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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국가부도의 날' 불러온 재계 14위 한보그룹의 불법대출

대통령 차남에까지 이어진 전방위 불법 로비…5조원 못 갚아 부도나며 외환위기 서곡 울려

2020.08.06(Thu) 15:23:22

[비즈한국] “야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되지? 니들이 정치권 로비에 억지로 끌어온 수조 원 때문에 나라 망하게 생겼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에 불붙인 거야 니들이.”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이 한보그룹 재무팀에게 하는 대사다.

 

정치권 로비를 통해 은행권에서 무리하게 대출을 받으며 재계순위 14위까지 올랐던 한보그룹은 1997년 1월 부도를 맞게 된다. 한보그룹의 빚은 5조 원에 달해 은행권의 자금 순환이 안 될 정도로 막대했으며 1997년 외환위기 시작의 방아쇠 역할을 하게 됐다.

 

1997년 국회 한보국정조사특위 위원들이 한보제철 당진제철소를 방문해 건설과정 등을 조사하고 있는 모습. 사진=비즈한국 DB


#“흙과 관련된 사업하면 성공” 점쟁이 말로 탄생한 한보그룹

 

1951년부터 1970년 초반까지 세무공무원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정태수는 1969년 가을 점쟁이로부터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태준에서 태수로 이름을 바꿀 정도로 역술에 관심이 많던 그는 점쟁이의 말대로 ‘흙’에 매료되어 등산을 하며 사업 대상을 찾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정태수는 일제 시절 폐광이 된 강원도의 몰리브덴 광산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헐값에 매입해 1974년 한보상사를 설립하며 수출로 사업을 시작한다.

 

한보그룹의 시초인 한보상사를 설립한 후 1976년 한보주택으로 건설업에 뛰어들며 아파트 건축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1975년 정태수 회장은 구로구에 영화아파트를 지어 돈을 번 뒤 1979년 9월에는 대치동에 은마아파트를 지었다. 때마침 안전자산으로 부동산이 인기를 얻으며 은마아파트는 20일 만에 전 세대인 4424가구를 분양했다. 정 회장은 2000억 원이라는 돈을 손에 쥐며 그룹 성장의 발판을 다지게 된다.

 

은마아파트 상가 내부에 자리 잡았던 한보그룹 본사. 사진=비즈한국 DB


이후 19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 한보종합건설로 상호를 변경하며 몸집을 키웠고, 1981년 한보그룹 총괄비서실을 마련해 기업 집단의 면모를 갖췄다. 이후 태화방직과 금강철강, 한보선물, 한보관광, 상아제약, 세양선박 등을 인수하며 계열사를 확장해나갔다.  

 

#대한민국의 타고난 로비스트?

 

1989년 3월 21일 서울특별시는 강남구 수서동, 일원동 일대를 ‘수서택지개발지구’로 지정했는데, 국가 또는 민간업자가 개발해 일반에 공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강남이라는 지리적·경제적 특성상 여러 단체가 조합을 결성하고 특별공급을 청원하는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1990년 2월 4일 청문회장에 출석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사진=우태윤 기자


당시 건설부(현 국토교통부)와 서울특별시는 특별공급은 불가능하다고 지속적으로 입장을 밝힌 상태였다. 하지만 약 2년 만에 입장을 바꾸어 공공용지 3만 5500평을 26개 주택조합에 특별 분양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에는 정 회장이 정관계에 벌인 엄청난 액수의 로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택지공급을 받은 조합에 농협, 경제기획원, 서울지방국세청, 언론, 군부대 등 영향력 있는 세력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정 회장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었다. 시공사는 한보주택이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특혜의혹이 확산됐다. 

 

당시 고건 서울시장은 원칙을 고수하면서 정 회장에게 로비를 받은 정관계 인사들의 불법 분양 외압에 맞서다 경질된다. 정 회장의 로비가 서울시장을 바꿀 정도로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건설부, 서울시, 정치권에 있던 수많은 인사들이 옷을 벗게 됐다. 정 회장 역시 이로 인해 1991년 경영에서 물러났고, 뇌물공여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또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당시, 수서사건 때 정 회장에게 비자금 150억 원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정 회장의 뇌물이 당시 대통령한테까지 흘러간 것이다. 

 

#외환위기의 신호탄, 한보철강

 

3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정 회장은 ​한보그룹 총회장으로 복귀한다. 이후 상아제약 인수, 1995년 유원건설 인수, 1996년 시베리아 가스전과 당진제철소 개발 등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 나선다.  

 

당시 당진제철소 부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선박이 드나들기 힘들어 제철소에 적합한 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보그룹이 요청한 지 9개월 만에 매립 허가가 났다. 검증받지 않은 기술과 안정성 검사 등이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됐다. 

 

2조 2800억 원의 투자금을 염두하고 제철소 개발이 시작됐지만, 비용은 2년 만에 5조 7000억 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됐다. 정부와 은행단은 사업성에 대한 엄격한 평가와 견제도 없이 한보그룹에서 요청한 만큼의 자금을 계속 지원해줬다. 이번에도 역시 정 회장의 로비가 배경에 있었다. 정관계와 금융권을 향한 정 회장의 로비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에게까지 뻗을 정도였다.​​

 

한보그룹은 대출받은 돈으로 계열사도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1995년 11월 계열사는 26개에 이르렀다. 1996년 11월 기준 한보그룹이 빌린 돈은 5조 원이 넘었다. 금융기관은 제철소를 완공해도 적자경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해 대출금 회수에 나섰다. 결국 한보그룹은 돈을 갚지 못해 1997년 1월 23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당진제철소 개발을 위한 한보철강의 무리한 대출은 한보그룹의 부도를 불러왔고, 한보그룹의 부도는 외환위기에 불을 지피게 된다. 

 

한보그룹 부도 이후 대외 경제 여건 악화와 금융경색 등으로 줄줄이 기업이 무너지며 외환위기가 닥치게 된다. 한보 사태는 지속해서 곪아온 우리나라의 정관계, 금융권 유착과 대기업의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해외 도피 21년 만에 체포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 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2019년 6월 22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주요 계열사의 운명도 처참했다. (주)한보는1997년 부도난 후 법정관리를 받다가 네 번 주인이 바뀐 후 LIG건설이 됐다. 한보건설은 1997년 부도 후 2001년 미국 울트라컨으로 매각되어 ‘울트라건설’로 바뀌었고, 2014년 다시 법정관리를 받게 된다. 결국 2017년 호반건설산업에 합병됐다. 한보철강 당진제철소는 포항제철이 위탁운영을 하다가 법정관리를 받게 된다. 이후 현대제철에 합병됐다. ​

 

​당시 정태수 회장이 당진제철소에 ​무리하게 투자를 벌인 것은 쇠를 만져야 큰돈을 번다는 점쟁이의 조언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정 전 회장은 1997년 1월 31일 구속돼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5년 5개월 복역 후 2002년 고혈압 등 지병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석방된 정 회장은 2005년 강릉영동대학 교비 72억 원을 횡령해 다시 구속됐다. 2007년 2심 재판 진행 도중 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가겠다며 출국금지처분 집행정지를 받아낸 정 전 회장은 말레이시아로 도피했다. 이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에콰도르 등에서 도피 생활을 해왔다.  

 

2019년 6월 11일 정 전 회장의 4남인 정한근 씨가 체포되었다. 정 씨를 통해 아버지 정 전 회장이 에콰도르에서 사망했음이 알려졌고, 검찰도 이를 공식 확인됐다. 타인의 신분을 빌려 산 정 전 회장은 사망 후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 정한근 씨는 ​2020년 4월 1일 1심에서 징역 7년과 추징금 401억 3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한편 정 전 회장이 남긴 체납액은 2225억 원에 달한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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