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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스타트업열전] 버려진 배터리로 '에너지 복지' 꿈꾸는 '랜시'

전기자전거 배터리를 가정용으로 전환…비용 절감해 저소득층에 도움

2019.07.31(Wed) 19:25:49

[비즈한국] # 장면 하나. 바닥 난방이 기본인 한국과 달리 입식 주거 환경인 북미와 유럽에서는 벽 부착형 난방 기구 ‘라디에이터’를 주로 사용한다. 최근에는 신축 고급 주택을 중심으로 바닥 난방이 조금씩 보급되고 있으나, 10~20년 된 아파트는 신축에 해당할 정도로 유럽에는 오래된 주거용 건물들이 많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 가운데 난방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후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50~7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난방에 주로 가스를 사용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프랑스는 전체 가구의 3분의 1 정도가 전기 히터 또는 라디에이터를 사용한다. 수년 전 프랑스 국회를 통과한 ‘에너지 전환 및 녹색 성장 법안’은 수천만 대의 노후한 가정용 전기 히터·라디에이터를 교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저소득층의 에너지 비용 부담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랜시는 라디에이터 형태의 소규모 가정용 에너지 저장 장치를 만들어 저소득층의 에너지 복지에 일조한다. 사진=랜시

 

# 장면 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수년 전에 가정용 에너지 저장 장치(ESS: Energy Storage System) ‘파워월’ 출시를 발표하였다. 벽에 거는 배터리라고 할 수 있는 이 파워월은 전력 수요가 적은 시간(심야 등)에 싼 전기를 충전해 전기 요금이 비싼 시간에 꺼내어 쓸 수 있다. 가정용 태양광 발전 시설을 갖춘 주택이라면 해가 떠 있을 때 생산된 전기를 파워월에 저장했다가 해가 진 뒤에 사용할 수도 있다. 

 

배터리 기술이 핵심인 전기자동차 시장을 주도하면서 태양광업체 ‘솔라시티’를 자회사로 거느린 테슬라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전략적 사업 확장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정용 ESS 시장을 장악한 것은 태양광 보급이 활발한 유럽(특히 독일) 업체들과 배터리 기술을 주도하는 한국 업체들이다. 

 

# 장면 셋. 전기자동차의 동력원인 배터리는 통상 7~15년 정도 사용하면 주행거리가 감소하고 충전/방전 속도가 저하되는 등 수명이 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시 당시의 성능과 용량의 70~80% 수준으로 열화되는 것이다. 이를 에너지 저장 장치(ESS)용 배터리로 재활용하면 10년 이상을 더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기아차를 비롯한 글로벌 전기차 제조업체들이 이미 이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뛰어들 준비를 다지고 있으나, 전기자동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불과 수년 전이라 아직 ‘수명이 다한 전기차 배터리’가 시장에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 장면 넷. 배터리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이동 수단은 전기자동차만이 아니다. 자전거의 천국 유럽에서는 전기자전거 또한 활발히 보급되어 사용자층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모빌리티 서비스들의 격전장이 된 파리에서는 수도권교통공사와 프랑스우정공사(La Poste) 등이 합작해 2만 대 규모의 전기자전거 대여 사업인 ‘벨리고(Veligo)’를 시작할 예정이다. 

 

파리는 2007년부터 이미 공용 자전거 대여 사업인 ‘벨리브(Velib)’를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이 있다. 공공 부문이 주도하는 모빌리티 혁신의 대명사로 군림하던 벨리브 사업은 최근 수년간 중국계 자전거 대여 업체들의 난립 등으로 좌초했는데, 그 후신인 벨리고는 어떻게 난관을 헤쳐나갈지 주목된다. 

 

전기자전거도 물론 배터리를 사용하지만 어디까지나 언덕길 등에서 보조하는 정도라 전기자동차에 사용되는 고성능은 요구되지 않는다. 용량도 훨씬 작고 수명도 짧아 전기차보다 자주, 하지만 간편하게 교체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 이제 독자 여러분이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갈망하는 창업가라고 생각해보자. 이 네 가지 장면을 보면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시는지? ‘사용 기한이 지난 전기자전거용 배터리를 수거해 라디에이터 형태의 소규모 가정용 ESS로 전환, 저소득층의 에너지 복지를 위해 사용하면 어떨까?’라는 발상에 이르렀다면, 뛰어난 사업 감각을 가졌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발 늦었다. 프랑스의 ‘랜시(Lancey)’라는 스타트업이 이미 수년 전에 이런 아이디어로 창업했기 때문이다. 

 

랜시의 공동 창업자인 CEO 라파엘 메이에(왼쪽)와 CTO 쥘 모로. 사진=랜시

 

랜시는 2016년에 이제 막 열역학과 재료 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라파엘 메이에(Raphaël Meyer)와 베테랑 배터리 기술자인 쥘 모로(Gilles Moreau)가 공동 창업했다. 

 

CEO인 라파엘은 스위스 로잔공대에 06학번으로 입학해 학부와 석사를 마친 후(이때 삼성전자에서 인턴을 했다) 리옹 국립응용과학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학 프로그램으로 그르노블 지역에 위치한 중견 반도체 기업 소이텍(Soitec)에서 태양광 소자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가정용 전기 히터에 배터리를 넣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는 이때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

 

CTO 쥘은 그르노블 공대에서 전기화학을 전공한 후 2003년부터 르노자동차, 3M 등에서 연료 전지(fuel cell) 엔지니어로 일했다. 2009년에 그르노블로 돌아와 프랑스 원자력 및 대체에너지 위원회(CEA: Commissariat à l'énergie atomique et aux énergies alternatives) 산하 연구소에서 리튬이온 배터리, 에너지 저장 장치 관련 프로젝트 등을 이끌던 중 라파엘을 만나 그의 아이디어에 의기투합해 창업했다.

 

프랑스 과학 기술의 중심지이자 전통적인 좌파 도시인 그르노블은 저소득층과 장애인 등 소외 계층 복지도 유럽 내에서 손꼽힌다. 그르노블 공영주택공사(Opac38: Offices publics d'aménagement et de construction)와 그르노블 임대주택 사업자(Grenoble Habitat) 등 저소득층의 주거 복지를 책임지는 공공 기관들은 주민들의 에너지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라파엘과 쥘은 이들을 통해 아이디어를 시험해볼 기회를 얻었다. 시의 후원으로 2016~2017년 동계 기간에 100여 개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해 시험 사업을 진행한 뒤 2017년 본격적으로 상용 모델 제작에 돌입했다. 

 

그르노블에 연구 센터와 생산 기반을 둔 유럽 최대의 반도체 업체 ST마이크로의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에 합류한 랜시는, 2018년에 2000여 대의 배터리 ESS 겸용 라디에이터를 제작해 판매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이 과정에서 2018년 미국 CES의 가전 부분 혁신상(Best of innovation for home appliance)과 프랑스전력공사(EDF)의 스타트업 챌린지에서 1등, 오일 메이저인 쉘(Shell)의 ‘뉴 에너지 챌린지’에서 스타트업 분야 2등을 거머쥐었다. 프랑스 우정공사가 주최한 ‘프렌치 IoT’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의 연결이 앞서 말한 전기자전거 대여 사업의 배터리 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랜시의 에너지 저장 장치는 사용 데이터를 파악해 최적의 에너지 사용을 유도함으로써 에너지 비용을 절감한다. 사진=랜시

 

랜시의 에너지 저장 장치는 단순히 배터리와 히터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용 데이터는 클라우드를 통해 지능형 에너지 관리 시스템에 저장되고, 이를 기반으로 사용자의 생활 패턴과 날씨, 기후, 전력 사용 계약 등에 따라 최적의 에너지 사용을 유도함으로써 에너지 비용을 30%까지 절감한다. 여기에 더해 에너지 저감 시간대에 전기를 저장함으로써 추가로 20%의 비용을 절감, 최종적으로 난방에 필요한 비용을 절반까지 낮출 수 있음을 실증했다. 설치와 연결도 간단하며, 사용자가 스마트폰 앱을 통해 에너지 사용량 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하는 기능도 물론 포함되어 있다. 

 

2019년을 맞아 본격적인 성장을 준비하고 있는 랜시는 올 한 해 1만 대의 지능형 ESS 히터를 생산·판매할 계획이며, 매년 2배씩 늘려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CEO 라파엘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교체해야 할 노후 히터가 아직도 2억 개 이상 있다. 사업 확장을 위해 2019년 하반기에는 본격적인 투자 유치도 준비하고 있다. 가정용 에너지 관리 시장의 틈새를 파고들어 빠른 성장과 사회적 가치 실현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이 스타트업에 어떤 자본이 투자할지 궁금해진다.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

곽원철 슈나이더일렉트릭 글로벌전략디렉터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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