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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의 소울푸드] 그림은 손맛, 음식은 함께 먹는 맛

'임꺽정' '머털도사' 한국적 정서 그려낸 '대가' 이두호 작가, 지금도 매일 치열하게 만화를 그린다

2026.05.15(Fri) 10:05:28

[비즈한국] 이두호 선생의 만화를 보다 좋아하게 된 음식들이 있다. 또매를 약 올리는 머털이의 꿀 약과, 차손이가 좋아하던 장국밥, 가도치의 어죽, 임꺽정의 탁주 한 동이. 또래보다 구식 입맛이 된 책임의 8할이 그의 만화에 있어 한껏 기대하고 그에게 ‘맛’을 물었더니 돌아오는 말이 심드렁하다.

 

“난 가리는 것 없어요.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주는 대로 먹고, 가리지 않고 먹는 1943년생. 또 보릿고개다. 해방 전에 태어나 한국전쟁 때 일들을 선연하게 기억하는 이에게 바라기 어려운 답이었을까. 보릿고개에 칼럼마저 굶길 수는 없어 초근목피 구하는 심정으로 주변을 탐문하니 그래도 소고기를 잘 드셨다고 한다. 그래, 그는 ‘임꺽정’을 그렸지.

 

경기도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있는 이두호 선생의 작업실. 벽 하나에 그가 그린 작품 표지들과 일러스트레이션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경기도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있는 이두호 선생의 작업실을 찾았다. 머털이를 채색하고 있던 그가 펜을 내려놓고 우리를 맞는다. 작업실을 둘러보니 벽 하나에 책이 가득하다. ‘우리말 대사전’, ‘한국사 대사전’, ‘한국 민족 대백과사전’을 비롯해 인문·자연유산, 전통문화, 전기 등의 자료가 즐비하다. 조선시대를 질감 있게 재현한, “각주를 다는 만화가”의 서가는 민속학자의 그것과 진배없었다. 

 

다른 벽은 층층으로 줄을 지은 그림이다. ‘덩더꿍’, ‘임꺽정’, ‘내 이름은 장바우’, ‘머털도사와 또매형’ 등 그가 그린 작품 표지들과 일러스트레이션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CG를 넘어 이제 AI 생성 이미지의 시대라지만 장맛은 여전히 손맛이다. 손으로 그린 그의 그림이 오래도록 눈길을 잡아끈다.

 

#“내가 평민이니까”

 

몰락한 양반도 더러 있긴 하지만, 그의 작품 주인공은 대부분 민초들이다. 천대와 멸시의 대상이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는 주체가 된다. 창작할 때 민중의 저항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자신이 평민이기에 자연스레 그리되었다고 했다.

 

평민은 한솥밥을 지어 같은 상에 모여 먹는 이들이다. 양반들이 네모진 교자상을 하나씩 받아들 때 평민은, 그의 작중 인물들은 초가삼간 구들방이든 장터 주막 봉놋방이든 개다리소반, 두레상 하나를 두고 모인다. 만화 ‘키라라의 일’에서 식사를 “생명을 이어가는 일”이라고 했던가. 이들에게 밥상은 생명을 함께 잇는 연대의 근본이다.

 

고기 한 점, 탁주 한 사발도 함께. ‘임꺽정’의 작가 이두호는 작품마다 밥상을 그려 민초들을 불러 앉혔다. 사진=필자 제공


어머니의 밥상에서 사람 됨됨이를, 차릴 것 없는 자취방에서 배고픔을 배운 그는 작품마다 밥상을 그려 사람들을 불러 앉혔다. 넉넉지 않은 상이라도 굶는 이는 없다. 물 한 그릇이라도 같이 먹은 이들이 낫도 들고, 산도 넘었다. 

 

#“먹은 게 없으면 사람은 추해진다”

 

굶는 이 없이 같이 먹어야 식구고 공동체라는 생각은 그가 속한 세대의 공유된 인식일지 모른다. 이두호가 몸담은 만화가들의 낚시모임 ‘심수회’에서 수해가 났던 1987년과 1990년 상당한 금액을 수재의연금으로 낸 적 있다. 

 

“내세우려던 것은 아니고. 먹는 게 사실 생활의 근본이잖아요. 이런 일(수해)이 있으니까 ‘저 사람들 굶는 것 아니냐’ 했죠. 사람들 굶지 않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자 했던 거죠. 나도 경험했지만, 먹는 것이 없으면 사람이 추해져요. 그래서 먹는 문제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도덕성도 생기고 평화도 유지돼요.” 같이 먹고, 함께 굶어본 보릿고개 세대의 작가들다운 생각이었다.

 

#심수회 추억

 

부천 상동의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기며 선생에게 민물매운탕은 안 좋아하시는지 여쭈었다. 천렵 끝에 벙거지를 뒤집어 끓이는 민물매운탕을 그렇게 맛깔나게 그리셨으니, 다음에 같이 가자 청할 요량이었다. 또 소문난 낚시 애호가인 그가 소울푸드로 민물매운탕을 꼽지 않은 까닭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의 답은 여전히 보릿고개를 넘지 못했지만, 대신 그의 낚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낙동강 어귀에서 자란 그는 소싯적 형들에게 낚시를 배웠다. 이제껏 안 가본 낚시터가 없을 정도인데, 만화가 낚시모임인 ‘사다리회’, ‘심수회’, ‘비린내회’ 중에 ‘심수회’와 ‘비린내회’ 두 곳에 발을 담갔다. ‘로봇 찌빠’와 ‘도깨비 감투’를 그린 고(故) 신문수 선생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심수회는 사십여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데, 돈을 갹출해 낚시터를 사들이려 했을 정도니 그들의 낚시 사랑을 알고도 남음이다. 세월이 흘러 구성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난 지금도 2세들이 선친들의 작품을 모아 합동 전시를 여는 등 의미 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슥슥, 이두호 작가가 즉석에서 그려준 임꺽정. 그림에 힘이 넘친다. 사진=필자 제공


신문수 선생이 남긴 심수회 조사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두호 선생을 가장 폼이 좋은 진정한 낚시꾼으로 묘사했다. 선생은 2009년 ‘낚시 춘추’와의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낚시를 일로 삼고 싶지 않아서 낚시 만화는 그리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낚시와 만화의 공통점을 ‘엉덩이론’으로 연결 지으니, 이는 곧 둘 다 엉덩이로 하는 일이란 뜻이다.

 

#만화는 엉덩이로 그린다

 

그는 1980년대부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만화를 본격적으로 그려왔다. ‘바지저고리 만화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국적인 정서,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했지만, 그것은 작가의 치열함, 신념이었다. 2001년부터 이현세 작가와 ‘지옥캠프’를 이어오며 후배 신인 작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 치열함 아닐까. 

 

아직도 자신의 이전 작업을 뜯어보면서, 누구보다 오래 작업했지만 작품 자체를 놓고 보면 부끄럽다고, 그때 더 치열하게 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제는 ‘장난’이나 하는 수준이라지만 여전히 엉덩이를 떼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형형한 눈빛에서 드러나는 향상심이 불초한 후배들에게 화두를 던진다.

 

선생이 낚시를 하러 자주 찾았다던 파로호의 풍경을 노래한 김영남의 시 ‘가을 파로호’의 한 구절처럼 선생은 큰 호수를 이루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담아내는 더 큰 호주머니가 될 마음인가 보다.​ 

 

누구보다 오래 작업했지만 작품 자체를 놓고 보면 부끄럽다고, 그때 더 치열하게 해야 했다고, 대가 이두호는 말한다. 사진=필자 제공


잘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접시에 담아드렸더니, 선생이 “정말 술 안 마실 거야?” 물으신다. 술을 좋아하셨던 선친 때문에 술이 원수 같았지만, 취한 적 없이 잘 드셨다는 이야기의 앞 토막만 새겨들은 탓에 술 주문을 부러 안 했던 차였다. “고소원이나 불감청이로소이다.” 그의 만화에서 배운 말을 얼른 써먹고 막걸리를 주문한다. 고기 한 점 탁주 한 사발. 역시나 그의 만화에서 배운 풍류다.

 

이두호 선생은 1943년 낙동강 어귀의 경상북도 고령에서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나 한국전쟁이 나던 해까지 그곳에 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대구로 옮겨와 거기서 내내 학교를 다녔는데, 어릴 적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며 사생대회를 휩쓸었다. 일생의 스승이 된 미술 교사 남무오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다. 스승을 따라 일찌감치 자신의 길을 미술로 정하고 낮에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만화 ‘피리를 불어라’(1958), ‘길’(1959), ‘등불’(1959), ‘태양을 향하여’(1959)를 연달아 발표하며 프로 작가가 되었지만, 미술의 꿈에는 흔들림 없었다. 그렇게 1964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 만화 일을 끊고 학업에 매진하고자 하였으나 생계가 발목을 잡았다. 군 제대 후 학교를 중퇴하고 만화가 박기정의 문하에 들어가 만화 스토리 구성과 연출 등을 배웠다. 그가 평생의 스승으로 남무오, 박기정 두 선생을 꼽는 이유다. 

 

1969년부터 만화판을 종횡무진하며 만화를 그렸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공허함이 점점 커졌다. 당시의 만화 창작이 외국 영화나 드라마, 일본 만화를 가져와 다시 그리는 일이었던 탓도 크다. 솜씨 좋은 그는 그런 만화도 잘 그렸지만, 허무함은 지우지 못했다. 결국 1978년 해오던 연재를 한희작 작가에게 맡기고 그는 2년간 회화 공부에 매진했다. 이 시기를 그는 미술에 대한 ‘살풀이’였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애태웠던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만화판으로 돌아온 그는 역사만화 창작에 몰입했다. 우리 만화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고민이 작품마다 점철되었고, 그렇게 선생은 “바지저고리 작가”가 되었다. 곰삭은 토속의 맛, 우리의 말맛을 그의 만화에서 배우게 된 까닭이다. 

 

선생이 1997년 세종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시작한 여름 방학 만화 합숙 훈련 ‘지옥캠프’는 실제 수작업 원고를 완성하는 과정을 선생 본인도 직접 원고 마감을 치르면서 보여준다. 입소문을 타 이제는 모든 만화학도들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청소년보호법 사태가 한창 만화계를 세차게 좀먹던 시기에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만화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비상대책위 공동위원장 등을 맡으며 한국만화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앞에 나서는 일을 불편해하면서도 한국만화가 필요로 하는 그 자리에 늘 서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선생에게 후학들은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세종대 정년퇴임 때 제작된 헌정 다큐멘터리 제목)이라 하였다. 

 

선생은 우리 것을 그리는 쪽으로 방향을 튼 이래 ‘암행어사 허풍대’(1980), ‘내 이름은 장바우’(1983), ‘배지기’(1984), ‘애꾸눈과 나그네’(1984), ‘도사님, 도사님 우리 도사님’(1984), ‘째마리’(1985), ‘머털도사님’(1985), ‘덜거덕 덜거덕’(1986), ‘덩더꿍’(1987), ‘임꺽정’(1991), ‘두손이’(1993), ‘가라사대’(2008) 등 수많은 작품을 끊임없이 그려냈다. 하지만 대가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팔순의 노 작가는 여전히 그림에 욕심을 낸다. 벽에 걸어놓은 그림, 철해놓은 옛 작업물을 펼치며 계속해서 복기하는 모습은 선생의 작업이 어떤 종류의 치열함에서 나왔나를 실감케 한다. 

 

필자 서찬휘는 만화 칼럼니스트로 만화와 그 주변 문화들의 흐름과 연결고리를 역사적 맥락에서 탐색하고 정리해왔다. 1998년부터 만화 정보 커뮤니티 ‘만화인’을 운영했고 한겨레신문, 일요신문, 인천일보, 국방일보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썼다. 필자 송하원은 공공문화개발센터 유알아트 대표로 대안만화 전문서점 ‘홈통’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기획자이자 만화 연구자이며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금천문화재단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만화가의 소울푸드’에서 한국 대표 만화가들이 사랑하는 음식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

서찬휘 만화칼럼니스트

iam@seochanhwe.com

송하원 대안만화 전문서점 홈통 공동대표

solchan19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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