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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나] 애써 잊었던 불편한 진실 ‘인종차별’의 기억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벽…회피하기보다 당당히 맞서 지적해야 개선돼

2019.07.11(Thu) 17:59:11

[비즈한국] 얼마 전 한국에 있는 친한 후배와 연락을 하던 중 후배가 내게 물었다. 

 

“언니도 인종차별 경험해봤어? 최근 국내 커뮤니티에 독일에 여행 갔다가 인종차별 당해서 상처받았다는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더라고.”

 

“심하지. 나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지하철이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 사람들은 다들 크고 작은 경험들이 있더라. 심한 경우도 있어. 여기 한인 커뮤니티에도 관련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데 그 정도가 더 심해지는 거 같더라고. 독일 내 극우정당이 매년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는 걸 봐도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알 수 있지. 극우정당은 대놓고 ‘반 이슬람’을 외치는데, 여기선 난민뿐만 아니라 이민자들까지 묶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

 

베를린의 한 지하철역 전경. 공공장소나 대중교통 이용 중 인종차별을 경험하는 사례가 많다. 사진=박진영 제공​


얘기를 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지난 2년, 내가 독일에 적응하고 익숙해진 사이,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를, 내가 겪었던 일들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당시엔 큰 상처였는데, 내 마음 편하자고 바로바로 기억을 삭제하면서 지내왔다는 점을.

 

베를린살이 초창기, 정착 관련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던 여성 교민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했다. 독일에 살다 보면 인종차별을 겪는 상황이 있을 거라고,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게 아니어도 느끼는 경우가 있을 거라고, 당황스럽고 기분 나쁘고 마음에 상처가 되겠지만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면 무시하면서 사는 게 속 편할 거라고. 

 

덧붙여, 독일인 아닌 이슬람 남자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슬람에서는 여자를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에 혼자 다니는 여성들은 ‘자신이 소유할 수도 있는’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했다. 다행히(?) 나 같은 경우는 대부분 아이와 함께 다니니 괜찮을 거라는 말도 했다. 인종차별은 뭐고, ‘소유’는 또 뭔지, 독일살이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내 머리 속에 없던 단어들이 그날 이후 걱정으로 자리잡았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수많은 외국인들이 모여드는 베를린 중앙역. 사진=박진영 제공


아닌 게 아니라, 불편한 상황을 이미 겪던 중이었다. 베를린에 와서 처음 두 달, 부유한 은퇴자들이 많이 사는 단독주택 밀집지역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길을 가다 우리를 관찰하거나 감시하는 듯한 노인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동양인이 거의 없던 동네라 처음엔 신기해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생각해보니 인종차별의 일종이었던 셈이다. 

 

동네 카페를 들어가도 독일인 아이들에겐 관대하기만 한 그들이 우리 아이가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내면 온갖 인상을 쓰며 위아래로 훑어보곤 했다. 인도 내에 선으로 구분된 자전거 도로를 인지하지 못해 그곳으로 걸어가다가 어떤 할머니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외국인이 많은 관광지가 아닌, 독일인들이 밀집된 공공장소에서는 주눅이 들 정도로 조심하면서 지냈다.

 

내 차가 생기고, 거처를 외국인들도 많이 사는 시내 쪽으로 옮기면서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독일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먼저 인사를 건네며 더없이 친절했고, 동네를 벗어나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으니 이전 같은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됐다. 점점 독일 생활에 적응해가며, 무뚝뚝한 표정에 덩치 큰 독일인들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게 되니 초창기 불편했던 기억들도 점점 잊혀져갔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베를린 미테 지역 거리. 사진=박진영 제공​


하지만 중간중간, 버스에서, 마트에서, 카페에서, 길거리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같은 학교 학부모들의 경험담이나 우연히 들어간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심각한 인종차별 사례를 들으면 다시금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불편하고 겁이 났다. 

 

한 학부모는 몇 해 전 라이프치히에 살 때 극우 성향 독일인들이 자신의 집에 계란을 집어 던지는 등 심한 인종차별을 겪어 트라우마가 생겼다고도 했고, 길거리에서 누군가 이유도 없이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유학생의 일화를 전해듣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낮에 젊은 한국 여성이 관광객들이 많은 번화가에서 묻지마 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가해자가 독일인인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일로 한인사회에 불안감이 확산됐다. 얼마 전에는 독일의 한 기업이 대놓고 아시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광고를 버젓이 내보내 강력한 항의가 이어지고 독일 내에서도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상상할 수 없던 일련의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며, 나는 그간 나의 ‘기억하지 않기’ 혹은 ‘무시하고 넘어가기’ 식의 방법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잘못됐고, 내가 혹은 나 같은 ‘우리’가 모른 척, 아닌 척 넘어가다 보면 이런 일이 1%도 개선되지 않을 것임을, 개선은커녕 더 악화돼 나에게 돌아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세계 여성의 날 시위, 이날 구호 중 하나는 ‘차별 금지’였다. 사진=박진영 제공​


파리에 여행 갔을 때 들었던, 집시들에게 둘러싸여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는 한 신혼부부의 대응방법이 불현듯 떠오른다. 누구라도 위협을 느낄 그 상황에 이제 갓 결혼한 신부는 험한 인상을 쓰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강한’ 어조와 단어를 사용해 상대를 놀라게 했다고 했다. 그것도 프랑스어가 아닌 한국어로.

 

물론 나는 여전히 많은 독일인들이 이성적이고 난민을, 외국인을, 이민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인종차별이 점점 심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장 맘 편하자고 모른 척할 게 아니라, 부당한 상황에 처해있고 참고 넘어가거나 간과하지 않을 것임을 강력하게 항의해야 조금이나마 인종차별을 막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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