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독일 자동차 산업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이제 과장이 아니다. 한때 ‘메이드 인 저머니’의 상징이던 자동차 산업은 여전히 세계적인 기술력과 브랜드 파워를 보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전기차 전환, 중국 시장의 경쟁 심화, 높은 생산비, 공급망 재편이라는 여러 압력을 동시에 받고 있다.
특히 중국 시장의 변화는 독일 자동차 기업들에게 뼈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독일경제연구소(IW)에 따르면 독일의 대중국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수출액은 2022년 약 300억 유로(51.9조 원)에 가까운 수준에서 2025년 136억 유로(23.5조 원)로 줄었다. 3년 사이 54% 이상 감소한 셈이다. 독일자동차산업협회(VDA) 역시 독일 내 자동차 중견·중소 공급망 기업들의 투자 위축을 경고했다. 2026년 초 보도된 VDA 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72%가 독일 내 투자를 줄일 계획이라고 답했다.
변화는 개별 기업의 부침을 넘어 산업 구조 재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90년 이상 된 독일 자동차 부품사 에리히 예거(Erich Jaeger)는 2026년 4월 파산을 신청했고, 필터 제조사 만앤휴멜(MANN+HUMMEL)은 슈파이어 공장 폐쇄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 자동차 공급망이 비용 압박과 수요 변화 속에서 재조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독일 자동차 산업을 단순히 쇠퇴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금의 변화는 전통 제조기업들이 자신들의 혁신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과정에 가깝다. 완성차 기업들은 더 이상 자동차를 기계적 조립품으로만 보지 않는다. 소프트웨어, AI, 배터리, 반도체, 로보틱스, 순환경제 기술이 자동차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그 흐름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2026년 4월 BMW i 벤처스(Ventures)의 3억 달러 규모 신규 펀드 발표다.
#BMW i Ventures의 3억 달러 펀드가 의미하는 것
2026년 4월 29일 BMW그룹의 기업형 벤처캐피털인 BMW i Ventures는 3억 달러(4439억 원) 규모의 세 번째 펀드(Fund III)를 공식 발표했다. BMW그룹이 전액 출자한 이 펀드는 북미와 유럽의 Seed 단계부터 Series B 단계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투자하며, 핵심 투자 분야는 물리적 AI(Physical AI), 에이전틱 AI(Agentic AI), 산업용 소프트웨어, 제조 기술, 공급망 기술, 첨단 소재다.
발표에서 주목할 점은 BMW가 투자 대상을 단순히 전기차나 자율주행차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BMW i Ventures는 AI를 자동차 산업 전반의 ‘운영 계층’으로 본다. 공장 현장, 물류 네트워크, 엔지니어링, 글로벌 공급망에서 AI가 실제 생산성과 의사결정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보고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BMW i Ventures는 2011년 설립 이후 90개 이상 기업에 투자했고, 30개 이상 엑시트를 기록했다. BMW i Ventures의 주요 투자 및 엑시트 사례를 보면 투자 범위가 전력반도체, 충전 인프라, 제조 플랫폼, 자율주행 트럭, 위성 연결성, 산업 물류 자동화, 자동차 리테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AI까지 넓게 확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캐나다 오타와 기반의 질화갈륨(GaN) 전력반도체 기업 갠 시스템즈(GaN Systems)는 고효율 전력 변환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기업으로, 인피니언에 8억 3000만 달러(1.2조 원)에 인수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기반의 전기차 충전 네트워크 기업인 차지포인트(ChargePoint), 미국 메릴랜드 기반의 온디맨드 제조 마켓플레이스 기업 조메트리(Xometry), 미국 캘리포니아 기반 자율주행 트럭 기술 기업 코디악 로보틱스(Kodiak Robotics) 등은 상장 사례로 언급된다.
현재 포트폴리오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기반의 위성 직접 연결 통신 기업 스카일로(Skylo), 스위스 취리히 기반의 산업 물류용 자율주행 솔루션 기업 엠보테크(Embotech), 미국 캘리포니아 기반 자동차 리테일·딜러 운영 플랫폼 기업 테키온(Tekion), 독일 브레멘 기반 엔지니어링 자동화 및 AI 에이전트 기업 시네라(Synera) 등이 포함됐다. 이번 Fund III 조성으로 BMW i Ventures의 운용자산은 11억 달러(1.6조 원)에 이르렀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은 순환경제다. BMW i Ventures는 배터리와 핵심 소재 공급망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재활용, 핵심 소재 회수, 자원 효율형 신소재 기술에도 계속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ESG 차원의 접근만이 아니라, 원자재 접근성과 산업 회복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에 가깝다.
#독일 자동차 3사의 고민
BMW는 2025년 비교적 안정적인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 BMW그룹은 2025년 전 세계에서 246만 3715대의 차량을 인도해 전년 대비 0.5% 성장했다. 순수 전기차 판매는 44만 2072대로 3.6% 증가했고, 특히 유럽 내 순수 전기차 판매는 28.2% 증가했다. 다만 중국 시장에서는 판매가 12.5% 감소했다. 2025년 세전이익은 102억 유로(17.6조 원), 매출은 1335억 유로(230조 원)를 기록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상황은 더 어려웠다. 2025년 그룹 매출은 1322억 유로(228조 원)로 전년의 1456억 유로(251조 원)에서 줄었고, 조정 EBIT는 82억 유로(14조 원)로 2024년 137억 유로(23조 원) 대비 감소했다. 승용차 부문의 조정 EBIT도 48억 유로(8조 원)로 전년 87억 유로(15조 원)보다 낮아졌다. 회사는 중국 판매 부진, 가격 압박, 관세, 환율 영향 등을 주요 요인으로 설명했다. 전기차 판매에서도 2025년 승용 순수 전기차 판매가 16만 8800대로 전년 대비 9% 감소했다.
폭스바겐그룹은 2025년 전 세계에서 898만 대를 인도해 전년 대비 0.5% 감소하며 전체적으로는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지역별로 보면 유럽과 남미에서는 성장한 반면, 중국에서는 8% 감소했다. 순수 전기차 인도량은 98만 3000대로 32% 증가해 전동화 전환의 성과는 분명히 나타났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경쟁 심화로 전략 목표를 낮추고, 생산능력을 축소하고 공장을 재편하고 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폭스바겐은 2023년 이후 중국 내 생산능력을 150만 대 줄였고, 난징·우루무치·안팅 등 일부 공장을 매각, 폐쇄 또는 전환했다.
#독일 완성차 기업은 어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가
독일 자동차 기업들의 최근 스타트업 투자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BMW처럼 독립적인 CVC를 통해 장기 기술 트렌드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둘째, 폭스바겐처럼 특정 기술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규모 전략적 지분투자와 합작법인을 만드는 방식이다. 셋째, 메르세데스-벤츠처럼 스타트업 협업 플랫폼, 전략적 소수지분 투자, 내부 기술 스핀아웃을 병행하는 방식이다.
BMW는 BMW i Ventures를 통해 가장 전형적인 CVC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3억 달러 Fund III는 기존 모빌리티 투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조업 AI, 산업용 소프트웨어, 로보틱스, 공급망, 첨단 소재까지 투자 범위를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완성차 기업이 외부 스타트업을 단순한 협력사가 아니라 미래 산업 구조를 읽는 센서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폭스바겐그룹은 최근 3년간 대형 전략투자가 두드러진다. 2023년 폭스바겐은 중국 전기차 기업 샤오펑(Xpeng)에 약 7억 달러(1조 원)를 투자해 지분 4.99%를 확보하고 중국 시장용 지능형 전기차 공동 개발에 나섰다. 2024년에는 미국 전기차 기업 리비안(Rivian)과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플랫폼 개발을 위한 합작법인을 출범했으며, 2027년까지 리비안 및 합작법인에 최대 58억 달러*8.5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자체 소프트웨어 조직인 카리아드(CARIAD)의 어려움 이후 외부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이다.
폭스바겐그룹 내에서는 포르셰의 벤처 투자 활동도 별도로 주목할 만하다. 포르셰 벤처스(Porsche Ventures)는 2016년부터 활동해온 포르셰의 벤처캐피털 조직으로 슈투트가르트, 베를린, 텔아비브, 팔로알토, 상하이 등을 거점으로 운영된다. 포르셰에 따르면 이 조직은 약 30개 기업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간 투자 프레임워크는 1억 5000만 유로(2594억 원) 규모다.
메르세데스-벤츠는 BMW처럼 대규모 CVC 펀드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스타트업 협업 플랫폼과 전략적 기술투자를 병행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는 STARTUP AUTOBAHN 플랫폼을 통해 스타트업 기술을 발굴하고, PoC를 거쳐 실제 사업부와 연결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휴머노이드 로봇 기업 앱트로닉(Apptronik)과의 협력이 대표적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베를린 마리엔펠데 디지털 팩토리 캠퍼스에서 앱트로닉의 아폴로(Apollo) 로봇을 생산 현장에 테스트하고 있으며, 2025년에는 수천만 유로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2026년에는 앱트로닉의 5억 2000만 달러(8994억 원) 규모 투자 라운드에도 기존 투자자로 참여했다.
또한 메르세데스-벤츠는 2025년 실리콘밸리의 자율주행 반도체 개발팀을 아토스 실리콘(Athos Silicon)이라는 독립 회사로 스핀아웃했다. 이 회사는 자율주행차와 드론 등에 적용 가능한 저전력·고신뢰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는데, 메르세데스는 IP 이전과 함께 상당한 규모의 투자를 제공하고 소수 지분을 보유하는 구조를 택했다.
#자동차 기업이 왜 스타트업에 투자할까
이러한 흐름을 보면 독일 자동차 기업들의 스타트업 투자는 더 이상 홍보성 오픈이노베이션에 머물지 않는다. 투자와 협업의 목적은 비교적 분명하다.
첫째, 소프트웨어 역량을 외부에서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서다. 자동차가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으로 바뀌면서 기존 완성차 기업의 개발 방식만으로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폭스바겐의 리비안 투자와 샤오펑 협력이 이를 보여준다.
둘째, 제조 현장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BMW i Ventures의 AI 펀드, 메르세데스-벤츠의 앱트로닉 협력은 모두 공장, 물류, 품질관리, 엔지니어링에서 AI와 로보틱스를 활용하려는 시도다.
셋째,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다. 배터리, 희귀금속, 반도체, 첨단 소재는 자동차 기업의 전략적 취약점이 되었다. BMW가 순환경제와 첨단 소재를 투자 축으로 제시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중국 시장에 대한 대응이다. 독일 완성차 기업들은 중국을 단순한 판매 시장이 아니라 기술 경쟁이 가장 빠르게 전개되는 시장으로 본다. 로이터는 2026년 베이징 오토쇼를 앞두고 힐데가르트 뮐러 VDA 회장이 중국 자동차 시장을 ‘세계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시장’으로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독일 자동차 산업 전환은 아직 진행 중
독일 자동차 산업은 위기와 전환의 중간 지점에 서 있다. 전통적인 내연기관 중심의 경쟁력은 약해지고, 중국 시장에서의 우위도 예전처럼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BMW, 폭스바겐, 메르세데스-벤츠는 AI, 소프트웨어, 로보틱스, 첨단 소재, 순환경제 분야에서 외부 혁신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BMW i Ventures의 3억 달러 펀드는 이 변화의 상징적인 사례다. 자동차 기업이 더 이상 자동차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제조 운영체제와 공급망 지능, 소재 순환 구조까지 설계해야 하는 기업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기업과 스타트업이 주목해야 할 지점도 여기에 있다. 독일 자동차 기업들이 지금 찾고 있는 것은 완성차와 직접 경쟁하는 기업만이 아니다. 공장의 생산성을 높이는 AI, 엔지니어링 자동화, 산업용 로보틱스, 공급망 최적화, 배터리 재활용, 첨단 소재, 차량 내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인프라처럼 자동차 산업의 보이지 않는 기반을 바꾸는 기술이다. 한국 스타트업이 유럽 자동차 산업과 협력하려면 ‘자동차를 위한 기술’이라는 좁은 정의를 넘어, 제조업 전체의 비용·속도·공급망 문제를 해결하는 B2B 기술 기업으로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 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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