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은 원래 배우 최민수가 아니었다. 1991년 방영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의 배우 최재성이었다. 하지만 김종학 피디에 따르면 배우 최재성은 ‘모래시계’ 캐스팅을 고사했다. ‘여명의 눈동자’ 촬영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충분히 공감할 만했다. 1991년 당시 여명의 눈동자는 제작 기간 2년 5개월에 2만 5000명이 참여하는 대작이었다. 총제작비가 72억 원으로 회당 2억 원이었다. 당시 6000만~7000만 원 정도였던 다른 드라마의 3배 가까운 예산이었다. 더구나 해외 올 로케이션으로 국내 촬영은 얼마 되지 않는 글로벌 스케일의 대작이었다.
이런 덕분에 시청률은 최고 58.4%, 평균 44%를 기록했다. 작품성도 인정받아 1992년 제2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 작품상, 연출상(김종학), 남자 최우수연기상(최재성), 여자 최우수연기상(채시라), 인기상(박상원), 기술상(촬영, 조수현) 등 7개 부문의 상을 받았다. 매우 고생한 대가를 받은 셈이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지 않은 상황에서 상하이, 하얼빈, 구이린, 쑤저우 등지에서 촬영했고 필리핀 촬영도 있었다. 무엇보다 최재성은 뱀을 잡아 먹는 장면도 실제로 찍어야 했다.
여명의 눈동자는 오리지널 드라마는 아니고 김성종 작가의 원작 소설이 있다. 당시 주류 문단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작품이었다. 1944년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학도병 징집, 종군 위안부, 독립운동, 친일파 문제, 좌우 대립과 분단, 그리고 4.3은 물론이고 한국전쟁과 빨치산 토벌까지 당시 금기시되던 역사적 사실과 내용을 다뤘다. 작가 김성종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 1만 3000매 분량으로 ‘일간 스포츠’에 소설을 연재한 뒤 10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내로라하는 신문이 아니라 대중적인 스포츠 일간지에 연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드라마 제작진은 대중문화 차원에서 여명의 눈동자가 가진 원작의 힘을 알아봤다. 송지나 작가는 원작 ‘여명의 눈동자’를 드라마로 새롭게 각색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시대정신에 맞게 선택과 집중을 잘한 것이다. 콘텐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일반 대중이 눈높이에 맞게 만드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그때 잘 보여주었다. TV 드라마가 사회적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담아 대중적인 주목을 받고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이 연장선에서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도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2019년, 2020년, 그리고 2025년 다시금 찾아온 여명의 눈동자는 또 다른 의미와 가치가 있다. 뮤지컬은 종군위안부와 독립운동, 4.3 사태를 집중적으로 부각한다는 점에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보다 한층 더 사회 역사적 메시지를 강조한다. 종군위안부, 4.3과 관련해 진실을 왜곡하는 행태가 나타나는 이 시대에 매우 필요한 작업으로 보인다.
우리 콘텐츠 산업은 원저작의 권위나 평판을 넘어, 잠재성과 가능성을 파악하고 이를 보석 콘텐츠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단순히 조회 수나 다운로드에 연연하는 현재의 리메이크 창작 풍토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대중적인 장르 문학에 대한 선호가 높은 상황에서 순수문학만으로는 K콘텐츠에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순수문학은 아니지만 사회적 함의와 대중성을 모두 겸비한 작품을 발굴하고 영상 콘텐츠로 만드는 작업은 중요하다. 한류 현상 때문에 더 중요해졌다. AI가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대에는 이런 기획력이 더욱 긴요하다.
여명의 눈동자는 원소스 멀티 유즈나 미디어믹스 전략 차원에서 함의가 있다. 신문연재 소설에서 드라마로, 다시 드라마가 뮤지컬로 거듭나면서 관객 친화적인 새로운 대안적 공연을 실현한 것은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다. 일방향적으로 하는 공연이 아니라 관객이 공연을 사방에서 접하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게 만든 객석의 단과 좌석 배치는 공연을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관객이 역사적 현장에 같이 참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공연양식을 시도한 것이다. 또 마당놀이 전통 공연 양식에 LED 런웨이 무대의 구성은 작품의 스토리 라인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탁월하게 형상화해 주제의식에 더욱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다만 달라진 콘텐츠 감수성과 관객 수용성을 위해 비극적이고 고통에 찬 대목은 양을 조절하면서 그 안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늘어나면 뮤지컬의 매력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장르적인 선호를 위해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과 희망의 여운을 남기는 것이 필요하다. 최소한 미래 세대는 살아남아서 새로운 세상을 이어가는 설정이 중요할 것이다.
필자 김헌식은 20대부터 문화 속에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길이 있다는 기대감으로 특히 대중문화 현상의 숲을 거닐거나 헤쳐왔다. 인공지능과 양자 컴퓨터가 활약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같은 믿음으로 한길을 가고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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