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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김우중과 '세계경영'의 몰락,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 31세 때 500만 원으로 창업, 한때 재계 2위…공격적 경영이 외환위기에 부메랑 돼

2020.12.01(Tue) 18:11:54

[비즈한국] 1967년 자본금 500만 원으로 시작한 대우그룹은 설립 15년 만에 현대, 삼성, LG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내 4대 재벌로 자리매김했다. 1998년 대우그룹은 삼성을 제치고 현대에 이어 재계 순위 2위에 올랐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계열사를 줄여가며 자금을 확보하던 다른 대기업들과 반대로 공격적으로 기업을 인수했으나 자금난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수십조 원에 달하는 사기대출과 분식회계가 밝혀지며 순식간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샐러리맨 김우중의 대우실업 설립

 

1936년에 태어나 경기고등학교,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김우중은 1960~1966년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 퇴사 후 31세에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와이셔츠 등 공산품 수출을 주로 하던 대우실업은 1970년 급격한 경제 성장과 함께 성장가도에 오른다. 창업 5년 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다.

 

2014년 8월 26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제45회 대우특별포럼-김우중과의 대화’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1973년부터 대우그룹은 본격적으로 여러 사업영역에 진출했다. 영진토건과 동양증권을 인수해 건설, 금융업에 각각 진출했고, 1974년 동남전자를 인수해 대우전자로 사명을 바꾸고 전자제품 수출업에도 나섰다. 이후 1976~1979년 한국기계, 대우조선, 새한자동차 등을 인수·설립해 중공업 사업기반을 다졌다. 

 

정부 주도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중동 붐과 맞물려 대우그룹은 설립 10년 만에 대한전선, 쌍용 등 여러 그룹을 제치고 현대, 삼성, LG와 함께 국내 최대 기업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대우그룹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1982~1984년 대한전선의 가전사업, 오리온전기, 대한통신광업 등을 인수해 전자사업에도 힘을 실었고, 경남기업을 인수해 건설업도 강화했다. 

 

1973년 대우그룹은 서울역 부지를 47억 원에 매입해 빌딩을 지었다. 1977년 대우건설이 완공한 빌딩은 대우그룹 사옥으로 사용됐다.

 

김우중 회장은 당시 소비자를 위한 여러 방법을 기획했다. 자동차 영업소마다 애프터서비스 비용이 달라 소비자들이 바가지를 쓰는 일이 빈번하자 ‘영수증 환불제’를 실시해 과도하게 청구된 비용을 환불해주었다. 전자제품의 품질이 열악해 TV 폭발 등의 사고가 빈번하자 ‘탱크주의’를 내세워 품질을 강화했다. 전자제품에 복잡한 기능이 점차 추가되며 발생하는 품질 문제 등을 해소하기 위해 기본기에 충실한 제품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해외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자 현지에서 대우제품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12일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영결식이 경기도 수원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가운데 가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김우중 회장은 ‘세계경영’을 모토로 해외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에 국외지사를 세웠고, 1976~1978년 에콰도르, 수단,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시장에도 진출했다. 1990년대엔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등 동구권 여러 나라에 자동차공장을 인수 또는 설립했다.

 

1998년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와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76억 원의 자산과 91억의 매출을 기록했고,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 2위에 올랐다. ‘세계경영’의 결과, 그해 대한민국 수출액 1323억 달러 가운데 14%에 해당하는 186억 달러를 대우그룹이 달성했다.

 

#차입 경영과 무리한 인수 등으로 몰락

 

대우그룹은 주로 부실기업을 인수해 몸집을 키웠다. 해외법인을 확장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자기자본은 20% 정도 들이고 기업 매수자금은 대부분 매수되는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국내외 금융사에서 차입했다.

 

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다. 해외채권자들이 빌려줬던 자금을 상환하라고 압박했고, 자기자본 대비 부채가 400%가 넘는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를 겪었다. 1997년 말 11조 원에 달하던 부채는 1년 후인 1998년 말 22조 원으로 늘었다. 1999년 초반부터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원화단기차입금은 2조 7700억 원에서 9조 8500억 원 대로 급증했다. 그 와중에 대우-GM의 합작 추진이 무산되며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1999년 1월 21일 이건희 전 삼성 회장과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삼성 영빈관인 서울 한남동소재 승지원에서 만나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 간 빅딜(대규모사업교환)을 조속히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빅딜은 이뤄지지 않았다. 사진=비즈한국 DB


그러나 대우그룹의 해결 방식은 여느 대기업과 달랐다.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삼성과 현대는 구조조정을 초과 달성했고, SK와 LG는 90% 이상 달성하며 부채 감소에 힘썼다. 하지만 대우는 18.5%에 그쳤다. 오히려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고 해외에서 대우를 홍보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하지만 외환위기라는 국가비상사태에 금융당국이 대출을 더 이상 해줄 리 없었고, 추가 대출과 투자를 기대하던 김우중 회장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1998년 4월 궁여지책으로 김우중 회장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 계획을 내놨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8월 대우그룹의 모든 계열사는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11월 김우중 회장은 경영권을 내려놓았다.

 

결국 계열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대우건설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10년 산업은행에 인수되고, 대우전자는 여러 사업부문으로 나뉘어 인수됐으며 (주)대우의 무역부문은 현대 포스코에 매각돼 현재 포스코인터네셔널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우자동차도 GM대우(현 한국GM)로 편입됐다. 대우조선해양은 2019년 2월 현대중공업이 인수 최종 후보로 발표됐지만 노조의 반발이 거센 상황이다. 미래에셋대우도 한국산업은행을 거쳐 미래에셋증권으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김우중 회장 그 후

 

외환위기 당시 대우그룹의 부채규모는 89조 원으로 자본 76억 원을 넘어섰다. 정상화를 위해 국민 세금 30조 원이 투입됐다.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김우중 회장은 1999년 10월 이미 해외로 도피한 상황이었다. 

 

2001년 민주노총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찾기 위해 만든 현상수배 전단. 사진=비즈한국 DB


김우중 전 회장은 1997~1998년에 걸쳐 약 41조 원 상당의 분식회계를 저질렀고, 이를 통해 9조 9000억 원을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해외에서 떠돌던 김 전 회장은 판결 석 달 후인 2005년 6월 귀국했다. 2006년 징역 8년 6월에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을 선고받았으나 1년 정도 복역한 뒤 2008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김우중 전 회장은 2010년 이후 베트남에 거주했고 2012년부터는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에 주력했다. 2018년 건강이 악화돼 아주대병원에서 알츠하이머로 투병하던 중 2019년 12월 9일 사망했다. 그에게 부과된 추징금 가운데 환수된 것은 0.5%에 해당하는 892억 원에 불과하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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