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마감에 쫓기는 만화가들의 밥상(소울푸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조관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밥상 아래 문화로” 여겨지던 만화를 밥상 위에 올리기 위해 한평생 애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을 살면서 끼니만 때우면 됐지 뭘 찾아 먹을 겨를이 어디 있었나. 짬뽕이나 한 그릇 하자고.”
고된 마감 뒤에 찾는 ‘소울푸드’를 여쭈니 그런 것 없다며 댁 근처 중국집이나 가자고 하신다. 아뿔싸. 우리가 보릿고개 세대를 얕보았구나. 인터뷰를 무를 수도 없고, 이렇게 된 이상 짬뽕에서 참기름 같은 추억을 짜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의 중국집으로 향했다.
때 이른 봄 더위에 자차이(짜사이)처럼 절여져 식당 앞에 도착하니, 선생이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와 서 계신다. 팔순을 코앞에 둔 선생은 더없이 꼿꼿하기만 하다. 화교 부부가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부터 종종 찾으셨다며 짬뽕과 짜장면, 유린기를 권하시길래 얼른 맥주를 덧붙였다.
#아련한 우동의 추억, 월하빙인이 된 간짜장
음치도 품 안에 애창곡 하나는 가지고 있듯, 가난했던 시절 탓에 식도락 재미는 모르고 살았어도 음식에 관한 추억이 전부 빈칸으로 남은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집에 찾아온 친척을 대접하기 위해 심부름차 들렀던 동네 청요릿집의 우동 냄새는 반세기가 훌쩍 지났어도 노인이 된 소년의 코끝을 여전히 맴돈다.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서 윤직원 영감과 춘심이의 출출한 속을 달래주던 중국집 우동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대표적인 한국식 중화요리다. 요즘은 우동을 내는 중국집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지만, 빨간 짬뽕이 등장한 1970년대 전까지 우동은 짜장면과 더불어 큰 인기를 얻었다. 졸업처럼 특별한 날을 기념한 외식이나 각별한 손님 접대 같은 한턱내는 일이 대부분 ‘청요릿집’이라 불리던 중국집에서 하던 시절이었기에 음식에 관심을 두지 못했던 선생도 그에 관한 추억이 없을 수 없다.
월간 만화잡지 ‘만화왕국’에서 일할 때, 선생은 계란후라이 얹은 간짜장 한 그릇과 빼갈(고량주) 한 잔으로 원고 마감의 피로를 달래곤 했다는데, 충무로 중국집에서 그 소소한 기쁨을 함께 나누던 신입사원과 결혼까지 했으니 중국집이 월하빙인(月下氷人)이었던 셈이다.
#‘밤안개’ 흐르던 새벽 골목길과 크림빵
고등학교를 마치고 문하생이 되겠다며 무작정 상경한 서울, 배고프고 미래는 불확실했지만, 만화가의 꿈 하나로 충만했던 새벽 응암동 골목을 떠올리며 선생은 크림빵 이야기를 꺼냈다. 기초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동료 문하생들이 잠든 밤에도 한 시간씩 그림 연습을 더 하다가 새벽이면 찾아드는 허기를 크림빵으로 채웠다. 1964년, 한 양산빵 업체가 내놓은 크림빵이 그것이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크림빵을 들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걷던 한겨울 새벽 골목길에는 영세한 봉제공장에서 틀어놓은 가수 현미의 ‘밤안개’가 흘렀다. “밤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밤거리, 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 님 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나는 간다.”
‘밤안개’의 화자가 그러했듯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꿈을 찾아 나가던 청년 조관제를 회상하며 선생이 말했다. “장래가 어떻게 될지 좀처럼 확신이 안 서는 상황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으니까. 그때 비하면 지금은 재벌이지만, 인생 살아오면서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가득했던 그때가 제일 부자가 아니었나 싶어.”
#같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지난 2007년 10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열린 선생의 카툰 개인전 ‘취생몽사’에 ‘식구’라는 작품이 나왔다. 다양한 세대 구성원이 한자리에 모여 젓가락과 그릇을 들고 무언가를 먹고 있는 모습이 한 몸처럼 엮이도록 연출한 이 작품은 식구(食口)라는 표현이 지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따스하면서도 명확한 필체로 보여주었다. 가난했기에 먹는 일에 욕심 부릴 형편은 못 되었지만 5남매의 장남으로, 가장으로, 기관의 책임자로 한평생 살아온 그에게 각각의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먹는 일의 의미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카툰에 고단했던 시기를 함께 살아간 이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 책임감을 담았다.
선생은 외할머니가 만들어준 콩가루 뿌린 칼국수가 생각난다고 했다. 농사일로 바쁜 한여름 외갓집에 맡겨진 어린 손자를 위해 할머니는 홍두깨를 밀어 국수를 끓였다. 할머니 곁에서 알짱거리다 얻은 반죽 자투리를 아궁이 불에 구워 먹은 손자가 국수를 먹다 배부르다고 그릇을 물리면 할머니는 “국수는 ‘삽작(사립문의 강원·경상 방언)’만 가도 금방 배 꺼지니까 어서 더 먹으라”고 하셨단다. 할머니의 그 푸진 마음이 선생에게는 그 시대의 정감으로, 우리에게는 그의 카툰으로 남았다.
#“나는 아직도 잘 그리고 싶어”
맥주 한 병이 다 비워졌을 무렵, 선생의 잔 바닥에 작은 회한이 아른거렸다. 공부가 부족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가난한 집의 맏이로 태어나 평생 만화 일만 바삐 해온 탓에 악기 하나, 외국어 하나 배우지 못한 것도 후회되지만, 제대로 된 미술 공부를 못 해 자기 그림이 아직도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만화판에 들어온 큰딸(조희윤 카툰캠퍼스 대표)이 “그 연세에 뭘 잘 그리려고 하시냐. 이제 편하게 그려도 되지”라고 타박해도 작품으로 말하는 작가로서 자신은 아직도 잘 그리고 싶다고 한다.
루쉰이 “늙은 전사는 투창을 든다”라고 말했던가. 아직도 펜을 놓지 않고 매일 “낙서”한다는 황혼의 카투니스트가 안일에 빠진 후배를 일깨우며 한마디 덧붙인다. “한 잔 더 해야지.”
#‘조관제 자서전’을 기다리며
하루의 일기처럼 쓴다는 선생의 “낙서장”에는 그림도 그리지만, 한풀 꺾인 카툰을 살리려는 아이디어들도 적는다. 한국만화가협회·한국카툰협회 회장,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으로 일하며 이미 적지 않은 정책을 제안했지만 아직 펼쳐보지 못한 아이디어들이 많다고 했다. 몸에 밴 습관 탓에 수첩과 메모지를 모아 남긴 기록이 벌써 여러 권. 이제는 후학들을 위해 자서전으로 엮어주시길 청했다.
원로 만화가들을 기록한 그의 저서 ‘조관제 만보(漫步)’가 빠뜨린, 그 자신의 이야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작가로서, 행정가로서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살아온 그의 기록이 과거에 대한 충실한 기억으로, 새로움을 위한 무한한 영감으로 남길 바라며 잔을 들었다. “건배.”
카투니스트 조관제 선생은 1947년 대구에서 다섯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달력 뒷장에 그림을 그려 동생들의 심심함을 달래주던 일이 평생의 업이 되었다. ‘고바우 영감’, ‘두꺼비’, ‘왈순아지매’를 보고 자란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시사 만화가를 꿈꾸며 서울행 완행열차에 탔다. 그때 탄 열차가 완행이어서 그는 다시 대구로, 지역신문사로, ‘아카데미 극장’ 간판 일로 전전했다. 벌이가 되는 일은 없었지만 만화를 계속 그렸다. 안의섭 선생이 만든 ‘소년 두꺼비’사를 거쳐 1969년에는 ‘만화왕국’에서 일하며 극화·약화체 만화를 그렸다. ‘쇠동이’를 그렸던 그때, 그의 이름은 ‘석일언’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우뚝 선 것은 1973년 ‘학원’에서 발표한 ‘아빠의 첫사랑’이었다. ‘장미소녀 로우즈’, ‘도화골 아가씨’ 등을 연달아 그렸다. 한동안 월간 여성지 ‘주부생활’, KBS 문화사업단의 아트디렉터, 월간 ‘KBS TV 유치원’ 창간 편집장 등을 역임하며 편집과 카툰 창작 활동을 병행했다. 1998년 부천만화정보센터 설립에 참여했고, 소장을 맡아 만화도시 부천의 입지를 다졌다. (사)한국만화가협회, (사)한국카툰협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202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으로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카툰작품집 ‘취생몽사’(2007), ‘하로동선’(2009), ‘색즉시공’(2010), ‘술’(2010), ‘만화가가 만난 만화가 조관제 만보(漫步)’(2021), ‘오늘도 사랑 덕분에 숨 붙어있다’(2021)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
필자 서찬휘는 만화 칼럼니스트로 만화와 그 주변 문화들의 흐름과 연결고리를 역사적 맥락에서 탐색하고 정리해왔다. 1998년부터 만화 정보 커뮤니티 ‘만화인’을 운영했고 한겨레신문, 일요신문, 인천일보, 국방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필자 송하원은 공공문화개발센터 유알아트 대표로 대안만화 전문서점 ‘홈통’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기획자이자 만화 연구자이며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금천문화재단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은 ‘만화가의 소울푸드’에서 한국 대표 만화가들이 사랑하는 음식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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