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내년에 미국 주재원으로 파견되는 40대 대기업 과장 A 씨는 비상이 걸렸다. 파견을 앞두고 회사에서 통상 해온 것처럼 미국을 방문해 한 달가량 머무르면서 인수인계 및 거주 준비를 하려 했는데, 최근 미국이 대대적으로 불법 체류자 단속에 나섰기 때문이다. A 씨는 당초 다음달 즈음 입국해, 미국 주재원 비자 면접 일정이 잡힐 때까지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며 업무를 하려 했지만 전자여행허가(ESTA)로는 이제 안 되겠다는 걱정이 생겼다.
임원진을 수행하고 해외 일정을 자주 소화해야 하는 금융사의 수행비서 B 씨도 미국 출장 일정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B-1이나 B-2 비자를 발급받는 방법도 있지만 비자 발급에 걸리는 시간이나 비용을 고려할 때, ESTA가 압도적으로 효율적인 탓에 간단한 일정은 무조건 ESTA를 써왔다. B-1 비자는 비즈니스, 회의, 컨퍼런스 참석 등 단기간 상업적 목적에, B2 비자는 관광, 가족 방문, 치료 등 일시적 방문 목적의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비이민 비자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ESTA는 물론 B-1 비자도 “미국에서 노동 혹은 수익 활동을 해선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ESTA 믿고 써왔던 관행 발목 잡혀
재계에서는 지난 4일(현지시각)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이 조지아주 서배나에 위치한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HL-GA 배터리회사) 건설 현장에서 불법 체류자를 단속한 데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체포된 이들 대다수가 한국 직원들로 ESTA로 미국에 들어가 공장 세팅을 하다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ESTA는 미국에 일시적으로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증서다. 미국은 한국 등 비자 면제 프로그램(VWP)에 가입된 40개국에 대해서 최대 90일간 단기 관광 및 출장 시 비자 신청을 면제해주고 대신 ESTA를 발급한다. ESTA는 정식 비자가 아니기에 비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기 출장이나 관광, 환승 등만 허가한다. 미국대사관 인터뷰를 거치지 않고 인터넷으로 개인정보 등을 제출하면 발급받을 수 있다.
미국 내에서 영리 활동을 목적으로 하면 정식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B-1 비자 역시 미국 내 비즈니스 회의나 계약, 세미나 방문 시 최대 6개월간 체류를 허가하는 방문 비자이지만, 미 당국은 ‘영리 활동’을 허가하지 않는다. 정식 취업 비자인 전문직 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 또는 E-2)가 있으면 장기 체류와 함께 영리 활동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다. 미국 주재원 비자인 L 비자는 절차에만 최대 5개월이 걸리고, 특정 전문직 취업 노동비자인 H-1B는 추첨으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데 발급율이 20%가 되지 않는다. 특히 대규모 전문인력인 협력업체 직원들은 미국에 본사가 없을 경우, 이민 당국에서 전문직이 아니라 기능직으로 분류해 비자 발급을 아예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미 당국에 검거된 한국인 300여 명 대부분도 이런 ESTA나 B-1 비자 소지자였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식 B-1 비자도 ESTA에 비해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일정이 한 달 내외면 ESTA를 사용해 출장을 가곤 했다”며 “미국 현지에 법인이 없으면 취업 비자를 내주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협력사 직원들이 미국에 동행할 때는 무조건 ESTA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미국 공장 있는 기업들 비상
미국 현지에 공장이 있어 한국 기술진의 장기 출장이 불가피한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앞선 A 씨는 “우리 회사만 해도 미국 공장에 한국 직원이 100여 명 있는데 이들 중 주재원 발령을 받은 이들은 발령 일자까지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먼저 ESTA로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미 대사관 면접 일정이 잡히면 다시 들어와 비자를 발급받아 들어간다”며 “이런 직원들까지 하면 우리 공장에서도 문제가 될 사례가 꽤 있어 보인다”고 우려했다.
문제는 미국에서 비자 문제로 적발될 경우 향후 영구 입국 금지 조치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SDI, SK온 등 미국 내 공장을 건설하거나 계획한 곳들도 이번 사태를 예의 주시하며 ‘출장 연기’ 및 ‘귀국’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규 공장 설립을 위해 숙련 인력들을 계속 투입해야 하는 상태에서 비자 문제에 발목을 잡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한 번 걸리면 미국 영구 입국 금지를 당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 차원은 물론 회사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라며 “그동안 관행처럼 해온 것을 갑자기 문제 삼는 것을 놓고 다들 배경 파악과 함께 대안 마련을 고민 중이다. 하지만 미국 비자 발급이 쉽지 않아 대안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차해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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