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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판문점너머] 한·일 정면충돌 속 북한의 암중모색

일본 비난 목소리 높이는 동시 과거사 배상 무게 실어…전격 반전 카드 가능성도

2019.07.17(Wed) 23:05:02

[비즈한국] 강제징용 배상판결 문제 등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정면충돌이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어냈다.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양국 간 경제·외교적 대치와 갈등 상황이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여론의 중심에 서있던 몇몇 비중 있는 이슈가 실종된 것이다. 북한 비핵화 협상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행보도 그 중 하나다.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만남은 강렬한 충격파를 던졌지만 마치 오래전 일처럼 대중의 기억에서 단박에 멀어졌다. 국민 경제와 안보, 향후 대일 관계 등에 미칠 엄청난 후유증과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사태 전개 때문에 다른 이슈들에 신경을 쓰기 어려운 국면이 조성된 것이다.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한일 양국 간 경제·외교적 대치와 갈등 상황 속에 북한의 행보도 주목받는다. 지난 6월 30일 판문점 북미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지난해 9월 뉴욕 한일정상회담 때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연합뉴스‧청와대


북·미 정상이 합의한 후속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양측의 실무진들이 꾸려지고 의제 범위와 논의 방식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좀체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지난 16일에는 북한 외무성이 나서 6‧30 판문점 회동 당시 합의된 실무회담의 보이콧을 거론하며 한·미 연합 ‘동맹 19-2’ 연습 시행 움직임에 불만을 나타냈지만 별다른 울림이 없었다. 핵과 미사일의 시험·발사를 중단하는 모라토리엄을 파기하겠다는 위협성 입장까지 쏟아냈지만 마찬가지였다. 

 

사실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거친 대일 비난전을 오래전부터 전방위로 펼쳐온 건 북한이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를 비롯한 관영매체가 전면에 나서 입에 담기 힘든 표현으로 아베 총리와 일본 당국을 겨냥했다. 북한 매체에서 일본에 대한 비난이 사라진 적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최근 한·일 간 갈등이 본격화한 분위기 때문인 듯 북한은 통상적인 대일 비난 레퍼토리에 더해 일본 정부의 ‘한국 때리기’에 대한 비판적 논조를 내놓고 있다. 지난 13일엔 일본의 경제보복성 조치에 대해 “남조선 당국을 저들(아베 정부)의 손아귀에 틀어쥐고 군국주의적 목적을 실현하려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일본 당국이 수출규제 조치를 취하면서 한국 정부의 대북제재 위반 의혹을 제기한데 대해 북한은 “우리를 걸고 남조선에 대한 경제적 보복조치를 합리화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제공해 온 원자재나 물품이 북한에 불법적으로 제공됐다는 억지성 주장을 아베 총리 등이 직접 나서 펼치고 있는데 따른 반박이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일본이 한국과 북한을 싸잡아 ‘위반국’으로 낙인하려는 데 대한 불쾌감도 엿보인다.  

 

눈길을 끄는 건 북한의 대일 비난 입장에 ‘배상’ 문제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점이다.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6일 논평에서 일본의 한반도 불법강점과 식민통치를 비판하면서 “일본은 골백번 사죄하고 배상을 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경제보복 문제가 본격화하기 이전인 4일 ‘노동신문’은 “일본이 해야 할 일은 무조건적인 과거청산이고 바로 여기에 일본의 미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진심어린 배상”을 강조했다.

 

북한이 연일 격렬한 대일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배상’을 빼놓지 않고 요구하고 있는 대목은 흥미롭다. 한국이나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는 표면적으로 명분과 체면을 내세우는 태도를 보이면서 실리 챙기기는 이면합의나 비공개 논의를 통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이러한 배상 요구는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북한 몫 챙기기 의도가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식민지배 배상 등에 대한 명목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 등을 기준으로 북·일 간에 별도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절차가 진행돼야 한다는 메시지란 얘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은 생전에 북·일 간의 청구권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남측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도 일본으로부터 제공받게 될 자금을 토대로 북한 경제개발 프로젝트 등을 추진할 구상을 밝혔다는 후문이다. 당시 국제 외교가에서는 그 자금의 규모를 놓고 50억~100억 달러 수준은 될 것이란 등의 관측이 분분했었다. 그만큼 북한의 기대도 컸다는 의미다.

 

김정일 위원장이 2002년 9월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첫 정상회담을 하고 △국교정상화 회담 추진 △과거사 반성에 기초한 보상 △일본인 납치 등 사태의 재발 방지 △핵·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신뢰에 기초하는 협력관계 구축 등 4개항이 평양선언을 도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2002년 9월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앞두고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북·일 수교 등의 조속한 추진을 위해 납치 일본인 문제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에게 사과까지 했으나 일본 내 여론악화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4년 2차 북·일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상황을 되돌리진 못했다.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북·일 관계는 북핵과 미사일 도발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도 접촉점이 이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2012년에 일본인 유골 반환과 북송 일본인 처의 일시 귀국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적십자회담이 10년 만에 다시 열렸고 베이징에서는 당국회담도 열렸다. 2014년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외무성과 북한 보위부 인사와의 비밀 접촉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북·일 간에도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물밑 타진이 이뤄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고, 대북투자를 위한 사전 조사 작업 차 일본 측 정부·민간 인사들이 북한에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이 대북경협 관련 인사를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다.

 

북한은 반일(反日)을 정권 수립과 제체 유지의 기치로 삼고 있다. 김일성의 이른바 항일투쟁 신화를 앞세워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병영국가로서의 동원 체제를 주민들에게 강요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들어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인 고용희는 일본 오사카 태생의 북송 재일교포다. 또 외조부(고용희의 아버지) 고경택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 히로타 군복공장의 간부를 지냈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일부 당 간부층과 주민들 사이에 “원수님(김정은)은 백두산 줄기가 아니라 후지산 줄기”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전언이다. 이런 속사정 때문에 생모 고용희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제공이 걸렸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김정은 위원장은 어릴 적부터 북송교포 출신의 생모로부터 일본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고, 나름대로의 대일관을 갖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적대의식과 함께 생모가 전하는 일본의 발전상과 선진문화를 간접 경험한 다층적 의식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후계수업 과정에서 아버지인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하며 대일 접촉의 로드맵을 어떤 방식으로 짜야 할지에 대해 노하우를 전수받았을 공산이 크다. 

 

그 핵심에는 북한판 대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획득 가능한 막대한 자금과 물자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북제제와 비효율적 자원배분으로 인해 경제가 파국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대일 청구권 카드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마지막 희망봉일 수도 있다. 한·일 갈등상황에서 쏟아내는 북한의 대일비난을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북한은 유화국면으로 유턴하거나 대화 테이블에 나오기 직전 상대방에 대한 비난 목소리를 최고 수위로 높이는 패턴을 보여 왔다. 이런 전초전을 통해 기선을 제압하고 협상장에 나올 명분을 얻는 전술을 펼쳐온 것이다. 도무지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전격적인 회담에 합의하거나, 갑자기 회담판을 깨버리는 변칙 스타일로 상대측의 양보를 요구하는 방식도 구사한다. 관영매체를 동원한 평양발 대일비방의 파고가 부쩍 높아지는 시점이라면 북·일 간에 뭔가 은밀하게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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