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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비가 그리는 디지털 캔버스의 미래와 '프레스코'

물감 농도와 붓터치까지 반영한 드로잉 앱 출시…포토샵 등 각종 어도비 앱과 확장성 '주목'

2019.10.02(Wed) 16:17:05

[비즈한국] 저는 그림을 못 그립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휴가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스케치하고, 차가운 미술관 바닥에 몇 시간이고 앉아 역사적인 작품을 내 손으로 담아보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손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일단 종이가 아깝다는 핑계를 꺼내봅니다. 그래서 사실 터치스크린과 펜의 조합에 솔깃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마음대로 그릴 수 있고, 종이 낭비도 없습니다. 이 엉망으로 그린 것들을 누가 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죠. 글이나 그림, 사진 등 여느 습작들을 만드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림 역시 디지털이 주는 접근성의 힘을 확실히 받는다고 봅니다.

 

어도비가 클라우드 기반 구독 유료 모델을 도입한 새로운 드로잉 앱 ‘프레스코’​를 새로 발표했다. 사진=최호섭 제공

 

# 컴퓨터, 그리고 그림판의 기억

 

아이패드 프로니, 서피스 프로니 이런 기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마우스도 없이 키보드 커서와 스페이스 바를 두드려가며 흑백 화면에 ‘닥터 할로(Dr. Halo)’로 점을 찍으면서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윈도우의 그림판만으로도 몇 시간씩 즐거웠던 경험들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컴퓨터 그래픽에 대한 열망을 깨웠을 겁니다.

 

컴퓨터 그래픽은 대세가 됐고, 이제 그림이 아니라 실사를 노릴 만큼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컴퓨터가 사람의 손 끝을 아날로그처럼 읽어들이기 시작합니다. 이건 그동안 전문가들이나 만질 수 있었던 그래픽 태블릿이 아니라 태블릿, 스마트폰 등 우리가 쓰는 기기로 빠르게 번집니다. 사실 도구는 핑계일 뿐이고 손바닥만 한 갤럭시 노트에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이 나오고, 누르는 힘에 따라 선 모양이 바뀌는 감압식 펜이 없어도 아이패드 위에서 손 끝으로만 그린 작품들도 엄청 많았습니다. 중요한 건 영감과 그림 그 자체에 대한 손기술이겠지요.

 

아이패드 애플 펜슬, 갤럭시탭 S펜 등 이제 태블릿과 펜은 더 이상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사진=최호섭 제공

 

그리고 기기와 응용프로그램들은 사람의 손 끝이 닿는 의도를 점점 더 정확히 이해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이패드의 애플 펜슬이나 서피스 프로의 서피스 펜, 갤럭시 노트의 S펜 등 좋은 펜들은 많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펜들의 기기적 발전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신 사람의 손 끝을 얼마나 더 실제처럼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경험치가 본격적으로 쌓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각 기기의 운영체제도, 그리고 그 위에서 돌아가는 응용프로그램들도 더 실제 같은 터치를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항상 뭔가 새로운 게 나오면 새로운 꿈을 꿉니다. 네, 새로운 드로잉 앱이 또 하나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어도비가 칼을 갈고 나왔습니다. 어도비는 지난 9월24일 ‘프레스코’라는 이름의 그림 그리기 앱을 발표했습니다. 사실 그냥 기기에 깔아서 쓰는 앱이라기보다는 다른 어도비 도구들과 연결되고, 클라우드를 통해서 확장되는 하나의 클라우드 서비스입니다. 요즘 어도비가 밀고 있는 구독형 클라우드 서비스 중 하나라고 보면 됩니다.

 

# 붓 끝까지 들어온 머신러닝

 

프레스코는 먼저 아이패드용으로 출시됐습니다. 나중에 윈도우를 비롯해 다른 환경으로도 나온다고 합니다. 아이패드 위에서 프레스코의 드로잉 경험은 꽤 훌륭합니다. 아이패드OS 13이 공개되면서 애플 펜슬의 입력 지연 속도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드로잉 처리 속도도 빨라서 펜슬이 움직이면 지연 없이 선이 따라옵니다. 이질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펜을 누르는 힘에 따라 굵기가 달라지고, 기울여서 선을 긋는 것도 됩니다.

 

애플 펜슬 외에도 손가락을 함께 쓰도록 했습니다. 왼쪽에는 다양한 브러시 관련 도구가 있고, 왼쪽 아래에는 작은 버튼이 하나 있어서 이걸 누르고 펜을 움직이면 지우개나 컬러 픽커(Color Picker)같은 도구를 빠르게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결과물은 그 해상도 그대로의 비트맵으로도 저장되지만 필요에 따라 벡터 방식으로 담을 수도 있습니다. 벡터는 펜의 움직임을 그대로 기록하기 때문에 크게 확대해도 결과물이 깨지지 않습니다.

 

프레스코는 어도비의 대표 프로그램 포토샵의 강력한 브러시 기능을 그대로 펜으로 구현한다. 사진=최호섭 제공

 

가장 재미있는 것은 물감의 처리입니다. 어도비는 ‘라이브 브러시’라는 이름의 물감 붓을 넣었는데 이건 수채 물감과 유화 물감이 종이에 묻는 효과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러니까 수채 물감에 물을 얼마나 섞는지, 붓의 움직임이 어떤지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옵니다. 유화 물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와 반응하고, 또 다른 물감을 덧칠했을 때 나는 느낌이 거의 실제처럼 그려집니다. 물이나 물감이 마르는 정도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쓰는 선풍기 아이콘은 귀엽기도 합니다.

 

어도비는 이 반응을 실제 물감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려낸 데이터를 바탕으로 머신러닝 모델에 학습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 붓의 움직임이 실제처럼 시뮬레이션됩니다. 지금도 꽤 괜찮은데 데이터가 쌓이면 아마 더 정교해질 듯합니다. 물감은 디지털 스케치북 안에서도 흉내만 내고 정밀하게 다루기 어려운 도구인데 꽤 재미있습니다. 그저 그림을 잘 못 그리는 손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사실 그림 그리기로 비교할 만한 앱은 아이패드에 이미 꽤 여럿 있습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려는 이들에게는 ‘페이퍼(예전 이름 페이퍼53)’는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았고, 애플 펜슬 이후로 주목받기 시작한 ‘프로크리에이트(ProCreate)’는 전문가 수준의 그림을 만들어내는 앱입니다. 어도비는 이 시장에서 무슨 차별점을 두는 걸까요.

 

# 어도비가 생각하는 스크린 캔버스의 가치 ‘콘텐츠 플랫폼’

 

사실 프레스코도 기본은 그림 그리는 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연필, 펜, 만년필, 목탄, 붓 같은 다양한 브러시와 잉크, 물감 등이 준비되어 있고, 원래 그림을 그리던 습관대로 따라서 그리면 됩니다. 그림 못 그리는 입장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두 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프레스코 대신에 앞의 두 앱을 쓰는 게 더 저렴할 수 있습니다.

 

후발주자인 프레스코는 분명 차별점이 필요합니다. 일단 어도비는 프레스코는 전문가 수준의 드로잉 도구를 노리고 나온 앱이라고 설명합니다. 단순히 그림 도구가 아니라 그림을 주제로 한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가깝습니다. 개발 단계에서부터 드로잉 커뮤니티들과 협업하고 드로잉 툴에 필요한 요소들을 챙겼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 중 하나가 라이브 브러시라고 합니다.

 

어도비가 생각하는 프레스코는 사실 단독 앱이 아닙니다. 프레스코의 가장 큰 특징은 포토샵으로 만든 브러시를 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미 포토샵용 브러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장이 이뤄져 있습니다. 이 브러시를 프레스코에 불러올 수 있고, 브러시를 비롯한 요소들은 다 어도비의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에 보관됩니다. 서로 브러시를 나누고 드로잉 결과물도 함께 나눠 볼 수 있는 갤러리도 있습니다. 작업 히스토리를 그대로 보관해서 타임랩스 동영상으로 만들고 이를 공유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결국 어도비는 그림을 주제로 한 새로운 형태의 생태계, 혹은 플랫폼을 만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포토샵이나 프리미어와 같은 고가의 어도비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이 불법 복제됐는지를 생각하면 어도비가 구독 모델을 강력하게 밀고 있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된다. 사진=최호섭 제공

 

구독 형태의 요금제도 이 때문일 겁니다. 어도비가 권장하는 것은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한 구독 서비스지만 저처럼 그림 실력이 좋지 않다면 기본 앱으로도 쓸 수 있고, 조금 더 나은 기능은 앱 내 결제로 사서 써도 됩니다. 이용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이 앱을 이용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프레스코의 앱 완성도는 그 자체로 굉장히 높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아이패드용 앱 중에서 가장 실제 드로잉에 가까운 경험을 만들어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역시 어도비’라는 소리도 나옵니다. 하지만 단순한 스케치북에서 끝나면 좀 시시할 겁니다. 프레스코가 가치를 갖는 것은 어도비가 이야기한 것 같은 생태계, 그러니까 브러시부터 결과물까지 공유, 유통될 수 있는 판입니다. 그게 활발해져야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될 겁니다. 그래야 전문가들이 프레스코로 그림을 그리게 될 겁니다. 어쨌든 그림이라는 작업 전체를 아우를 환경이 갖춰지는 건 충분히 반길 일입니다.

 

정리하면서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디지털 붓’이 좋아졌다는 말이지요. 이제 도구 탓을 하기는 어려울 만큼 기기도, 앱도 충분히 좋습니다. 좋은 키보드가 없어서 제대로 글을 못 쓰는 것도 아니고, 실제 악기가 있어야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구의 역할은 결국 창작 의지를 이끌어내고 그 아이디어나 생각을 그대로 빠르게 담아주는 데에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기능에 대한 내용을 상당 부분 담고 있지만 프레스코에 기대하는 부분은 바로 지금 보이지 않는 ‘판’으로서의 가능성입니다. 그림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두고 전 세계 사람들이 재미를 누리고, 그 안에서 재능과 경험을 나누는 판이지요. 그 간극을 줄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프레스코의 가치도 결국 그 안에서 만들어지리라 기대해봅니다.​

최호섭 IT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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