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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림 탐식다반사] 간장 향이 지배하는 '평양메밀물국수', 봉밀가

국간장으로 낸 연한 짠맛과 육수의 감칠맛 조화…본질에 충실한 네이밍

2018.05.07(Mon) 13:22:43

[비즈한국] 아무튼 나는 평양냉면에 관한 한 맹목적인 애호가다. 지난 4월 27일 오전 10시 15분,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라고 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4·27 옥류관 냉면 선언’이 방송을 통해 전해졌을 때는 나는 파블로프의 개, 아니 냉면요정처럼 너무나 너무나 냉면을 마시고 싶어졌다. 하필이면 간장으로 간을 본다는 옥류관 냉면이 너무나 마시고 싶었다. 달달하고 구수하며 짭짤한 육수와 다대기(양념장)가 어우러졌을 맛을 망상했다. 물론 그런 냉면은 서울에서 먹을 곳이 없다. 아직은.

 

간장으로 간을 보는 냉면집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 옥류관 경험을 가진 이북 출신 평양냉면 요리사라는 캐릭터로, 이번 냉면 사건에서 일약 스타가 되어 수많은 인터뷰와 코멘트를 ‘쳐내고’ 있는 윤종철 요리사의 ‘동무밥상’이 있다. 옥류관 조리법의 변형이며, 그 핵심을 이루는 평양간장이 서울에 없어서 맛간장을 따로 끓여서 쓴다는. 그런데 이미 지난주에 마셨다. 패스.

 

강남에 또 한 곳이 있다. 강남구 보건소 옆 건물에 소소하게 자리 잡은 ‘봉밀가’에서도 육수에 간장을 사용한다. 3년간 숙성한 국간장을 쓰는데 전라도 영광군 법성 수림원의 재래식 국간장이라고 했다. 마침 오랫동안 가지 않은 냉면집이다.

 

짙은 간장향이 밴 봉밀가의 평양메밀물국수. 면은 눈으로만 봐도 미끈하다. 사진=이해림 제공

 

봉밀가가 자리한 보건소 옆 건설빌딩은 다소 기묘한 구석이 있다. 봉밀가와 어깨를 맞대고 ‘청담면옥함흥냉면’이 영업 중이다. 국숫집도 있고, 옆 가게에선 막국수를 판다. 무슨 면식의 멀티플렉스인가?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 빕 구르망에 선정됐다는 봉밀가의 홍보물이 눈길이 딴 곳으로 빠지지 않게 이끈다.

 

옥류관 선언이 있었던 다음날 느지막한 오후였다. 식당 직원들은 전날 점심부터 장사진을 이룬 냉면 순례자들에게 영혼과 육체를 탈탈 털린 상태였다. 냉면을 다 마시고 나올 때쯤엔 직원 식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둔 브레이크타임이 되었지만 “냉면 한 그릇만”을 외치며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냉면 순례자들은 끊이지 않았다. 

 

이곳 사장 권희승 씨는 이전에 막국숫집을 하다가 평양냉면집을 차렸다. 물론 자가제면이다. 막국수와 냉면의 결은 사실상 비슷하고, 최근 더욱더 구분하기 힘들도록 수렴돼가는 추세인데 이 사장님은 진작부터 양쪽을 섭렵한 셈이다. 메밀가루 80%에 고구마전분 20% 비율로 뽑아낸 면은 전분의 미끈한 질감이 전체적인 물성을 지배한다. 대충 씹어 넘기면 식도로 빨려들 듯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다른 평양냉면 전문점들에 비하면 꽤나 도톰한 편인데 면의 성질과 육수와 잘 맞는 두께다. 

 

들었던 바에 의하면 육수에는 한우 1+ 이상 등급의 양지와, 설깃살을 사용하고 무, 대파, 양파를 함께 넣는다. 한약재도 한 가지 넣는다는데 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 무겁지 않은 육향이 솔솔 코를 찌르는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은 역시나 국간장. 향이 제법 지배적이다. 그래서 육수 향과 맛이 달달한 경향이 있다. 위에 얹는 배 두 쪽도 육수에 풀려 단맛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 육향에 따라오는 감칠맛과 저염을 선호하는 강남 입맛에 맞춘 연한 짠맛이 조화를 이룬다. 꿀꺽꿀꺽 잘 넘어가는 육수다. 콸콸 다 마셔버렸다. 

 

봉밀가의 냉면은 분명 다른 냉면집들과 거리를 둔 특색을 갖고 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다소 과감한 시도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 과감함을 간만에 마시니 새삼 낯선데, ‘옥류관 토테미즘’이 박살 난 충격요법 덕분에 이 이색적인 개성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전엔 ‘별종’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먹었다. 

 

벽에 붙은 메뉴를 아무리 봐도 평양냉면은 없다. 대신 ‘평양메밀물국수’가 있다. 평양 스타일을 따른, 메밀로 만든 국수를 물(육수)에 말아 먹는다는, 본질에 충실한 네이밍이다. “평양냉면은 이래야 한다”는 세간의 선입견이 싫어서 굳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전 칼럼에서 평양냉면은 평양냉면으로 지켜 두고, 이제 서울의 평양냉면은 차라리 ‘서울냉면’이라고 하자고 했는데 평양메밀물국수라는 네이밍 역시 직관적이라는 측면에서 꽤 좋은 새 이름이 되겠다. 사장님 선견지명 있으세요?

 

‘냉면요정’ 이해림은? 패션 잡지 피처 에디터로 오래 일하다 탐식 적성을 살려 전업했다. 2015년부터 전업 푸드 라이터로 ‘한국일보’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먹는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음식 관련 행사, 콘텐츠 기획과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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