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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산티아고 12] 천천히 걷자 길은 온전히 내게로 왔다

8시간 동안 20km…평소보다 두 배 느리게, 두 배 기쁘게

2019.04.09(Tue) 17:35:03

[비즈한국] 하루를 쉬었지만 왼쪽 정강이에서 발목을 따라 내려오는 붓기는 그대로였다. 우울했지만 마냥 쉬고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아침 6시 30분, 가방을 들쳐 메고 밖으로 나섰다. 가방이 묵직하게 날 감싸 안았다. 오늘따라 가방이 배로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아프다고 마냥 쉴 순 없었다. 내가 걸을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천천히 걷기로 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통증도 통증이지만, 무리하게 걸으면 호전되지 않을 거란 불안감이 컸다.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흡사 전쟁터의 지뢰제거반 소속 군인처럼. 온타나스(Hontanas)에서 하루 쉬는 동안 일행은 나를 포함 넷으로 늘었는데, 일행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걸음 속도였다.

 

이번이 세 번째 순례길이라는 도화 누나는 내게 ‘동키’를 권했다. 가방을 차에 실어 다음 목적지까지 보내라는 뜻이다. 본인도 허리를 삐끗해서 가방을 차에 실어 보내고 몸만 걸어가기로 한 참이었다. 가방이 없으면 걷기에 훨씬 나을 거라고 말했다.

 

잠깐 고민했다. 아니 하는 척했다. 동키를 이용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쓸데없는 똥고집이긴 했지만, 내가 지고 있는 가방의 무게는 내 욕심의 무게였다. 시작부터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었다. 내 욕심의 무게를 다른 누군가에게 짊어지우고 걷기만 하는 것 또한 욕심이겠다. ‘그럴 바엔 그만두고 말지.’

 

짐을 차로 실어 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내 욕심의 무게를 남에게 맡긴다는 게 민망했다. 사진=박현광 기자

 

나는 일행을 먼저 보냈다. 가능하다면 목적지에서 보자고 했다. 오늘은 이테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까지 21.5km 구간. 황무지이긴 해도 평지가 이어지는 코스였다. 물론 팔렌시아(Palencia)주에 들어선 뒤 무시무시하게 가파른 언덕이 나타나긴 한다. 자전거 순례자들이 걸어서 자전거를 밀고 가는 유일한 코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형, 저 오늘 형이랑 같이 천천히 걸을게요.”

 

주익이가 길을 가다 말고 돌아왔다. 장난인지 진담인지 모를 일이었다. 6kg도 안 되는 책가방을 매고 축지법 쓰듯 빠르게 걷던 녀석이었다.

 

“너, 나중에 나 버리고 갈 거면 그냥 지금부터 빨리 가.”

“아니에요. 안 버려요. 배고프거나 화장실 가고 싶으면 모를까.”

“이게!”

“농담이에요. 같이 가요.”

“진짜냐?”

“저도 오늘은 천천히 걸어보고 싶어요.”

“왜?”

“그냥요. 형 걱정도 되고.”

 

천천히 즐기며 걷자고 다짐 또 다짐했지만,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천천히 걷게 됐다. 사진=박현광 기자

 

그렇게 우리 둘은 카미노 위의 순례자를 통틀어 가장 느린 걸음걸이로 길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몸이 하는 말을 잘 듣자. 몇 시에 도착하는지는 신경 쓰지 말자. 쉴 곳이 나오면 쉬고, 욕심 부리지 말자. 카미노가 내게 알려준 몇 가지 원칙들이었는데, 한 번도 제대로 지켜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 원칙들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됐다.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왔다.

 

“주익아, 너 나랑 약속 하나 하자. 끝까지 나랑 천천히 걷기로. 그리고 끝나면 어땠는지 소감 말해줘.”

“네, 좋아요.”

 

날은 화창했다. 길은 여느 날과 같이 별 세 개 정도 줄 만큼 평범하게 아름다웠지만 내 눈에 별 다섯 개로 보였다. 일단 전날 휴식으로 발바닥 통증이 사라졌다.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발가락 사이의 물집에서 전해지던 그 성가신 모기 같은 고통이 없어서 상쾌했다. 고개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걸을 땐 몸을 15도 이상 기울여 걷게 되는데, 그러면 땅을 보게 된다. 천천히 걷자 반대편 산 능선을 볼 수 있었다. 나뭇잎이 갈색과 샛노란 색이 섞여 흡족했다.

 

“올라, 부엔 카미노”를 외치며 수많은 순례자들이 우리를 제치고 지나갔다. 이전엔 ‘내가 너무 늦나? 속도를 올려야지’라며 조급했을 텐데 개의치 않았다.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카미노가 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길고양이와 인사할 시간도 생기고, 조그만 성당을 둘러볼 시간도 생겼다. 사진=박현광 기자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길고양이와 인사할 시간이 생겼다. 마음에 있는 조그만 성당을 둘러볼 시간도 생겼다. 순례자길 마을 어디에나 있는 두 가지가 고양이와 성당이다. ‘발이 적응되고 상태가 괜찮아져서 여유가 생기면, 담에 고양이랑도 놀아주고 교회도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한 게 2주가 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이 아프니까 그럴 여유가 생겼다.

 

걷는 게 즐거웠다. 고백하자면 순례자길 위에 서곤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아프지 않게 걸었다. 웃기게도 몸이 가장 아픈 날, 가장 아프지 않게 걸었다. 특별하지 않은 황무지 길이었지만, 내겐 가장 특별한 길로 기억됐다. 내 다리를 주물러줬던 사비가 마음 한편에 나타나 ‘그래, 그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마을에 도착하니 도화 누나와 찬솔이, 그리고 중간에 합류한 선주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밥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갔다. 햄버거와 감자튀김, 와인 등을 주문하고 나오길 기다렸다. 주익이가 뜬금없이 날 보며 한마디 했다.

 

평소보다 두 배 느리게 걸었지만, 두 배 기쁘게 걸었다. 사실 느리게 걷는 게 빠르게 걷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사진=박현광 기자

 

“오늘 7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걸어서 20km 왔으니까 한 시간에 2.5km씩 걸었네요? 평소보다 딱 두 배 느리게 걸었네요.”

 

약간의 한숨과 능청스럽게 쏟아내는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군소리 없이 꿋꿋하게 느리게 걷더니 답답했던 모양이다. 고맙기도 웃기기도 했다. 키득거리며 물었다.

 

“주익아, 오늘 두 배 느리게 걸었지만, 평소보다 몇 배나 즐거웠어?”

“두 배요.”

“두 배밖에 안 즐거웠단 말이야?”

“네, 두 배요.”

“뭐가 좋았어?”

“안 힘들어서 좋았어요. 근데 형, 내일 괜찮아지면 좀만 빨리 걷도록 하죠. 오늘은 너무 느렸어요.”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모두가 스무 살짜리의 설익은 익살에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주익이의 오늘 소감은 겉도는 표현이 다였지만, 안 힘들어서 좋았다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나 걷다 보면 목표 지향적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일찍 도착하기 위해 빨리 걷는다. 목표는 짧고 구체적으로 바뀐다. 더 잘 쉬기 위해, 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더 좋은 곳에서 자기 위해 빨리 걷는다. 또는 다른 순례자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약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빠르게 멀리 간다.

 

조급하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돌부리가 미울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돌부리에 고마워할 필요도 있을지 모르겠다. 덕분에 난 오늘의 길을 온전히 걸었다.​ 사진=박현광 기자

 

몸이 힘드니까 단시간에 끝내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데, 여기에 매몰돼 빨리 걷다 보면 몸이 더 힘들어진다. 처음 가졌던 목표도 잃는다. 출발지인 생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모두의 목적은 ‘순례자길 정복’이 아닌 ‘또 다른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주익이 말대로 평소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아무런 급한 일이 없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한 시간 정도 쓰러져 있어야 할 만큼 피곤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빨래도 미루지 않고 척척 하고, 사람들이랑 술 한잔하며 이야기 나눌 시간도 생겼다. 그동안엔 꼭 오후 1시 이전엔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저녁이 되자, 가벼운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순례자길에서 빨리 걷는 것과 천천히 걷는 것을 두고 토론이 이어졌는데, 대부분 천천히 걷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인식하지만, 천천히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독서가 좋은 것이라고 알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듯. 많은 한국인이 천천히 걷는 습관, 잘 쉬는 습관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실은 천천히 빠르게 걷는 것보다 천천히 걷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은 아닐까. 우리는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를 엉성하게나마 매듭지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한 시간 정도 쓰러져 있어야 할 만큼 피곤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빨래도 미루지 않고 척척 하고, 사람들이랑 술 한 잔 하며 이야기 나눌 시간도 생겼다. 사진=박현광 기자

 

잠자리에 누워 오늘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도화 누나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이번에는 좀 천천히 걸으려고 했는데, 내 성격이 그게 안 되니까 또 빨리 걸었지. 그러다가 허리를 다쳤고 지금 천천히 걷잖아. 오히려 잘 됐지. 천천히 걷는 게 좋다는 것도 알게 됐으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다친 덴 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조급하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돌부리가 미울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돌부리에 고마워할 필요도 있을지 모르겠다. 덕분에 난 오늘의 길을 온전히 걸었다.​

박현광 기자

mua123@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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