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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다반사] '사랑스러운 모난 돌', 한국 재래종 쌀을 맛보다

소출 적고 경작 힘들지만 자유분방하고 개성 있는 밥맛이 주는 다양성의 미학

2019.01.08(Tue) 15:55:17

[비즈한국] ‘맛의 다양성’이라는 말은 이제 꽤나 식상한 관용구가 되었다. 지난해엔 청포도와 캠벨과 머루와 거봉의 포도 세계에 샤인 머스캣이라는 강력한 입소문 품종이 등장해 다양한 포도 맛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몇 해 사이 초당 옥수수라는 스타 품종이 인기를 얻으면서 옥수수의 품종 개념이 어부지리로 정립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겨울. 설향과 죽향과 매향으로 딸기를 구분해 먹는 딸기 맛의 다양성, 지천의 온주밀감 외 한라봉, 레드향, 천혜향 등 귤도 구분해 먹는 귤 맛의 다양성이 겨울을 수놓고 있다. 품종마다 맛이 다르고 그 안에서 너와 나의 별다른 취향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화가 아닌 현실 미담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른 탐식 시계로 먹고 사는 내게는 적어도 그렇다.

 

가마솥에서 갓 완성된 밥. 그리고 그 마력. 품종이 섞여버린 재래종 쌀과 삼광을 섞었다. 사진=이해림 제공

 

언제나 품종과 맛의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야기가 있다. 토착종과 토종. 그러니까 뭉뚱그려 재래종이라고 하자. 품종 각각의 맛을 챙기다 보면 이 땅 한반도에 이어져 내려온 고유의 맛도 궁금해진다.

 

특히 쌀에서는 재래종을 챙기지 않을 수가 없다. 모종의 아이러니인데, 개량종 쌀이 대동소이하게 우수한 단계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식량 증산 시대의 보릿고개를 넘긴 후 우리에게는 고품질의 구수하고 달달한 우수한 쌀 품종이 많이 생겼다. 밥이 주식이기 때문에 열심이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것도 있고, 한국에서 개량한 종자도 부지기수다. ‘추청’ ‘히토메보레’ ‘호품’ ‘오대’ ‘삼광’ ‘신동진’ 같은 쌀들, 정말 맛있다. 어지간한 쌀을 사면 밥맛도 거기서 거기다. 다 좋다. 그야 품종 사이에 차이는 분명하다. 미세한 취향이 갈릴 여지가 명확히 남는다. 하지만 밥맛에서는 그 미세한 여지보다 찰기나 질감에 대한 취향이 우선이다. 품종보다 조리. 짓기 나름이다.

 

상향평준화되다 보니 되레 몰개성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의 다른 축이다. 품종을 굳이 가려 먹으려 할 때 우리가 각기의 품종에 기대하는 개성은 정작 재래종에 있다. 밥맛 좋게 획일화된 개량종 쌀들에는 없는 자유분방함이 여전히 있다.

 

색이 희지 않은 것도 여럿이고, 향이 낯선 것도 있고, 동남아 토착종으로 여긴 안남미 계열인 것도 있다. 평준화된 밥맛을 내지 못하는 것들, 소출이 많지 않은 것, 태풍이 오기도 전에 픽픽 쓰러져버려 농사를 망치는 것들. 정 맞을 데가 많은 중구난방의 모난 재래종 쌀들은 시장의 뒤안길 도태 일로를 걷고 있었다.

 

지난 5일 고양시에서 열린 전국토종벼농부들의 ‘토종볍씨 정보와 씨앗 나눔’ 잔치. 사진=이해림 제공

 

그 흐름을 역행하는, 감사한 이들도 있다. 지난 5일 경기도 고양시 북쪽 외곽의 우보농장에서 전국토종벼농부들이 주최한 ‘토종볍씨 정보와 씨앗 나눔’​ 잔치가 열렸다. 한 사람씩 나와서 재래종 농사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돌 팬클럽 못지않다. 몇 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만 추려본다. 왜 도태된 재래종 쌀농사를 짓는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재래종 벼는 키 큰 것이 많다. 픽픽 쓰러진다. 거름이라도 줬다가는 쑥쑥 자라 제 풀에 꺾인다. 태풍이 오기도 전에 제 키를 못 이겨 낱알을 품은 채 바닥에 드러눕는다. 재래종 쌀 농부들은 그래서 마을 어른들의 손가락질 대상이 되는 일이 많은 모양이다. 벼가 누워 있으니 ‘저렇게 농사지어서 밥은 어찌 먹고 사느냐’고 ​걱정을 해주게 돼 있는 것이다. 

 

마을의 손가락질거리는 또 있다. 농기계가 그토록 발달을 했는데, 재래종은 그마저 누리지 못한다. 대체로 기계 규격에 맞지 않는다. 허리를 구부리고 농사를 하게 돼 있다. 요즘 농부는 기술 덕분에 육체노동도 많이 줄었는데, 기계로 1시간이면 할 걸 몸으로 며칠 만에 한다고 한다. 사서 고생이다.

 

수율도 좋지 않다. 개량종이 왜 개량종이겠는가. 더 쉽게, 더 많이, 욕망을 투사해 식물체를 인간 입장으로 개량한 것이 개량종이다. 재래종 쌀은 연중 정성을 다 갖다 바쳐도 방치한 개량종 논만큼의 소출밖에 나오지 않더라는 한 농부의 이야기에 좌중의 웃음이 터졌다. 공통된 경험인 것이다. 

 

몇몇 농부는 “알곡이 많이 맺히는 품종을 골라 농사만 잘 지으면 개량종만 한 소출을 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내 귀엔 “전교 꼴등이지만 교과서만 잘 공부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 또 다 같이 와하하 하고 웃는다. 아니 이런, 자학 개그의 페이소스. 재래종 쌀 농부들의 이야기는 한결같게도 웃기고 슬펐다. 

 

개량종 쌀은 기계에 딱 맞고 거름도 잘 나오고, 농업 기술 전수도 별별 국가 기관에서 다 부지런히 해줘서 그대로만 하면 농사짓기도 수월한 편인데, 재래종은 그 무엇 하나 없다. 다 겪고 망해보며 좌충우돌로 부딪힐 수밖에. 50여 명이나 되는 재래종 쌀 농부들이 전국에서 새벽 채비로 경기도 끝자락까지 모인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우보농장 이근이 대표가 올해 재배한 150여 가지 재래종 벼를 전시했다. 사진=이해림 제공

 

하지만 그것이 개성이다. 자광도, 북흑조, 다마금, 녹두도, 늦닭벼, 버들벼, 한양조, 그리고 대추찰, 붉은찰, 녹원찰 같은 이름들 속에 ‘밥맛’이라는 만장일치의 가치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귀중한 개성과 구전된 쌀 역사가 녹아 있다.

 

‘이웃모르기’라는 이름의 쌀이 얼마나 맛있기에 이웃 모르게 키워 먹었나, 궁궐에서 먹었다는 찹쌀 ‘궐나도’로 떡을 지으면 얼마나 달보드레할지, 1896년 여주 농부 조중식 씨가 발견한 품종 ‘조동지’는 얼마나 맛이 좋았기에 쌀 수탈에 여념 없던 일제 때 장려품종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는지….

 

우리에게서 도태된 옛 쌀 품종들의 이야기가 다시 구전될 수 있는 건 모두 웃프게 망해본 재래종 쌀 농부들 덕분이다. 쌀농사 망한 이야기, 그리고 흔치 않게 성공해본 이야기를 푸는 동안 예쁘다, 아름답다, 좋아한다 하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들렸다.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승천했다. 사랑한다로 들렸다. 모나고 못나고 제멋대로인 그 우악스러운 개성들을, 사랑하는가 보다.

 

집에 돌아와 한 솥 분량으로 포장된 우보농장의 조동지 쌀로 밥을 지었다. 개량종 못지 않게 다정한 밥 향이 집안을 채웠다. 최고의 밥맛은 아니었지만, 사랑이라는 게 꼭 완벽함에만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보농장의 이근이 대표를 위시한 전국토종벼농부들은 재래종 쌀 가공식품 개발 등, 올해 더 많은 일들을 벌여 재래종 쌀을 시장에 자립시키려 애쓴다고 한다. ‘마르쉐@’ 등 농부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재래종 쌀을 구매해볼 수 있다.

 

가마솥으로 밥을 짓는 모습. 사진=이해림 제공

 

필자 이해림은? 푸드 라이터, 푸드 콘텐츠 디렉터.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싣고 있으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탐식생활: 알수록 더 맛있는 맛의 지식’을 썼고, 이후로도 몇 권의 책을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다. 콘텐츠, 브랜딩, 이벤트 등 전방위에서 무엇이든 맛 좋게 기획하고 있으며, 강연도 부지런히 한다. 퇴근 후에는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먹보들과의 술자리를 즐긴다.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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