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스위스 취리히 외곽의 격납고. 선글라스를 낀 24세 청년이 관중을 향해 외친다. “자, 싸울 준비를 해(Let‘s get ready to rumble).” 말을 한 사람은 취리히연방공과대학교(ETH) 로보틱스 클럽 학생회장 데클런 샤인(Declan Shine)이다. 지난 3월 말 이곳에서 유럽 최초로 로봇 복싱 이벤트가 열렸다. 링 위에는 두 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오르고, 링 안에는 각각의 로봇을 게임패드로 조종하는 인간 오퍼레이터가 함께 섰다.
그런데 링 위에 오른 로봇은 스위스산이 아니었다. 중국 유니트리(Unitree)가 만든 제품이었다. 이 행사는 지금 휴머노이드 산업의 현실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제조는 중국, 응용은 유럽
유니트리는 2025년 휴머노이드 5500대를 출하했고, 2026년에도 물량을 확대하고 있다. G1 모델의 공식 가격은 1만 3500달러(2036만 원)부터 시작한다. 하드웨어의 단가를 빠르게 낮추고 출하량을 키우는 게임에서 중국은 이미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유럽은 이 경쟁에 정면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취리히 현장에서 학생들이 관심을 쏟은 것은 로봇 본체가 아니라 로봇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할 수 있는가였다.
행사는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됐다. 복싱 경기와 그보다 앞서 48시간 전부터 진행된 해커톤이다. 해커톤의 규모가 이 행사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유럽 주요 공대생 500명이 지원했고, 그 중 50명이 선발됐다. 오픈AI(OpenAI), 오픈소스 인공지능 플랫폼의 상징인 허깅페이스(Hugging Face), 그리고 실리콘밸리 대표 VC인 제너럴 카탈리스트(General Catalyst)까지 후원에 이름을 올렸고, 대회 상금도 총 1만 달러(1500만 원) 규모로 걸렸다. 무대에는 유럽 VC인 스타트 파운데이션(START Foundation) 공동대표 세바스티안 노보트니(Sebastian Novotny), 취리히연방공대 AI센터 공동 디렉터 겸 COO 멜라니 가브리엘(Melanie Gabriel), 스위스 VC 파운더풀(Founderful)의 파트너 에도 트레카니(Edo Treccani) 등 유럽 테크 생태계의 투자·연구·운영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함께했다.
참가자들의 몰입도도 눈에 띄었다. 격납고 밖의 캠핑카에서 자면서 시간을 아낀 학생도 있었다. 행사장 안 한편에는 에어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새벽 3시까지 테크노음악이 울렸다.
8개 팀은 48시간 동안 로봇에 새로운 기능을 입히는 실험을 했다. 한 팀은 왓츠앱 명령으로 로봇을 제어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우승 팀은 밤을 새워 로봇이 콜라 캔을 집어 올리도록 동작을 훈련시켰다. 데모 당일 로봇은 캔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떨어뜨렸다. 또 다른 팀은 음성과 텍스트 명령을 확산 모델로 변환해 휴머노이드가 실제 동작을 수행하게 하는 오픈소스 파이프라인 드림모션(DreamMotion)을 개발했다. 한 팀은 로봇이 노인의 장보기를 대신하는 시나리오를 피칭했다. 데모 당일 로봇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진지했다.
경기 중 관중석에서도 비슷한 대화가 오갔다. “로봇 복싱이 대중화되면 냉각 솔루션이 필요하다”, “베팅 플랫폼을 붙일 수 있겠다”는 식이었다. 로봇을 구경하면서도 응용 비즈니스를 계산하는 태도, 이것이 지금 취리히의 분위기다.
행사를 주최한 로보틱스 클럽의 후원사 목록도 생태계가 이 일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준다. 엔비디아, 오픈AI, 테슬라가 이름을 올렸고, 스폰서 중 하나인 스위스 배송 로봇 스타트업 리브르(Rivr)는 행사 며칠 전 아마존에 인수됐다.
#취리히, 유럽 로보틱스의 가장 뜨거운 무대
취리히연방공대는 유럽에서 스핀오프 배출로 손꼽히는 대학이다. 이 학교에서 나온 로보틱스 기업들로는 산업 설비 점검용 4족 보행 로봇 기업 애니보틱스(ANYbotics), 휴머노이드 손의 정밀 동작을 개발하는 미믹 로보틱스(Mimic Robotics), 물류용 로봇 솔루션을 만드는 플링크 로보틱스(Flink Robotics)가 있다. 유럽 스타트업 전문 매체 시프티드(Sifted)에 따르면 2025년 초 이후 취리히에서만 로봇 관련 기업 12건이 거래됐다. 유럽 전체 도시 중 가장 많은 수치다. 취리히는 총 투자액 기준으로는 캠브리지, 뮌헨, 파리에 미치지 못하지만, 투자자들이 거래를 발굴하러 오는 도시로는 가장 주목받고 있다.
이 생태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 중 하나가 취리히연방공대의 플렉션 로보틱스(Flexion Robotics)다. 엔비디아 출신 연구자들이 세운 이 스타트업은 휴머노이드 로봇의 ‘두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5000만 달러의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했다.
이들의 전략은 단순하다. 하드웨어는 유니트리 등 기존 제품을 그대로 쓰고, 그 위에 올라가는 소프트웨어 인텔리전스만 만든다. 하드웨어가 하나의 범용 플랫폼이 되면, 진짜 경쟁은 누가 그 수백만 대의 로봇에 기능하는 두뇌를 먼저 공급하느냐의 싸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이번 해커톤(HACK2026) 행사의 스폰서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작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로봇이었다. 격납고 한쪽 주방에는 냉장고 크기의 크레페 제조 로봇이 하루 종일 100개 넘는 크레페를 실패 없이 만들어냈다. 이 로봇은 스위스 바젤에 기반을 둔 발명가 로베르트 헤니히(Robert Hennig)가 지난해 8월부터 혼자 개발한 것인데, 시제품이 아니라 당장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범용 휴머노이드가 아직 불안정한 동작을 반복하는 사이, 특정 작업에 특화된 로봇은 이미 실용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단일 행사를 넘어 범유럽 네트워크로
이 행사가 남긴 가장 눈에 띄는 결과물 중 하나는 로봇 복싱이 아니라 조직의 탄생이었다. HACK2026를 계기로 2500명 규모의 유럽학생로보틱스협회(ESRA, European Student Robotics Association)가 출범했다. 취리히연방공대, 뮌헨공대(TU Munich), 로잔공대(EPFL), 왕립공대(KTH), 빈공대(TU Wien), 폴리테크니코 디 밀라노(Politecnico di Milano) 등 8개국 10개 이상의 대학 로보틱스 학생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범유럽 네트워크가 결성됐다. 유럽의 로보틱스 학생 생태계가 대학 단위의 분산된 활동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는 협력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유럽의 전략이 한국 기업에 던지는 질문
취리히에서 벌어진 일을 정리하면 유럽의 휴머노이드 전략은 방향이 비교적 명확하다. 범용 로봇의 대량 생산보다 산업 점검·물류 자동화·라스트마일·인간 친화 인터페이스 같은 세부 응용 영역을 먼저 장악하는 방식이다. 아마존에 인수된 리브르와 플렉션의 소프트웨어 우선 전략은 이 흐름의 두 가지 표현이다. 하드웨어는 이미 있다. 문제는 그 위에서 어떤 기능이 실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느냐다.
한국 기업이 유럽 로봇 시장을 볼 때 이 지점을 놓치기 쉽다. 유럽은 흔히 ‘기술은 좋지만 시장화가 느린 곳’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취리히 현장이 보여준 것은 달랐다. 시장화가 느린 것이 아니라 시장 진입 문법이 다른 것에 가깝다. 기술 설명보다 사용 현장의 설명이 중요하고, 어떤 규제 환경에서 어떤 작업자를 대신하고 어떤 운영 KPI를 개선하는지가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 대학 연구실에서 시작해 학생 클럽, 해커톤, 스핀오프, VC, 산업 파일럿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럽 시장은 늘 닫혀 있는 듯 보인다. 이제 그 흐름이 단일 대학을 넘어 범유럽 학생 네트워크 단위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변화다.
유럽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이라면 ‘완성형 로봇 제조사’보다는 이미 깔리고 있는 글로벌 하드웨어 위에 산업별 소프트웨어·AI·운영 체계를 얹는 사업자로 접근하는 쪽이 현실적인 진입 방식일 것 같다. 제조 현장 안전 점검, 물류창고 피킹, 비전 기반 검사, 산업별 데이터 관리 플랫폼 같은 영역이 그 후보다. 취리히에서 플렉션이 보여준 것처럼,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 두뇌가 오히려 유럽 시장에서 더 빠르게 통할 수 있다.
행사가 끝날 무렵, 뮌헨공대 로보틱스 클럽 공동창업자 플로리안 슈뢰더스(Florian Schroeders)는 “우리가 다음 유니콘을 만들 사람들이다”라고 외쳤다. 링 위의 로봇은 중국산이었어도, 그 로봇을 가지고 응용 비즈니스를 계산하고 오픈소스 파이프라인을 밤새 짜던 사람들은 유럽의 대학생들이었다. 이제 그 학생들이 국경을 넘어 연결되기 시작했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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