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후기 고령자가 되었다. 동년배의 부고를 듣게 된다. 지기(知己)를 잃으면 그 사람과 공유하고 있던 기억 속의 내가 모조리 저세상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그렇게 나 자신이 깎여나간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이자 사회학자, 여성운동가로 살아온 투사가 뜻밖의 고백을 내놓았다. 어느덧 여든을 앞둔 우에노 지즈코는 최근 낸 ‘느리게 마이너노트로’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죽음과 돌봄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에노 지즈코는 일본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석해 일본에 페미니즘을 대중화시킨 선구자로 꼽힌다. 역자의 표현을 빌자면 ‘동아시아 여성 지성계의 왕언니’ 같은 인물이다. 그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페미니스트이자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남성 중심 사회에 냉소적이고 분명한 목소리를 내왔다.
그런데 이번 책은 그간 내온 ‘장조’의 목소리와 다르다. 최근 관심을 기울인 노후와 돌봄 문제에 자신과 주변인들이 나이 들면서 겪은 경험을 담담하고 조용한 ‘단조’로 들려준다.
이를테면 평생 불화한 아버지에게 애정을 내보인다.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에 반발해 ‘쓸모없는’ 것을 추구했으나 돌이켜보니 대학교수가 되어 결국 쓸모 있는 일을 했다는 이야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자신을 보러온 아버지가 사준 스웨터를 오래도록 버리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인생에 후회 따위는 남기지 않을 것 같은 저자도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 화해하지 못한 것이 회한으로 남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는 “마지막에 ‘살아서 좋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내 인생에 들어온 사람들, 그리고 나의 미숙함으로 인해 상처받았거나 오해 때문에 관계가 틀어져버린 사람들과 용서를 주고받고 싶다”고 말한다. 평생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마저 용서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죽음과 가까워져야만 품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초고령화 사회 일본의 노후와 돌봄 문제에 대한 지적은 통렬하다. 저자는 현대 일본의 최고 지성인들이 인지증(치매)에 걸려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 현실을 거부해 스스로 삶을 저버리는 사람도 생겼다. 평생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살아온 사람이 주간돌봄센터에 들어가 ‘무력하게’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 현실에 저자는 치를 떤다.
“자, 여러분, 함께해요”라고 말하는 주간 돌봄센터의 레크리에이션 같은 데 나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단체 행동을 좋아한 적 없는 내가 늙었다고 그런 걸 좋아하게 될 리 없다. 요양보호사가 귀에다 ‘할머니’라고 속삭이면 ‘나는 네 할머니가 아니야’라고 쏘아붙일 것 같다. (중략)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식사도 목욕도 내 몸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노년의 현실이다. -195쪽
저자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바깥 활동을 하다 낙상 사고를 당해 나이듦의 괴로움을 몸소 느끼게 된다. 언젠가 노인이 되면 이렇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천지차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추월해가는데도 나는 걷는 것조차 힘들다, 통증에 기운이 꺾이고 식욕도 목욕할 기운도 사라진다, 양말 신는 것도 힘들다. 그제야 아팠던 사람들의 고통이 진심으로 헤아려진다.
들어봤다고,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결국 타인의 고통일 뿐이었다. ‘그때 그 사람은 이런 고통을 견디고 있었던 걸까’, ‘암 말기였던 그 사람은 진통제를 쓰면서 나를 만나러 와줬던 걸까’ 하며 이런저런 장면이 떠올랐다. -222쪽
책은 우에노 지즈코라는 곡(曲)을 만든 가족과 어린 시절 이야기 ‘바소 콘티누오’에서 출발해, 사회학자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활약한 ‘인테르메조’를 지나, 전쟁과 인지증 등을 다룬 ‘리타르단도’로 천천히 하강한다. 마지막으로 ‘녹턴’에서 사랑하는 지인들에 대한 만가(挽歌)가 울려 퍼진다.
종종 그렇듯 눈빛 형형하던 학자가 늙어서 약해진 것일까. 과거의 독설가는 사라진 걸까. 아니다. 목소리는 담백하되 그는 더 깊어졌다. 이제는 자신의 약함까지 인정하는 ‘강인함’을 갖게 되었으니까. 저자는 “자신의 못난 부분을 있는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이 과거의 나든 현재의 나든 그대로 껴안고 다독임으로써 얻는 자유”를 보여준다.
우에노 지즈코는 지난 2023년 사재를 출연해 ‘우에노지즈코기금’을 만들었다. 일본 내 젠더 평등 실현을 위한 연구와 활동을 지원한다. 설립 취지에는 이렇게 밝혔다. “우에노지즈코기금은 공평, 공정, 중립 같은 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학력, 소속, 성별, 국적도 불문합니다.” 앞서 걸은 여성들에게 넘겨받은 언어와 사상을 그 역시 후대로 계승하는 것이다.
‘송은’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입은 은혜를, 그것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자식이 없지만, 대학 교원이었던 내 밑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로 진출했다. 그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선생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 은혜는 학생들에게 갚을게요.” 미래의 인재로부터 어떤 도전적인 주제가 등장할지 기대로 두근거린다. -234쪽
우에노지즈코기금은 앞선 페미니스트들의 유산이자 우에노 지즈코의 유산이다. 어쩌면 우에노 지즈코가 스스로를 위해 남기는 ‘만가’일지도 모르겠다.
김남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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