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술은 누군가의 퇴근길 가방 속에 담겨 조용히 국경을 넘는다. 수십 년간 쌓아올린 연구 성과와 국가 전략 기술이 출력물 몇 장, USB 메모리 스틱에 담겨 사라진다. 기술 유출 사건은 매년 수십 건씩 적발되지만, 그 전모는 단편적으로만 드러난다. 비즈한국은 4부작 기획 ‘기술간첩’을 통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유출의 순간을 재구성한다.
1.
2019년 8월 X일 중국 상하이시 송강구.
그것은 공장과 기술, 사람을 통째로 옮기는 비밀 프로젝트였다. 붐비는 휴가철 새벽 부지런히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성도 팀장과 이한결 사원이 끈적한 공기를 가르며 넓은 공장 부지에 나란히 섰다. 중국 반도체 소재 기업 신광머트리얼즈(가칭)가 새롭게 제조라인을 들일 공장이었다. 한국에서 검증된 CMP 슬러리 기술을 중국 현지에 옮겨 심을 곳. 이제 필요한 건 사람이었다.
나 팀장과 이 사원은 신광 관계자들과 함께 공장 부지를 둘러봤다. 연마 설비가 들어설 자리, 클린룸 구획, 폐수 처리 동선, 생산라인 배치를 하나씩 따져봤다. ‘5년 뒤 다품목 생산 완료.’ 청사진만 내걸었을 뿐 공장도 기술도 백지 상태였다. 두 사람이 주축이 돼 손수 작성한 사업계획서가 신설 법인의 시작점이 될 터였다.
신광사가 두 사람을 반긴 이유는 분명했다. 나 팀장은 국내 중견 소재기업인 A 사에서 CMP 소재개발팀을 이끈 핵심 인력이었다. 이 사원 역시 실무를 아는 손이었다. 신광사에는 당시까지 CMP 소재 기술이 없었다. 없는 기술은 사 오면 됐고, 사 오지 못하면 사람째 데려오면 됐다.
한국에 돌아온 뒤 두 사람은 일주일 간격으로 회사를 떠났다. 퇴직 사유는 평범했다. 한 사람은 개인 사업을 이야기했고, 다른 한 사람은 집안 사정을 이유로 들었다.
*CMP(Chemical Mechanical Polishing) 슬러리: 반도체 웨이퍼의 거친 표면을 나노미터 단위로 매끄럽게 깎아내는 연마제. 웨이퍼를 연마패드에 밀착시킨 뒤 슬러리를 흘려 평탄화하는 이 공정은 반도체 미세화의 핵심이다. 공정·소재·장비가 결합된 이 기술 없이는 수십 층으로 쌓인 반도체 회로를 정밀하게 구현할 수 없다.
2.
이미 판은 다른 곳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이른바 ‘CMP 슬러리 프로젝트’.
신광사 산하에 CMP 슬러리 제조 자회사를 세우고, 한국에서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분해해 중국 현지 공장에 다시 조립하는 계획이었다. 2020년 제조라인 완비, 2024년까지 다품목 양산. 로드맵은 야심찼고, 예상 고객사 이름까지 거론됐다. 단순히 인재 몇 명을 기용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한국 반도체 소재 산업의 단면을 통째로 복제하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안성준이 있었다. 소재 전문 대기업 B 사에서 CMP사업추진단 단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한 달 뒤 경기 수원.
이번에는 신광사 사장이 직접 한국을 찾았다. 신광사 사장과 영업총괄 왕 씨 맞은편에 나 팀장, 이 사원, 그리고 안성준 단장이 앉았다. 추가 수정이 끝난 사업계획 발표자료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신광사 사장은 안 단장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미 누가 이 판의 중심인지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 단장은 이번 프로젝트의 실무 책임자를 넘어, 판 자체를 짠 설계자에 가까웠다. 왕 씨의 제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중국 현지에서 CMP 슬러리 제조업을 해보자는 이야기는 과거 중국 주재원 시절에도 오갔지만, 그때는 속도도 조건도 맞지 않았다. 접어둔 카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승진에서 밀려난 뒤 상황은 달라졌다. 왕 씨는 다시 손을 내밀었고, 이번에는 더 구체적인 자리를 제시했다. 현지 자회사를 세우고 그 총괄 책임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안성준은 혼자 가지 않았다. 혼자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3.
CMP 슬러리를 처음부터 만들려면 세 종류의 사람이 필요했다. 배합 기술을 아는 사람, 제조 설비와 공장 구축을 설계할 사람, 그리고 실제 반도체 양산 라인에서 이 슬러리가 어떻게 평가받는지 아는 사람. 안성준은 그 조각들이 어느 회사, 어느 부서, 누구 손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씩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먼저 손을 내민 대상은 B 사 후배 정도현이었다. 정 씨가 합류를 거절했지만, 안 단장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대신 다른 회사의 선수들을 소개받았다. 그렇게 연결된 인물이 A 사 나성도 팀장과 이한결 사원이었다. 이력서는 정 씨를 거쳐 안성준에게, 다시 왕 씨에게 전달됐다. 사업계획 발표자료도 같은 경로를 따라 오갔다. 나 팀장이 자료를 보내면 정 씨와 안성준이 보고 손봤고, 수정본은 다시 중국으로 넘어갔다. 사람도, 문서도, 계획도 모두 안성준을 중심으로 흘렀다.
같은 시기 정 씨 역시 회사 내부 자료를 챙겼다. CMP 슬러리 신규 공장의 부지 레이아웃, 실내 배치도, 생산라인 구성, 위험물질 사용량 검토 내용이 담긴 파일이었다. 공장을 처음부터 설계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정보들이었다. 안성준이 불러 모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각 회사 안에 흩어진 설계도와 경험, 시행착오까지 필요했다.
4.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가 부족했다. 소재 개발과 공장 설계만으로는 사업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고객사 공정에 이 기술을 얹을 수 있는 진짜 프로가 필요했다. 마지막 조각은 5년 전 함께 동업을 고민했던 방준혁 부장. 거래처 C 사 CMP 공정 개발팀 소속이던 그는 반도체 양산 라인의 평가 데이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안 단장은 거듭 이직을 권유했다. 사람이 부족하다, 네가 와야 그림이 완성된다.
2020년 4월 어느 저녁, 방 부장은 자택에서 회사 서버에 연결된 업무용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띄운 슬러리 기술 자료를 다른 손에 든 개인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연마속도, 선택비, 과산화수소 농도에 따른 비교 데이터. 안 단장이 요청한 자료였다. 이런 방식의 유출은 퇴사 직전까지 반복됐다. 공정 평가 자료는 위챗을 통해 신광사 사장과 안 단장에게 전달됐고, 그는 일부를 다시 나 팀장에게 넘겼다.
그 무렵 프로젝트의 윤곽은 거의 완성돼 있었다. 한 사람은 소재를 알고, 한 사람은 공장을 알고, 한 사람은 고객사 공정을 알았다. 그리고 안성준은 그 셋을 한 줄로 묶는 진짜 설계자였다.
2020년 5월, 안성준은 신광사 CMP 슬러리 제조 자회사의 총책임자로 취임했다. 직함은 사장이었다. B사를 떠난 지 석 달 만이었다. 연봉 세전 200만 위안, 지분 10%. 1년 뒤 방준혁도 부사장급으로 합류했다. 실수령액 2억 5000만 원 이상에 지분 5%.
이 프로젝트는 한국 기업들 안에 흩어져 있던 기술과 인력을 한 사람의 지휘 아래 재배열한 사건에 가까웠다. 소재기업 A사에서 소재 개발의 조각이, 대기업 B사에서 공장 설계의 조각이, 거래처 C 사에서 공정 평가의 조각이 빠져나왔다. 서로 다른 회사에서 흘러나온 기술의 조각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맞춰져, 그렇게 반도체 공정의 핵심 기술이 한국서 중국으로 허망하게 빠져나가는 듯했다.
#‘CMP 슬러리’ 기술 유출 사건의 전말
이 팩션은 2019~2021년 솔브레인, SKC, SK하이닉스 출신 직원 6명이 공모해 반도체 평탄화(CMP) 관련 국가핵심기술과 영업비밀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은 중국 반도체 소재 기업에 제조 자회사를 세우고 한국의 기술과 인력을 통째로 옮기는 ‘CMP 슬러리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해당 사건은 지금까지 언론 보도 등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주범인 피고인 안성준 단장(가명)은 승진 누락 이후 중국 측으로부터 연봉 200만 위안(약 3억 8000만 원)과 지분 10%, 현지 법인 사장직을 약속받고 범행을 주도했다. 다른 공범들 역시 억대 연봉과 부사장직 등을 보장받았으며, 퇴사 직전 국가핵심기술 자료를 휴대전화로 촬영해 무단 반출하거나 내부 기밀 보고서를 활용해 중국 현지용 사업계획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은 수사기관이 입수한 첩보를 바탕으로 다년간의 수사를 통해 실체가 밝혀졌다. 국가핵심기술 보유기업이기도 한 피해 기업들은 사내비밀보호서약서 징구, 개인용 외부저장매체 사용 금지, 카드인식 출입통제 시스템, 퇴직 시 보안 점검 등 다각도의 보안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개인 이메일, 웹하드, 위챗 등 보안 감시를 우회할 수 있는 경로를 통해 유령처럼 자료를 실어 날랐다.
피해 회사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보안 체계를 대폭 강화했다. 솔브레인의 경우 국제 보안 표준에 맞춰 보안 수준을 향상시켰고, 인적 보안 관리와 퇴직자 보안 체계를 고도화했다. 정기적인 보안 감사와 모니터링은 물론, 기술 유출 대응 모의훈련을 통해 실질적인 방어 역량을 강화했다.
수사 과정에서는 주범 안 씨는 이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기밀 자료가 담긴 하드디스크와 출력물을 공범의 주거지에 숨기도록 지시한 증거은닉 교사 정황까지 포착됐다.
대전지방법원 제12형사부(나상훈 재판장)는 국가핵심기술 및 산업기술 유출이 기업이 쏟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무력화하고, 국가 산업 경쟁력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중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안 씨가 전체 범행의 설계자로서 공범들을 기능적으로 지배했다고 보아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다만 중국에서의 사업이 최종적인 성공에 이르지 못한 점 등은 양형에 고려됐다. 부사장직에 올랐던 피고인 방준혁 부장(가명)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사업계획 발표자료를 작성한 피고인 나성도 팀장(가명)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나머지 공범들에게도 가담 정도에 따라 징역형의 집행유예와 벌금형이 각각 내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 유출은 개별 기업의 생존을 넘어 소재 산업 전체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범죄”라며 “기술 유출은 반드시 잡히고 엄하게 처벌된다는 인식이 산업 전반에 형성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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