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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사상 최대 실적 속 한국 기술 경쟁력 '7점' 평가, 왜?

제조 역량 '세계 최고 수준', 문제는 플랫폼·표준 전략 부재…발전 붙잡는 병목은 '규제' 아닌 '인재 배분'

2026.01.04(Sun) 12:57:32

[비즈한국]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과 인공지능(AI) 혁명의 파고 속에서 한국 기술 산업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반도체·제조 인프라를 앞세워 세계 시장의 주요 생산기지로 자리 잡았지만 기술 패러다임이 빠르게 전환하는 국면에서 지금의 경쟁력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미지수다. 비즈한국은 신년을 맞아 한국국제통상회장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출신 정대영 연세대 경제학부 부교수의 진단을 토대로 한국 기술 산업의 현주소와 향후 핵심 과제를 짚어봤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을 보유한 한국 기술 산업을 두고 기술 패러다임을 주도할 플랫폼 설계 및 전략 부재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갈림길에 선 한국 기술 산업의 현주소와 향후 주요 과제를 진단한다. 지난해 11월 열린 ‘AI 서밋 서울 & 엑스포 2025’​ 현장. 사진=연합뉴스


#한국 기술 경쟁력 ‘7점’의 의미는

2025년 반도체 수출은 1734억 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AI 서버 투자 확대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급증이 맞물리며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역대급 반도체 수출 기록이 전체를 견인하며 한국 수출이 사상 첫 7000억 달러 고지를 밟았다.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단계로 이어졌는지를 두고는 회의적인 시각이 나온다. 기존 메모리·제조 경쟁력의 연장선에서 수출 규모가 확대된 것이지 기술 생태계나 시장 질서를 바꾸는 전환점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문제의식이다. 

두 전문가가 매긴 2025년 말 기준 한국 기술 산업의 성적표는 10점 만점 기준 7점 수준으로 일치했다. 허 교수는 한국 기술 경쟁력의 핵심을 ‘제조 플랫폼’으로 규정한다. 반도체 메모리, 배터리, 정밀 제조 분야에서 축적된 공정 운영 능력과 생산 효율성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며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를 떠받치는 기반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원천 기술이나 핵심 장비, 표준을 외부에서 들여오더라도 이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전환하는 능력은 한국의 분명한 강점”이라고 짚었다.

다만 이 같은 강점이 곧바로 미래 기술 경쟁력으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이 원천 기술에, 중국이 대규모 상업화에 강점이 있다면 한국은 그 중간의 제조 역량에 치우쳐 있다. AI·바이오·양자 등 차세대 기술 영역에서는 선두권 국가들과의 격차가 명확하고, 특히 기술 패러다임 자체를 설계해 표준을 주도하는 역량은 축적 단계에 있다는 판단이다. 

정 부교수 역시 “한국은 기술 가치사슬에서 ‘정교한 중간’을 점유해온 나라”라며 “남이 만든 지도를 따라가는 능력이 탁월하고 빠르게 학습하고 흡수하는 데 강하지만,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힘은 여전히 성장 중”이라며 비슷한 인식을 보였다.

AI 서버 투자 확대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급증이 맞물리며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지난해 11월 반도체 대전 현장에 전시된 삼성전자 HBM4. 사진=박정훈 기자


#기술 강해도 사업은 약하다? 전략 부재 지적

한국 기술 산업을 두고 반복돼 온 ‘사업 설계가 약하다’는 평가는 단순한 역량 부족이라기보다 구조적 문제에 가깝다는 진단이다. 한국은 제조 실행력과 공정 운영 역량을 중심으로 한 기술 축적에는 강점을 보여왔으나, 글로벌 플랫폼 비즈니스 설계와 확장성 확보 경험은 상대적으로 제한돼 왔다. 

허 교수는 구조적 약점이 발생하는 원인을 세 가지로 꼽았다. △대기업 중심의 네트워크 구조로 인해 중소·스타트업과의 혁신 연계가 취약하고 △글로벌 플랫폼 전략 부재로 시장 규모 확보 경쟁에서 뒤처지며 △교육 및 연구 인센티브가 기초 연구보다 응용·적용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구조는 기술의 ‘생산적 혁신’에는 유리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수익 모델을 결정짓는 ‘사업적·조직적 혁신’에서는 상대적인 지체 현상을 초래한다”고 봤다.

실제로 한국 기업들은 기술 완성도나 도입 속도 면에서 앞서 있는 편이지만, 해당 기술을 중심으로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생태계 설계 전략에서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허 교수는 “글로벌 AI 산업은 사용자, 데이터, 개발자가 선순환적으로 결합하며 특정 플랫폼에 경쟁력이 집중되는데, 우리는 초기 표준 선점이나 개방형 생태계 구축에 충분히 투자하지 못했다”며 “그 결과 개별 기술은 우수해도 글로벌 시장에서는 거대 플랫폼의 일부 구성 요소나 하청 기지에 머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진단했다. 

한국은 기술 패러다임을 주도할 플랫폼 설계 및 전략 부재로 부가가치 사슬의 상단부로 이동하는 데 제약이 있다는 평가다. ‘로보월드 2025’에 전시된 산업용 로봇. 사진=최준필 기자


정 부교수는 전략 공백의 원인을 행동경제학적 관점에서 바라봤다. “한국의 산업 문화는 불확실성을 피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실패를 벌점으로 처리하는 인센티브 구조가 고착화돼 있다”며 “100%의 정답을 확인한 뒤 움직이려다 보니, 70%의 완성도로 빠르게 시장에 진입해 반복 수정하는 글로벌 시장의 속도감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적재산(IP) 포트폴리오 전략의 취약성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언급됐다. 한국은 국제특허출원(PCT) 분야에서 세계 4위를 유지하는 등 기술 확보 의지가 매우 높지만 특허 수에 비해 기술료 수입이나 글로벌 라이선싱, 혹은 지분 투자를 통한 직접적인 수익 창출액은 주요국에 비해 여전히 낮다. 허 교수는 “한국이 생산과 투자를 담당하는데도 정작 기술 표준이나 라이선스 기반의 고수익은 해외 기업에 귀속되는 구조라, 부가가치 사슬의 상단부로 이동하는 데 큰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제조 AI’·인재·글로벌 협력…도약 조건으로 

향후 5년의 성패는 ‘범용 AI 추격’이 아니라 ‘AI로 산업을 재설계하는 역량’에 달려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미 격차가 벌어진 거대언어모델(LLM) 자체 경쟁에 자원을 분산하기보다, 제조·의료·금융 등 한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에 AI를 ‘운영체제(OS)’로 흡수하는 쪽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이다. 허 교수는 제조 데이터와 자동화 경험, 현장 운영 역량을 결합한 ‘제조 AI’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국면에서 전략적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전문가들은 인재와 자본의 배분 등을 기술 경쟁력 저하 요인으로 꼽았다. 올해가 한국 산업 기술 도약의 해가 될지를 두고는 조건부 낙관론을 내놨다. 사진=최준필 기자

 

기술 경쟁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흔히 규제가 거론되지만, 실질적인 병목은 인재로 지목됐다. 절대적인 인재 부족보다, 이들이 어떻게 배분되고 활용되는지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정 부교수는 “모두가 같은 정답을 묻는 구조에서는 새로운 질문이 나오기 어렵다”며 자본과 인재의 배분 문제를 꼬집었다. 허 교수는 일종의 시장 실패에 따른 인재 공급 부족과 교육·산업 간 미스매치를 경고하며 “불확실성이 큰 첨단 분야를 민간에만 맡기는 구조 속에서는 인재 유입에 적극적이기 어렵고 대학의 연구 방향이 산업 수요를 즉각 반영하지 못하는 괴리 역시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밝혔다. 

 

2026년이 도약의 해가 될지를 두고는 ‘조건부 낙관론’을 내놨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미·중 기술 경쟁 속 기존 산업 역량을 보유한 한국은 전략적 선택지가 넓어지고 있다. 기술의 양 보다 어떤 기술을 택해 어떻게 산업에 이식할 것인가라는 전략적인 선택과 의사결정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가 관건이다. 정 부교수는 “위험(risk)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모호함(ambiguity)에 대한 적응이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공동 연구와 표준 설정을 통해 글로벌 지식·인재·자본 네트워크에 한국이 구조적으로 편입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은경 기자

gong@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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