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5년 전 출시된 오픈AI의 GPT-3는 약 45테라바이트(TB)의 데이터로 학습됐다. 이는 미국 의회도서관이 보유한 정보량의 네 배에 달한다. 훈련 내용을 기억하고 활용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이다. 현재 AI 시스템이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메모리 양은 충분치 않다. 연산 속도와 효율을 떨어뜨리는 병목 현상은 AI 시대 도래를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과제다. 이를 해결할 핵심 기술로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꼽힌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이 주도하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공급자 우위’ 국면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호황) 재진입 기대감이 커지는 가운데 공급망·전력·패키징 등 전·후방산업의 역량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AI 슈퍼사이클, ‘공급자 우위’ 한국이 중심에
AI 컴퓨팅 수요에 맞춰 데이터센터를 업그레이드하려는 글로벌 경쟁은 메모리칩 확보 전선으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 업계 주요 업체들은 내년도 HBM 공급 물량 ‘완판’을 공식화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9일 3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 콜에서 “주요 고객들과 내년 HBM 공급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올해 글로벌 HBM 시장점유율 64%를 기록한 SK하이닉스는 주도권을 이어갈 전망이다. SK하이닉스의 HBM은 2023년 이후 매해 매진 상태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30일 3분기 실적발표에서 엔비디아에 HBM3E를 공급 중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콘퍼런스 콜에서 “내년 HBM 생산 계획은 올해 대비 대폭 확대 수립했다. 해당 계획분에 대한 고객 수요는 이미 확보됐다”며 “추가적인 수요가 접수되고 있어 증산 가능성을 내부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HBM 시장 3강 중 하나인 미국 마이크론도 엔비디아에 핵심 메모리 제품을 공급하는 주요 업체다. 올해 점유율 21%로 삼성전자(15%)를 앞선다. 마이크론은 지난 9월 고객사와 HBM4 물량 공급을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며 곧 물량이 소진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객 기반은 3분기 4개 사에서 4분기 6개 사로 늘었다.
7일 한국무역협회의 반도체 전방산업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수출은 하반기 들어 30% 안팎의 증가세를 기록 중이다. 추세가 지속된다면 내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9090억 달러(1332조 7000억 원)로 17.8%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 성장을 주도하는 건 메모리 반도체(33.8%)다. 류영호 NH투자증권 연구원은 “AI가 이제는 ‘스케일 아웃(수평적 확장)’ 단계로 접어들면서 메모리 병목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며 “HBM에만 집중하는 단계에서 다양한 메모리 조합 중요성이 부각되는 국면”이라고 봤다.
AI·고성능 메모리 쏠림 현상은 스마트폰·가전 등 범용 IT 제품에서 메모리칩 부족이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을 정도다. 전보희 KITA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지난해부터 AI 데이터센터 시장이 급부상하며 수요 패러다임이 전환됐다”며 “내년 이후 AI 데이터센터의 지속 성장으로 수요 재편이 가속화하고, 2030년에는 전체 수요의 36%를 차지하는 압도적 1위로 부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AI 메모리 중심에서 AI 인프라 리더십으로
AI 서버는 기존 서버보다 더 많은 D램과 낸드플래시를 사용하고 학습 및 추론 과정에서 HBM 의존도가 높다. 엔비디아가 국내 기업과 협력을 강화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시장의 90%가량을 장악하고 있는데, 고성능 HBM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게 경쟁 우위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상황이다.
AI 반도체 호황은 이제 전력과 패키징 등 후방 연관 산업과 데이터 전처리·저장까지 광범위한 생태계로 확산될 것이라는 평가다. 메모리칩의 효율성을 온전히 끌어내기 위해서는 고효율 전력공급·냉각 인프라부터 패키징 기술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흐름은 메모리 중심의 한국 반도체 산업에 확장 기회를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2025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전년 대비 17.8% 성장, 2026년에는 9098억 달러로 고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 경쟁력은 칩 자체에서 나아가 데이터 이동 효율과 발열·전력 관리 능력에서 갈릴 것”이라며 “패키징과 전력 효율화 기술이 중요한 영역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증권가도 인프라 투자 흐름이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수요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 하나증권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설비투자 재개가 가시화되면서, 올해 수주 공백으로 부진했던 소부장 업체들이 내년부터 실적 개선세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서의 업계 관계자는 “GPU가 연산을 맡고 HBM이 연산 효율을 끌어올리는 구조에서 AI 메모리 중심의 기술·투자 리더십을 발판으로 전력·패키징·데이터 인프라까지 생태계를 확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큰 그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성수 ICT전략연구소장은 “AI 메모리 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부품을 넘어 시스템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이라며 “민간 위주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정부의 전략적 R&D 지원과 산학연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고 짚었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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