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 가운데 하나는 외계 생명체 로키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로키가 속한 에리디언 종족은 인간처럼 눈으로 빛을 직접 보는 게 아니다. 그들은 빛을 시각이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번역해주는 도구를 통해 별을 이해한다. 에리디언에게 별빛은 인간이 생각하는 암흑물질이나 중력파와 비슷한 대상일지도 모른다. 신체의 감각기관으로는 직접 느낄 수 없지만, 정교한 장치를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로키가 도구를 통해 별을 보고 우주로 나아가듯, 인간 역시 보이지 않는 우주를 도구를 통해 감각한다. 특히 중력파는 인간의 몸이 직접 느낄 수 없는 시공간 자체의 떨림이다. 어쩌면 에리디언 종족에게는 별빛보다 오히려 중력파가 더 자연스러운 개념일 수도 있다. 빛을 직접 보지 못하는 문명이라면, 우주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전자기파가 아니라 공간의 진동일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은 그 떨림을 느끼기 위해 거대한 장치를 만들었다. 수 킬로미터 길이의 레이저 간섭계를 지구 위에 세우고, 거울과 진공관과 레이저를 이용해 시공간의 극히 미세한 변형을 측정한다. 인간의 몸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을 지구 문명 전체가 하나의 감각기관이 되어 대신 느끼는 셈이다. 현대 천문학은 망원경으로 빛을 보는 학문을 넘어, 우주가 남긴 진동과 입자와 중력의 흔적을 읽는 학문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 이 거대한 감각기관은 우주론 전체를 뒤흔들지도 모르는 매우 이상한 신호를 포착했다. 만약 이 신호에 대한 해석이 사실이라면, 인류는 빅뱅 직후 우주가 남긴 가장 오래된 블랙홀의 흔적을 본 것일 수 있다. 우주가 탄생한 뒤 몇 분이나 몇 초 뒤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원시 블랙홀의 흔적이다. 더 나아가 이 신호는 암흑물질의 기원과도 연결될 수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라이고(LIGO), 비르고(VIRGO), 카그라(KAGRA)는 우주의 떨림을 들었다. 중력파 검출기들이 주로 포착한 사건은 서로를 공전하던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이 마지막 순간에 충돌하며 남긴 격렬한 시공간의 흔적이었다. 지금까지 검출된 대부분의 중력파 사건은 대체로 현재의 별 진화 이론으로 설명 가능한 질량 범위 안에 있었다. 거대한 별이 태어나고, 진화하고, 폭발하고, 그 잔해로 남은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이 다시 서로 충돌하면서 중력파를 방출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관측된 중력파 가운데 태양보다 훨씬 가벼운 천체가 만든 신호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현존하는 중력파 검출기가 주로 태양 질량 이상의 무거운 천체가 만든 떨림에 민감하다는 점은 천문학자들에게 중요한 한계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별의 죽음으로 만들어지는 블랙홀은 보통 태양보다 훨씬 무겁다. 적어도 태양보다 질량이 가벼운 블랙홀은 평범한 항성 진화만으로는 만들기 어렵다.
따라서 만약 태양보다 가벼운 블랙홀의 흔적이 발견된다면 빅뱅 직후 우주가 직접 만든 원시 블랙홀일 가능성이 높다. 원시 블랙홀은 별이 죽어서 만들어진 블랙홀이 아니다. 그것은 별과 은하가 존재하기도 전에, 우주가 극도로 뜨겁고 조밀하던 시기 밀도 요동이 직접 중력을 붕괴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025년 11월 12일 LIGO, VIRGO, KAGRA 검출기가 포착한 것으로 알려진 중력파 신호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 신호는 원시 블랙홀 두 개가 병합하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분석 결과 두 천체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태양보다 질량이 가벼울 확률이 99%를 넘는다는 해석이 나왔다. 추정 질량 범위는 대략 태양 질량의 10%에서 80% 안팎에 해당하는 매우 가벼운 영역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중력파 신호와 동시에 대응되는 전자기파 신호가 관측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시광선은 물론 X선이나 감마선에서도 뚜렷한 동반 신호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이 사건이 빛을 거의 남기지 않는 조밀한 천체, 특히 블랙홀의 병합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물론 아직 이 신호가 천체물리학적 사건으로 완전히 결론 난 것은 아니다. 분석이 진행될수록 우연한 잡음일 가능성은 낮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매우 신중하게 검증해야 하는 단계다.
그럼에도 천문학자들이 이 사건을 주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만약 이 신호가 실제 천체물리학적 사건에서 비롯되었고, 그 정체가 태양보다 가벼운 블랙홀이라면, 인류는 일반적인 별의 진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질량 범위의 블랙홀을 발견한 셈이 된다. 물론 블랙홀보다 조금 더 가벼운 중성자별이나,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고밀도 천체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평범한 항성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는 익숙한 설명만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임은 분명하다.
원시 블랙홀의 가능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주의 가장 이른 시기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원시 블랙홀은 초신성 폭발도, 별의 핵융합 진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주가 아직 뜨거운 플라즈마 상태였을 때 어떤 영역이 주변보다 조금 더 밀도가 높았다면, 그 영역은 자체 중력에 의해 직접 붕괴했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블랙홀은 별의 질량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다. 이론적으로는 소행성만큼 가벼운 질량부터 초대질량 블랙홀에 가까운 거대한 질량까지 다양하게 분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원시 블랙홀은 오래전부터 암흑물질 후보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었다. 암흑물질은 빛을 내지도 흡수하지도 않지만, 중력을 통해 은하와 은하단의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미지의 성분이다. 만약 우주 초기에 수많은 원시 블랙홀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그 일부가 암흑물질의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있다.
이번 논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원시 블랙홀의 형성 모형이다. 우주 초기에는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 전자기력 같은 기본 상호작용의 물리 조건이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우주가 식어가는 과정에서 특정한 전이 시기가 있었고, 그때 밀도 요동이 증폭되면서 원시 블랙홀이 집단적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된다. 이 모형에서는 원시 블랙홀의 질량 분포가 넓게 퍼질 수 있기 때문에, 태양 질량보다 가벼운 블랙홀도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이번에 보고된 중력파 신호의 형태는 이러한 가벼운 원시 블랙홀 개체군 모형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연구자들은 원시 블랙홀의 질량 분포와 병합 가능성을 적용했을 때, LIGO, VIRGO, KAGRA 검출기에서 이와 같은 원시 블랙홀 충돌 신호가 연간 대략 0.8건에서 8건 정도 검출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매우 높은 빈도는 아니지만, 전혀 불가능한 사건도 아니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이 신호가 실제로 원시 블랙홀의 병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원시 블랙홀은 우주 전체 암흑물질의 적어도 약 4%를 차지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는 암흑물질 전체가 원시 블랙홀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암흑물질 가운데 일부가 원시 블랙홀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해석이 맞다면 암흑물질의 정체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암흑물질은 단 하나의 새로운 기본입자로 이루어진 단순한 성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일부는 원시 블랙홀이고, 또 일부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입자이며, 또 다른 일부는 물리적 기원이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우주의 보이지 않는 질량은 하나의 답으로 정리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어두운 성분이 뒤섞인 복합적인 구조일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기존에 LIGO, VIRGO, KAGRA가 검출한 태양 질량의 수배에서 수십 배, 혹은 그보다 더 무거운 블랙홀의 병합 사건 가운데 일부도 원시 블랙홀의 충돌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중력파 사건을 항성질량 블랙홀의 병합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우주 초기에 형성된 원시 블랙홀 개체군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중 일부는 오늘날의 중력파 관측망에 이미 포착되었을 수도 있다.
인류는 매우 묘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우주를 다양한 번역 장치를 통해 감각한다. 망원경은 가시광선을 넘어 전파, 적외선, X선, 감마선을 번역해주고, 중력파 검출기는 시공간의 떨림을 숫자와 파형으로 바꾸어준다. 로키가 질감으로 별빛을 읽듯, 인간은 레이저와 거울과 진공관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장치를 통해 보이지 않는 우주의 진동을 읽는다.
그 번역 장치를 통해 인류는 너무 가벼워서 존재하기 어렵다고 여겼던 블랙홀의 희미한 흔적까지 찾으려 하고 있다. 그것이 정말 빅뱅 직후의 원시 블랙홀이 남긴 목소리라면, 우리는 우주의 가장 오래된 비밀이 처음으로 소리를 내는 순간 가까이에 서 있는 셈이다. 빛보다 먼저, 별보다 먼저, 은하보다 먼저 존재했을지 모르는 블랙홀이 138억 년이 지난 지금 시공간의 떨림으로 자신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중력파의 진동을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에리디언 문명이 있다면, 그들에게 우주는 결코 고요한 공간이 아닐 것이다. 블랙홀과 중성자별이 충돌할 때마다 우주는 낮게 울리고, 은하 깊은 곳에서 발생한 거대한 병합의 흔적은 시공간 전체를 통해 퍼져 나갈 것이다. 그들에게 밤하늘은 빛나는 점들의 풍경이 아니라, 끝없이 떨리고 울리는 거대한 진동의 바다일지도 모른다.
로키가 처음으로 별의 존재를 이해했듯, 인간 문명 역시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암흑물질과 시공간의 떨림을 감각하려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우리는 이제 우주를 보는 문명을 넘어, 우주의 진동을 듣고 해석하는 문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 떨림 속에는 별이 태어나기 전 우주가 남긴 가장 오래된 기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세종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조교수로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날마다 우주 한 조각’, ‘별이 빛나는 우주의 과학자들’, ‘갈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우주를 보면 떠오르는 이상한 질문들’ 등의 책을 썼으며,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퀀텀 라이프’, ‘코스미그래픽’ 등을 번역했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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