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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증 사본으로 대출' 저축은행 손 들어준 대법원, 피해자 반발

명의도용 피해자, 페퍼저축은행과의 계약 무효 소송서 패소…"현실 무시한 판결" 다른 피해자들 불안

2025.08.29(Fri) 17:37:35

[비즈한국] 금융권에서 비대면 거래가 자리 잡으면서, 신분증 원본이 아닌 사본을 통한 명의도용으로 금전 피해를 입는 사례도 늘고 있다. 명의도용 피해자들은 비대면 실명 확인 과정에서 사본 신분증을 허용한 금융사와, 이를 방치한 금융당국에 보상과 대책 마련을 요구해왔다. 그런데 최근 사기범이 피해자의 신분증 사본으로 9000만 원의 대출을 일으킨 사건에서 대법원이 은행의 손을 든 판결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명의도용 피해자들은 “현실을 무시한 판결”이라며 항의하고 나섰다.

 

신분증 사본 인증 피해자들이 비대면 실명 확인 과정에서 은행의 손을 든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는 간담회를 열었다. 사진=심지영 기자


8월 14일 대법원 제2부는 보이스 피싱 피해자가 페퍼저축은행에 대출계약 취소를 위해 제기한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다. 2022년 7월 딸을 사칭한 보이스 피싱범에게 속은 피해자가 운전면허증 사진과 계좌번호 등을 제공하자, 범인이 피해자의 면허증 ‘사진’을 본인 인증에 사용해 페퍼저축은행에서 계좌를 만들어 9000만 원을 대출한 사건과 관련한 소송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거액의 빚을 진 피해자는 페퍼저축은행을 대상으로 비대면 대출 계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피해자의 손을 들었지만 2심에서 뒤집혔고,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페퍼저축은행이 승소한 2심이 확정됐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두고 시민단체와 비대면 금융사기 피해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판결이 현실과 동떨어진 데다, 금융사와 소송을 진행 중인 다른 피해자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피해자 단체는 8월 29일 긴급 간담회를 열고 공론화에 나섰다.

 

박정경 신분증 사본 인증 피해자 모임 공동대책위원회 대표는 “2021년부터 사본 신분증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자 금융사에서 본인 확인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선했다. 금융사와의 소송에서 피해자의 승소 사례도 나왔다”며 “신분증 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법적 판단이 나오는 등 사태를 마무리하는 단계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대법원이 황당한 판결을 내렸다”고 역설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문제가 된 점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본인 확인 절차에서 신분증 사본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명시한 점이다. 페퍼저축은행 사기 대출의 피해자 측은 소송에서 “대출을 신청할 때 운전면허증 원본이 아니라 사전에 촬영한 사진으로 확인한 것은 적절한 본인 확인 절차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비대면 확인 절차의 특성상 은행이 거래 당시에 실명확인증표(신분증) 원본을 바로 촬영한 파일을 받는 것과 사전에 촬영한 파일을 받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판시했다. 사실상 사본을 통한 인증에 문제가 없다고 본 셈이다.

 

이는 본인 인증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정호철 경제정책팀 부장은 “신분증 촬영의 핵심은 당사자 신원 확인이다. 사기범은 원본을 촬영한 적이 없다. 대법원은 원본 촬영 여부와 시점만 논하고 촬영 주체는 간과했다”며 “신분증 사본을 제출하더라도 원칙적으로는 명의 주체가 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한 판결이다. 아무나 진위 확인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은행이 복수의 인증수단을 사용했으니 책임을 다했다고 본 것도 문제로 꼽혔다. 재판부는 페퍼저축은행이 신분증 사진 외에 △기존 계좌 인증 △휴대전화 인증 △공동인증서 인증 △신용정보 조회 등 복수의 인증수단을 거쳤으니 본인 확인노력을 다했다고 판시했다.

 

문제는 복수 인증 수단조차 신분증으로 뚫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정호철 부장은 “사기범이 가짜 신분증으로 명의도용에 성공했다면 다음 인증 수단에서 이를 막았어야 한다. 결국 이중 인증이 목적 아닌가”라며 “그런데 계좌 인증, 휴대전화 인증 등은 신분증을 통해 뚫을 수 있다. 인증수단의 독립성이 없다. 지문, 안면 인식, 실물 OTP 정도가 독립된 인증수단으로 본다. 법원은 이 같은 현실을 간과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로 수년간 금융사와 법적 다툼을 해온 피해자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박정경 대표는 “벌써부터 금융사와 신분 도용 피해자 간의 하급심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며 “선고를 하루 앞두고 은행이 선고 연기를 신청하는 등 명의도용 피해자와 금융사의 소송 2심 판결 네 건의 결과가 불투명해졌다”고 우려했다.

 

보이스 피싱을 당한 배우자의 신분증 사진이 유출돼 9000만 원대 피해를 입은 김종익 씨는 “금융사와의 2심 판결이 8월 19일에 나올 예정이었으나 돌연 9월 23일로 미뤄졌다. 소송 결과가 확정되지 않아 배우자는 여전히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없다. 사기거래 통장이 됐기 때문”이라며 “금전적 손해뿐 아니라 피해 회복을 위해 대응하는 과정이 정신적으로 고통스럽다”며 금융당국과 사법기관의 신속한 구제를 강조했다.

 

케이뱅크에서 신분증 사본으로 명의를 도용당해 2억 원대 사기 대출을 당했으나 대출 무효 판결을 받은 조용수 씨는 “재판 과정에서 신분증 사진의 모바일 업로드 절차에 대해 상세하게 입증해야 했다. 승소는 했지만 법원이 인증 과정에 대해 기술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다”며 “피해 사례가 전국에서 발생하는 만큼 사법부가 본인인증 절차에 대해 숙지할 필요가 있다”라고 짚었다.

 

피해자들은 남은 대법원 판결에서 다른 결과를 받아 재심의 기회를 얻길 기대하고 있다. 정호철 경실련 부장은 “신분증 원본을 확인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방법의 문제”라며 “금융소비자 보호와 피해자 구제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심지영 기자

jyshim@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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