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반도체 초호황은 역설적으로 삼성전자 노사에 전례 없는 긴장을 불러왔다. 경쟁사와의 보상 격차에서 비롯한 불만이 임계점을 넘은 사이 세를 불린 과반 노조가 탄생했다. 법적 근로자대표 지위를 확보한 노조는 상위 노조에 기대지 않고 임직원 권익만을 챙기겠다는 실용주의를 내세운다. 역대급 실적 속 보상 원칙에 대한 회의, 실리로 무장한 새로운 노조의 등판. 삼성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위에서 이번 파업은 어디로 향할까.
“And you’re standing on the edge, face up ’Cause you’re a natural.”
(너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어, 고개를 들어. 왜냐하면 넌 타고났으니까.)
22일 정오 인천 연수구 삼성바이오로직스 1번 정문 앞. 세계적인 록 밴드 이매진 드래곤스(Imagine Dragons)의 히트곡 ‘내추럴(Natural)’이 울려 퍼졌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생노동조합의 투쟁 결의대회 현장이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른 채 비장한 표정으로 투쟁가나 민중가요를 부르는 통상적인 노조 집회의 풍경과 거리가 멀었다.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으며 웃음꽃을 피우는 직원들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 축제 현장 같았다. 이른바 MZ세대의 새로운 노동운동 문법이다.
이날 집회에는 노조 추산 약 2000명 이상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사전 신청자만 2100여 명에 달했다. 생산직군뿐만 아니라 전 직군의 직원들이 고루 참여해 직원들의 불만이 특정 부서만의 문제가 아님을 방증했다. 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는 직원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성과급 쟁취? “핵심은 무너진 신뢰 회복”
이날 마이크를 잡은 박재성 상생노조 위원장은 노사 갈등의 쟁점이 단순한 임금 인상이나 성과급 잔치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박 위원장은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단순히 임금 처우 개선이 아니다”라며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하고 우리는 따르기만 하는 수직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기 위한 투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조는 이번 쟁의행위의 목적을 돈이 아닌 존중의 부재, 무너진 신뢰 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노사 갈등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지난해 11월 불거진 인사 문건 유출 사태다. 유출된 문건에는 강제 부서 이전(리링크), 저성과자 낙인, 심지어 직원들이 심리적 안정을 위해 찾은 사내 마음건강 상담소의 이용 기록이 징계나 고과 평가에 활용됐다는 정황이 담겨 직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여기에 계약직 직원 명절 선물 차별 지급 논란 등 사측의 비합리적인 대처도 도마 위에 올랐다. 박 위원장은 “계약직 직원들에게 총 1500만 원 상당의 명절 선물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회사는 대형 로펌 태평양과 김앤장을 선임하며 더 큰 비용을 쏟아부었다”며 “정당한 노동위원회의 결정에도 불복하는 경영진의 오만한 결정과 비합리성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고 비판했다. 연단에 오른 서동민 조합원도 “우리가 단순히 임금 인상률이 적어서 나왔는가. 부당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나와 가족을 지키며 회사와 상생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현장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닷새간 총파업, 배양 공정 특성상 3000억 원 이상 손실 불가피
13회에 걸친 교섭과 노동위원회 조정에도 노사 간 평행선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노조는 5월 총파업 카드를 꺼냈다. 오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닷새간 파업에 돌입할 예정이다. 노동절과 어린이날 등 연휴 기간을 포함한 것은 조합원들의 연차 소진과 임금 손실(무급 파업) 등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24시간 풀가동되어야 하는 바이오 공장의 특성상 사측에 확실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게 박 위원장의 설명이다.
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회사가 떠안을 재무적 타격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사측은 쟁의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며 파업 시 즉각적으로 6400억 원의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위원장은 집회 직후 이어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바이오 의약품 생산 핵심인 배양 공정의 특수성을 들어 파업의 파급력을 설명했다. 그는 “회사 측 자료에 따르면 하루 매출 손실은 약 128억 원 규모”라며 “만약 5일간 파업해 30일가량 소요되는 배양 단계의 배치(Batch)들이 전량 폐기된다고 가정하면 실제 파업 일수 5일에 배양 기간 30일을 더해 총 35일치의 영업일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3000억~3500억 원의 손실 발생이 예상된다. 노조는 일시적인 재무상 출혈이 있더라도 회사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장기적인 투자 관점에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현장에는 삼성그룹 초기업 노동조합 홍광흠 총위원장도 연대 발언에 나섰다. 그는 “우리의 외침은 배부른 돼지들의 욕심이 아니라 굴지의 글로벌 기업을 피땀 흘려 만들어온 우리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기 위함”이라며 삼성바이오로직스 지부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40분간 축제 같은 집회, 이제 공은 사측으로…
축제 같았던 40여 분간의 집회는 어떠한 물리적 충돌이나 큰 소음 피해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조합원들은 집회 종료 후 질서 정연하게 쓰레기를 정리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회사를 향한 단호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파국을 막을 마지노선은 4월 30일까지다. 박 위원장은 이번 주 24일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가처분 신청 결과와 관계없이 사측이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는 안건을 들고 온다면 언제든 교섭 테이블에 복귀하겠다고 열어놨다. 그는 “성과급 등 금전적 보상책은 조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난해 인사 문건 유출 사태 등을 보완할 인사원칙 시스템 개편안 및 사건 책임자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끌어내는 것이 이번 쟁의행위의 최우선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노조의 총파업 강행 방침에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바이오의약품 CDMO(위탁개발생산) 사업 특성상 글로벌 제약사와 신뢰도 중요한데 파업으로 인해 생산일정이 늦춰지면, 장기적으로 고객사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논리다.
업계 관계자는 “바이오 업계에서 공급 지연은 단순한 납기 위반이 아니라 곧바로 시장 지위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한번 뺏긴 물량과 시장 점유율은 다시 되찾기 어려운 만큼 노조가 내세우는 처우 개선 요구가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수주 여력을 떨어뜨려 일자리 유지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영찬 기자
chan111@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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