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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레놀도 없다" 의약품 시각장애인용 점자표시 '게걸음'

전체 의약품 중 0.12%에만 점자 표기 의무 부과…김예지 의원 "장애인 생명권·정보접근권 보장 위한 정책"

2025.12.04(Thu) 09:28:10

[비즈한국] 독감이 퍼지는 요즘, 대부분은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 간 뒤 금세 증상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에게 감기약 한 알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어떤 약인지 확인하기 어렵고, 아이에게 먹여야 할 때는 그 난도가 훨씬 높아진다. 약 이름도, 용량도, 복용법도 ‘손끝’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현실. 점자 표기가 미비한 의약품 환경 속에서 시각장애인은 오늘도 불안과 위험을 감수하며 약 한 알을 집어 든다.

 

시각장애인이 부모인 가정에서 아이에게 감기약을 복용하기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성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기도 미흡한 상황에서 아이용 감기약에는 점자 표기 의무가 부과되지 않아서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에 소재한 약국에 진열된 아이용 감기약. 사진=최영찬 기자

 

약사법 및 의약품 표시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 시행으로 지난해 7월 21일부터 28종의 의약품에 점자 및 음성·수어영상 변환용 코드 표기가 의무화됐다. 편의점에서 판매되는 안전상비의약품 11종도 같은 의무가 적용됐다. 다만 기존 재고 소진과 현장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1년의 유예기간이 부여됐다. 그러나 이 목록을 살펴보면 아이용 의약품은 포함돼 있지 않다. 결국 시각장애인이 아이에게 감기약을 복용시키는 일이 구조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성인 시각장애인에게 충분한 의약품 선택권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국내 유통 중인 완제의약품은 총 3만 1852개다. 이 중 점자 표기 의무가 부과된 것은 39종(0.12%)에 불과하다. 의무 대상인 39종조차 실제로 점자 표기가 제대로 이행됐는지 확인해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최근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발간한 ‘2025년 의약품 점자 및 접근성 코드 표시 실태 모니터링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11종과 의무 대상 의약품 28종 등 총 39종 가운데 점자 표기가 된 제품은 17종(43.6%)뿐이었다.

 

안전상비의약품은 8종에서 점자 표기가 이뤄져 이행률이 72.7%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감기약인 타이레놀정 500mg의 경우, 편의점에서 점자 표기 제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점자 표기 의무가 있는 28종 중에서도 실제 점자가 찍힌 제품은 9종뿐으로 이행률은 32.1%에 그쳤다. 식약처 관계자는 “올해 7월 22일 이후 제조·수입되는 제품에는 모두 점자가 표시된 것으로 파악된다”며 “이전 생산분에는 점자 표기가 없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설령 점자가 표시돼 있더라도 시각장애인의 불편은 사라지지 않는다. 의약품마다 점자의 크기, 위치, 간격, 돌기 정도가 제각각이어서 약을 구별하기 어렵다. 포장 케이스에만 점자가 있고, 내용물이나 설명서에는 점자가 없는 경우도 많아 포장에서 꺼내놓는 순간 어떤 약인지 가늠하기 힘들어진다.

 

병원 처방에 따라 약국에서 조제된 의약품은 점자 표기 자체가 어렵다. 이 때문에 어떤 약을 아침·점심·저녁 중 언제 복용해야 하는지 파악하지 못해 약 오남용 위험도 높아진다. 지난해 8월에는 80대 시각장애인이 비타민 음료와 촉감이 비슷한 식용 빙초산을 이웃에게 건네주었고, 이를 마신 70대 남성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법적으로 표기 의무가 규정됐지만 아직 현장에서 미흡한 점이 많아 정착 과정에 있다고 본다”며 “점자 스티커 부착 등을 통해 조제 의약품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식약처가 적극 검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련 법 개정안을 발의했던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비례대표)은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의약품 안전정보 표시제도는 생명권과 정보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권 정책”이라며 “充분한 준비기간이 있었음에도 고시가 제때 마련되지 않아 시행이 사실상 1년 늦춰진 것은 명백한 행정 실패”라고 비판했다. 이어 “법이 정한 시행일을 행정편의로 미루는 관행은 제도 시행을 기다려온 장애인의 입장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며 “식약처는 즉시 점검과 후속 조치를 내놓고, 향후 어떤 경우에도 행정편의를 이유로 시행일을 늦추는 일이 없도록 제도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식약처 관계자는 “표시된 점자가 실제로 장애인이 인식 가능하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지 확인하기 위해 장애인 참여 아래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을 통해 실태조사를 진행 중”이라며 “결과에 따라 개선을 권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광약품의 의약외품인 치약 '시린메드에프'에 점자가 표기돼 있다. 사진=최영찬 기자

 

제약업계는 점자 표기를 위해 인쇄판 교체나 점자 기계 도입 등 비용 부담을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일부 제약사는 의무 대상이 아님에도 점자 표기를 확대하며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성 개선에 나서고 있다.

 

동화약품은 점자 표기 의무가 있는 판콜에스내복액과 안전상비의약품인 판콜에이내복액뿐만 아니라 후시딘연고, 후시딘크림, 포스테리산좌제, 바르지오모두크림 등 총 11개 품목에 점자를 적용하고 있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2006년 후시딘부터 점자 표기를 시작했다”며 “식약처 가이드라인에 맞춰 충실히 점자 표기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부광약품은 국내 제약사 가운데 점자 표기 품목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점자 표기 의무가 부과된 소화제 ‘파자임-95밀리그램이중정’ 외에도 의약품 30여 종, 치약 10종 등 약 40여 개 품목에 점자를 적용하고 있다. 부광약품 관계자는 “시각장애인의 건강과 편의를 위해 세심한 부분부터 신경 써왔다”며 “앞으로도 환자 편의와 건강을 최우선 가치로 삼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유한양행은 알레르기 비염 치료제 ‘페니라민정’, 종합비타민 ‘삐콤씨정’ 등 18종에 점자를 표기하고 있으며, 대웅제약 역시 ‘베아제정’, ‘대웅우루사연질캡슐’ 등 6종에 점자를 적용하고 있다.​

최영찬 기자

chan111@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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