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술은 누군가의 퇴근길 가방 속에 담겨 조용히 국경을 넘는다. 수십 년간 쌓아올린 연구 성과와 국가 전략 기술이 출력물 몇 장, USB 메모리 스틱에 담겨 사라진다. 기술 유출 사건은 매년 수십 건씩 적발되지만, 그 전모는 단편적으로만 드러난다. 비즈한국은 4부작 기획 ‘기술간첩’을 통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유출의 순간을 재구성한다.
1.
정명중 상무(가명)가 처음 퇴사를 입에 올렸을 때, 회의실의 공기는 예상보다 담담했다.
“좀 더 역할을 주셔야 합니다.”
한때 그는 늦은 퇴근길, 막힘없이 뻗은 고속도로가 자기 커리어의 궤적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박사 학위를 쥐고 시작해 15년 만에 상무급까지 올랐다. OLED 소자 분야에서 그의 이름은 일찍이 업계에 통했고, 이제 이 조직 안에서 올라설 계단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02X년 4월의 면담에서 새 직함을 노골적으로 요구한 건 아니었다. “상무에서 전무로”라는 말 대신 “업무와 역할의 확대”라는 표현을 골랐다. 그러나 의미는 명확했다. 더 큰 권한, 더 큰 입지.
돌아온 건 완곡한 거절이었다. 현재 조직 구조상 어렵다는 설명과 지금도 충분히 중요한 자리에 있다는 위로. 회의실 문을 나서며 정 상무는 짧게 생각했다.
‘여기까지인가.’
그해 11월, 그는 같은 말을 다시 꺼냈다. 이번엔 문장이 달랐다.
“이번에도 어렵다면….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2.
퇴사 의사는 이듬해 초 공식화됐다. 사유는 유럽행이었다. 유학 중인 자녀 곁에 있기 위해 떠나겠다는 그의 말에 회사는 손사래를 쳤다.
“휴직은 어떻습니까. 1년 정도 쉬고 오시죠. 체류비는 회사가 부담하겠습니다.”
소자 기술 핵심 인력을 순순히 내줄 수는 없었다. 협상 테이블은 빠르게 달궈졌다.
“퇴사하시더라도 자문역으로만 남아주신다면, 월 1200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다른 회사에 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요.”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불상사는 막아야 했다. 그래서 더 좋은 조건을 붙였다. 그러나 정 상무는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여기서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습니다.”
유럽행은 실제였다. 비행기 표를 예매했고 어학연수 등록도 끝났다. 주택 임차도 알아봤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정명중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3.
이 무렵, 그의 업무 패턴이 달라졌다.
“3월 중순까지는 출근하겠습니다. 4월 초까지는 재택으로 하고, 나머지는 휴가 처리로….”
앞서 어느 늦은 밤, 그는 회사 내부망에 접속해 파일 하나를 열었다.
‘2X0908_Mega_Project_Strategy_v0.19).pptx’
소자 개발 계획과 투자 일정, 장비 라인별 전략이 촘촘히 담긴 장기 전략 계획서였다. 스크롤을 천천히 굴리다가 프린트 아이콘에 커서를 올렸다. 수치와 그래프, 핵심 데이터가 밀집한 슬라이드 몇 장을 골라 출력했다. 프린터가 돌아가는 동안 새 파일을 열어 OLED 재료 조합, 평가 결과, 공정 조건을 확인했다.
보안 시스템은 그 로그를 조용히 기록하고 있었다.
정 상무가 몸담은 회사는 국가핵심기술 보유 업체였다. 자료는 등급별로 나뉘어 관리됐고, 대외비 이상의 파일은 관련자만 접근할 수 있었다. 자료유출방지시스템(DLP)이 자료 열람과 출력 로그를 감시했고, 외부 반출에는 책임자 승인 절차가 뒤따랐다.
퇴근길 출입구에서는 매일 가방과 출력물, 저장장치를 확인하며 보안검색을 했다. 스마트폰에는 회사 보안 앱이 돌아가고, 사내에서는 카메라 기능이 제한됐다. 임직원은 해마다 보안 교육을 받고 영업비밀 유출 금지 서약서에 서명했다. 상무급 연구위원 정명중도 예외가 아니었다.
재택근무가 시작된 뒤 그는 팀원들에게 자료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팀원들은 지난 2년 치 OLED TV 소자 관련 회의록부터 물질별 조합 데이터, 평가 결과 엑셀 파일 따위를 찾아 전송했다. 요청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팀원 이성훈이 그룹장에게 조심스럽게 보고하고 나서야 자료 전송 금지 지시가 내려왔다. 한편 정 상무는 퇴직 의사를 처음 밝힌 뒤 근 1년간 자신의 자기소개서와 회사 임원 프로필도 여러 차례 출력했다.
4.
압수수색에 나선 수사관들이 그의 자택에서 찾아낸 것은 출력물과 노트북, 업무수첩만이 아니었다.
책장 틈에 꽂힌 서류 봉투. 그 안에서 꺼낸 계약서 상단에는 선명한 한자가 찍혀 있었다.
華東光電(화동광전).
그의 회사와 경쟁하는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였다. 발신인 이름도 주소도 없는 봉투 속에는 중국어 채용계약서 2부가 들어 있었다. 수신인이 정 상무가 아니라고는 의심하기 어려웠다. 잘 쓰이지 않는 생소한 한자 성명부터 자택 주소, 전화번호까지, 모두 그의 것이었다.
직책은 ‘R&D센터 과학자’. 고정급 208만 위안에 성과급 80만 위안, 그 외 각종 수당을 합한 연봉 총액 450만 위안.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한화 8억 6000만 원 수준이었다. 계약기간 3년, 근무 개시일, 급여 지급 조건, 상업보험 가입 여부까지 빈틈없이 기재돼 있었다. 비어있는 건 서명란뿐이었다.
5.
2026년 2월 어느 날, A 지방법원 형사 법정.
재판부는 전년도에는 16회에 불과했던 회사 클라우드 자료 출력이 승진 요청이 거절된 2021년 114회(일반자료 74회, 대외비 이상 자료 40회)로 급증한 사실을 지적했다.
피고인의 업무용 노트북에서 확인된 하드디스크 탈착 및 재부착 흔적은 강력한 정황 증거로 판단됐다. 디지털 포렌식 분석 결과, 재택근무 기간 업무용 노트북의 SSD가 탈착됐다가 재부착된 흔적이 확인됐다. 다음 날 노트북에 저장된 기술 자료 대부분이 삭제됐다. OLED 소자, 증착 라인별 장비 등 피해회사의 기술 자료가 대량으로 저장돼 있던 노트북이었다.
피고인은 노트북 수리를 위해 IT 업체에 연락했다고 주장했으나, 회사 IT부서나 외부 서비스 업체에 수리를 의뢰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검사와 피고인 측이 모두 동의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실험에서도 포렌식 보고서와 동일한 결과가 도출됐다. 재판부는 “저장장치를 탈착한 후 다른 방법으로 데이터 복제를 시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을 생각하기 어렵다”고 봤다.
피고인이 퇴직 무렵 중국 경쟁업체에 근무하는 지인과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과 주거지에서 구체적인 조건이 기재된 중국어 채용계약서가 발견된 점도 함께 고려됐다.
재판부는 “통상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계약서를 2부 작성해 양 당사자가 각각 1부씩 나눠 갖는 것을 고려하면, 계약서가 2부 들어 있었다는 것은 사실상 계약조건에 대한 교섭이 모두 이뤄졌고, 피고인의 서명만을 받아 그중 1부를 돌려받으면 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피고인이 “계약서를 누가 두고 갔는지 모른다”고 진술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 피고인이 퇴직 이후 경쟁업체로 이직해 해당 자료를 활용할 목적을 염두에 두고 반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다만 유출된 자료의 양이 많지 않고, 실제로 피해가 현실화되거나 금전적 이익을 취득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정 상무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15년의 연구가, 거절당한 승진이, 책장 틈의 봉투가, 그 모든 것이 이 짧은 문장으로 수렴됐다.
서명란은 끝내 채워지지 않았다. 유럽행 비행기도 뜨지 못했다.
기사는 2022년 LG디스플레이 임원급 연구원이 퇴직을 앞두고 회사의 국가핵심기술 자료를 무단 반출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임원급 연구원은 승진 요청이 거절된 이후 출력 횟수가 급증했고, 재택근무 중 업무용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분해한 흔적이 발견됐다. 주거지 압수수색에서는 중국 경쟁업체의 연봉 450만 위안(8억 6000만 원) 조건이 담긴 채용계약서가 나왔다. 해당 사건은 지금까지 언론 보도 등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수원지방법원 형사13단독(김달하 판사) 재판부는 국가핵심기술을 다루는 연구자가 신뢰를 저버리고 자료를 반출한 행위가 국가 경쟁력에 미치는 해악이 크다고 판단해 실형을 선고했다. 다만 유출 자료가 압수수색으로 회수됐고, 실제 피해나 금전적 이익 취득이 확인되지 않은 점은 참작됐다. 결국 해당 연구원에게는 징역 2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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