투자자 오인 유발 금지’ 조항을 그린워싱 대응에 적극 활용해왔다”며 “한국 자본시장법에도 유사한 규정이 존재하는 만큼, 현행 법체계 안에서도 제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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