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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한국 최초 백화점의 탄생과 몰락…영욕의 화신그룹

조선총독부 비호 아래 부 축적…해방 이후 정부·금융권의 외면과 신사업 실패로 몰락

2021.10.15(Fri) 17:55:12

[비즈한국] 박흥식 화신그룹 창업주는 일제강점기 시절 5대 백화점 중 하나이자 유일하게 조선인이 운영한 화신백화점을 통해 부를 쌓아 해방 직후까지 한국 최고 갑부로 불리며 화신그룹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가 부를 쌓는 과정 뒤에는 조선총독부의 비호가 있었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1호 체포자, 부정축재자가 되는 불명예를 안은 박흥식 창업주의 무리한 투자와 신사업 실패 등으로 화신그룹은 몰락한다.

 

#16살에 시작한 쌀장사로 인쇄소까지…사업가 기질 보여준 박흥식 

 

박흥식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으로 부농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1910년, 1916년에 친형과 부친이 사망하며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어졌다. 가장 역할을 하던 박흥식은 16세에 미곡상을 차려 사업에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등으로 식량난을 겪으며 농산업이 호황기를 맞이하자 박흥식의 미곡상도 1년 만에 크게 성장했다. 미곡상을 운영한 지 2년 만인 1920년에 인쇄와 종이 판매를 겸하는 선광인쇄소를 차려 인쇄업에도 나섰다. 당시 경쟁업체가 없었기에 인쇄업도 크게 번창했다. 

 

화신백화점은 1931년 박흥식이 설립한 백화점으로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다. 1935년 1월 27일 전소된 후 1937년 11월 재개관했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이후 20세에 서울 을지로에서 (주)선일지물을 세워 해외에서 신문용지를 수입해 국내에 공급했다. 1924년 선광인쇄소를 주식회사로 전환해 선광인쇄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한 후 사장으로 취임했다. 

 

박흥식이 사업가로서 빛을 발한 계기는 종로 귀금속상인 화신상회를 인수하면서부터다. 화신상회는 1920년대 서울에서 가장 큰 귀금속 판매업체로 백화점과 비슷했다. 1931년 박흥식은 화신상회를 인수한 후 3층 건물로 재건축해 백화점을 차렸다. 당시 화신백화점 바로 옆에는 동아백화점이 들어와 대립구도가 형성됐다. 

 

하지만 6개월 만에 화신백화점이 동아백화점을 인수하며 경쟁은 끝나버렸다. 화신백화점은 관광코스 중 하나로도 알려지며 입소문을 타며 성장했다. 박흥식은 전국 잡화상을 가맹점화 하기도 했다. 이 잡화상들이 화신백화점을 토대로 수입품을 조달받도록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1935년 1월 화신백화점은 화재로 전소되는 사고를 겪었다. 이후 지하 1층~지상 6층 규모의 건물로 재건해 1937년 11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백화점 재건 기간인 2년 동안 조선총독부로부터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서 사용했다. 

 

당시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 2대와 엘리베이터 4대가 설치됐고, 5층에는 고급 한식당이 있어 나들이 코스로 유명세를 탔다. 박흥식은 화신백화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일제강점기 종료되며 몰락의 길 접어든 화신그룹

 

박흥식 사장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친일부역단체 등에서 중역으로 재임했으며 언론을 통해 일본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호소했다. 

 

1944년 2월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원 하에 ‘조선비행기’를 설립해 군수물자 지원에도 나서려 했다. 경기도 안양시에 강제 수용된 부지로 대규모 공장을 구축했고,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려 했다. 하지만 비행기 생산을 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아 폐업했고, 조선기계공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변경한 후 쌍용그룹 계열사에 매각됐다.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1903~1994).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1949년 1월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된 이후 화신백화점, 흥한피복, 화신무역을 중심으로 그룹을 이끌었으며 1947년 흥한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화신백화점이 다시 불탔고, 재건 후엔 경영난에 빠졌다. 이후 백화점 전체를 민간에 임대하기도 했다. 그룹 전체가 부진하던 중에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 박흥식 사장은 부정축재자로 몰려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1년 후 박흥식 사장은 정부의 협조를 받아 흥한화학섬유, 인천도시관광을 설립해 유통업 중심의 사업을 다각화하려 했다. 1966년 동양 최대 섬유공장을 세운다는 목표로 인견사 공장도 세우려 했지만 특혜 논란 탓에 정부와 은행이 그를 외면했고, 독자적으로 돈을 끌어 모아 공장을 완공했다. 

 

하지만 섬유업계가 급변함에 따라 정상 가동을 하지 못하다가 2년 만에 산업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새 먹거리를 찾아 나선 박흥식은 전자사업에 관심을 갖는다. 1972년 3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함작해 (주)화신전기를 세워 냉장고를 생산했고, 일본전자회사인 소니와 합작해 자본금 10억 원의 (주)화신소니를 창업했다. 또 여러 곳과 합작해 ​계열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모두 실적이 변변찮았다. 그룹의 주춧돌이던 화신백화점마저 적자를 면치 못했다. 1980년 10월 화신그룹은 323억 원을 부도 내고 정리에 들어갔다. 계열사들은 청산되거나 팔려나갔다. 1985년 화신백화점마저 한보그룹에 넘어가고 만다. 

 

박흥식은 흥한재단, 광신학원, 인천도시관광을 장남 박병석에게 물려준 후 재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종로구 가회동의 자택까지 매각한 후 전셋집을 전전하다 병에 걸려 1994년 사망했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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