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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 응급실의 절규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난다, 더 화려하게

지주막하출혈 50대 환자 가족이 일깨워준 인생의 진면목

2017.11.19(Sun) 06:00:00

[비즈한국] 신경외과 인턴일 때다.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처음으로 병원에서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다. 나는 당시 몇 가지 희망과 꿈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은 처음 의사가 되면 누구나 한동안 겪는 것이었다. 

 

일단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려내겠다는 결의와, 이 과에 속한 동안 상급자가 시키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태세, 결정적으로 앞으로의 망망한 의사 생활 동안 모든 환자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참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모두 곧 현실에서 좌절하고 말 것인 원대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의사가 된 문학청년답게 특별한 병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환자와 보호자를 슬픔에 가득 차서 좌절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신경외과는 그런 면에서 내가 지녔던 모든 병을 심화시키는 치열하고 대단한 분야였다. 내 담당 환자는 늘 80명이 넘었다. 사소하지만 환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술기는 엄청나게 많았고, 갑자기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처음의 각오대로 열과 성을 다해, 고작 환자 침대를 밀거나 피 검사를 하거나 간단한 환부를 소독하는 일일지라도 하나하나 꼼꼼하게 하려고 애썼고, 모든 환자나 보호자에게 늘 따뜻한 마음을 건네려 노력했다. 그리곤 남는 시간엔 그들의 처지에 감정을 이입하곤 슬픔에 차 있었다. 그러니 당시 나는 거의 잠도 못 자고 늘 무엇인가 하고 있어야 했던 셈이다.

 

그 피로에 지친 내게 유난히 힘든 밤이 있었다. 새벽에 서너 명의 뇌출혈 환자가 들이닥쳐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바삐 일해야 했던 밤이었다. 그 중 자다가 갑자기 뇌혈관의 꽈리가 터져 지주막하출혈이 생긴 50대 남성이 있었다. 기골이 장대한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외에는 어떤 표현도 하지 못했다. 그는 영원히 이전의 그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쓰러진 남편을 직접 발견했고, 이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당연히 오열했다. 학생으로 보이는 아들과 딸도 침통한 표정으로 옆에 한마디도 못 하고 서 있었다. 천성이 착한 가족으로 보였지만, 이제 내 눈에는 그들이 겪을 불행만이 보였다. 수술을 마치고 온 그는 한동안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 있다가 병실로 옮겨졌다. 

 

나는 그의 피검사와 간단한 소독만을 맡았는데, 아주머니는 의식이 없는 그를 항상 옆에서 지키고 간호했고, 교복을 입은 아들과 딸은 학교가 끝나고 매번 찾아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나는 누구에게나 꼭 나름대로 인간적인 말을 건네고야 말던 때였으므로, 아주머니와 아들딸들에게까지 아는 체를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내 환자였던 그를 대했다. 

 

아주머니는 친근하게 다가오는 ‘남궁인 선생님’을 특별하게 대해 주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나는 멀리서 그녀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고, 그녀도 준비해 두었던 음료를 꺼내주며 서로 일상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나는 평생 의식 잃은 남편을 돌봐야 하는 아주머니와,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독서실이 아닌 병원으로 향해야 하는 그 자녀들이 슬픔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생각을 멈추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큰 몸집이었던 환자는 이제 살이 빠져 야윈 모습이었고, 휠체어를 끌고 있는 아주머니가 “이제 이 양반이 제가 혼자 다룰 체격이 되어서 편해요”라고 착한 웃음을 지을 때도 그랬다. 나는 어느덧 신경외과 인턴이 끝나 그 가족을 가끔씩만 마주쳤고, 인턴 생활이 끝나고 응급실에서 근무하자 그들을 볼 기회가 없었으며, 그들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응급실에서 몇 년을 보냈다. 이제 나는 내가 했던 처치들이 아주 사소한 것이었음을 깨달았고, 따뜻한 참 의사가 될 것이라는 원대한 꿈도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건과 사고를 직접 목격하며 감정에 휘말려 여전히 사람들의 불행을 재단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내 앞에 나타났다. 여전히 따뜻해 보이고 약간 수척한 아주머니와 함께였다. 

 

아주머니는 내게 아주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남궁인 선생님이잖아요? 아주 멋있는 레지던트가 되었네요.” 그는 여전히 의식은 없었으나, 확연히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 떠먹이는 밥을 먹고 산책을 할 수 있었으며, 신체의 기능도 유지하며 일부 감정 표현도 할 수 있었다. 아마 아주머니가 몇 년간을 내내 간호한 덕분인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선 밝은 기운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양반이 요새는 확실히 나아졌는데, 최근 감기 기운이 있길래 왔어요.”

“제가 의사가 막 되었을 때 만났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건강하신 모습도, 밝은 모습도, 너무나 반가워요.”

“선생님 잠깐만요. 우리 애가 곧 올 거예요. 우리 애도 입버릇처럼 선생님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잘 됐네요.”

 

그에게 필요한 조치를 마치자, 그의 아들이 왔다. 오랜만의 재회였다. 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는 교복이 아닌 정장을 갖춰 입고 나름대로 늠름하게 아버지 옆에 서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뵙고 싶었어요. 저도 이제 취직해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부모님 모시면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와, 어떻게, 벌써 취직했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아유, 제가 나이가 얼만데요.”

 

늘 아무 말도 없이 슬픔에 차 있던 고등학생이 한 명의 사회인이 되어 내게 당당히 말을 건네는 모습이 마치,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동생의 성장을 보는 것 같았다.

 

“멋있네요. 너무.”

“아, 동생은 이제 수능 준비하느라 공부하고 있어요. 공부를 잘 해요. 간호사가 될 거래요.”

“아 그 친구도,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동안 주치의가 되었으니, 환자분을 VIP로 모시도록 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장을 입고 온 아들을 보는 아주머니의 눈빛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서글서글했다. 기억에서 잊혀가던 그들과의 예기치 못한 재회는, 문득 내 가슴을 청량하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우리 모두가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가족이 돌이키지 못할 불행을 겪고, 가장이 쓰러져 말없이 휠체어에 앉아만 있을지라도, 사람들은 현실을 비관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오히려 남은 사람들은 그를 끌어안고 돌보며 각자의 위치에서 앞길을 찾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성장한다. 내가 세상만사를 비관적으로 슬픔에 가득 찬 눈으로만 바라보고 있을 동안, 휠체어에 앉은 그는 그 나름대로의 자리를 잡고 세상을 견디고 있었고, 가족들은 그를 구성원으로 돌보며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일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가까운 사람이 전부 건강하고, 응급실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절규하는 사람만을 보던 내게, 불행을 재단하는 습관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싹은 어디든 피어난다. 그리고 척박한 곳에서 움튼 싹은, 오히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한다. 그것을 나는 고된 생활에 취해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건강한 모습의 그와 따뜻하고 서글서글한 한 가족이 그 당연한 사실을 내게 알려준 것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 ‘지독한 하루’ 저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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